2부 샌프란시스코
공황장애 증상을 처음 목격한 건 아내가 한국에 들어간 후 3개월만에 다시 만났을 때다. 아내를 혼자 한국에 보내고 곧장 따라 가려 했지만 일에 치이다 보니 미국 노동절 휴일에 맞춰 겨우 휴가를 낼 수 있었다. 난 오랜만에 연서와 아내를 만난다는 생각에 비행기에서 한숨도 자지 못했다. 갓 세상 밖에 나와 눈도 제대로 못 뜨던 그 귀여운 얼굴은 어떻게 변했을까? 우렁이 손톱이라 어릴 때 수없이 놀림을 당했던 난 연서가 태어나자마자 손을 펴 손가락을 확인했다. 포동포동 조막만 한 손가락들은 짧지도 펑퍼짐하지도 않았다. 그 손가락으로 짤막한 내 엄지손가락을 감싸 안았을 때 등골 끝까지 뻗어 오르던 짜릿한 전율이 생생히 기억났다. 아내도 보고 싶었다. 귀국 전 샌프란시스코에서 마지막으로 둘만의 밤을 보냈을 때 애틋함에 눈물을 떨구면서도 애써 미소 짓던 모습이 여전히 눈에 선했다. 비행기에서 내린 난 단숨에 택시를 잡아탔다. 음식을 한 상 가득 차려놓고 날 기다리던 아내를 처음 봤을 땐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나를 안으려 내민 손목은 눈에 띄게 가늘어졌고 전엔 보지 못했던 파란 핏줄이 굵게 튀어 올라 있었다. 혼자서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던 걸까? 나는 손등으로 아내 볼을 스치듯 문지르고 꼭 안아 주었다.
연서는 키우기 힘든 아이였다. 2.3kg 저체중으로 태어났고 후두연화증이 있어 분유도 서너 시간마다 50ml 정도, 그것도 한 번에 다 먹지 못해 등을 토닥여 트림을 시켜가며 먹여야 했다. 미국에서 연서 100일이 될 때까지 지내는 동안 아내나 나나 잠은 한숨도 자지 못했고 사소한 말다툼에도 폭발할 듯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그렇다고 생판 모르는 외국인을 도우미로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돈도 돈이지만 사람 관리가 너무 벅찰 것 같았다.
그래서 아내가 갑작스레 한국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했을 때도 이해할 수 있었다. 입주 도우미를 쓰고 처가댁 근처에서 애를 키우면 지금보단 훨씬 편할 테니 말이다. 연서 키우는 것도 100일이 지났으니 상대적으로 수월할 터였다. 미국에서 나와 둘이서 아이와 씨름하는 것보단 나을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 한국에 들어간 후 아내는 가끔 내게 투정을 부리거나 화를 내긴 했어도 한결 안정된 듯했다. 그런데 막상 3개월 만에 앙상하게 말라 버린 아내 모습을 보니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이럴 걸 왜 혼자 한국에 들어가겠다고 해 가지고. 당시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했지만 마음이 아프긴 매한가지였다. 겨우 일주일 후 나는 다시 미국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동안이라도 최대한 아내를 배려해야 했다.
급하게 구하느라 이것저것 재 보지 않고 얻은 전세셋집이라 할 일은 산더미 같았다. 흔들거리는 변기를 백시멘트로 고정하고 연서 방에는 암막 블라인드를 달았다. 밤 10시쯤이면 목이 잔뜩 늘어진 러닝 차림으로 아파트 복도에서 담배를 피우던 옆집 아저씨에게 신생아가 있으니 담배는 흡연구역으로 가서 피워 달라고 읍소하기도 했다. 찌든 때가 잔뜩 낀 리놀륨 바닥은 연서를 처가댁에 데려다 놓고 전용 세정제와 스크럽 브러시로 땀을 뻘뻘 흘리며 온종일 닦았다. 그렇게 며칠간 씨름을 하니 집이 그나마 사람 사는 집 같아졌다.
그리고 일요일 저녁이 됐다. 도우미는 퇴근했고 한국에선 우리 부부가 처음으로 연서와 함께 하룻밤을 보내는 날이었다. 여전히 잦은 수유 주기 때문에 자정쯤 마지막으로 분유를 먹이고 난 어느새 잠이 들었다. 문득 잠결에 귀신처럼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몇 번 뒤척이던 나는 슬며시 눈을 떴다. 새벽 3시였다. 무겁기만 한 눈꺼풀이 스르르 감기려는데 다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여보?’ 하며 손을 뻗어 더듬어 봤지만 아내는 침대에 없었다. 선득한 느낌에 휙 이불을 걷어낸 난 연서 방으로 갔다. 뿌옇게 새 나오는 수유 등 불빛 너머로 아내 뒷모습이 보였다.
“이제 좀 먹자, 연서야. 많이 먹어야 잠도 푹 자고 키도 쑥쑥 크지.”
여느 신생아 엄마가 아이한테 분유를 먹이며 할 수 있는 평범한 말이었는데 아내 몸의 흔들거림 때문인지 떨리던 목소리 때문인지 위화감이 느껴졌다. 난 내가 먹일 테니 들어가 자라고 말하려다 문틀을 움켜쥐고 발걸음을 멈췄다.
“제발 좀 먹자, 연서야. 왜 이렇게 안 먹는 거야, 먹고 좀 자자, 연서야.”
아내 어깨는 들썩였고 목소리에선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듯했다. 나도 모르게 침이 꿀꺽 넘어갔다. 순간 연서가 울음을 터트렸다. 신생아 때 듣던 ‘응애, 응애’하는 울음이 아니었다. ‘이에, 이에’하며 고막을 찌르는 듯한 고음이 울렸다. 소리는 점점 거칠어지더니 목이 막히는 듯 캑캑거리기도 하고 때로는 ‘으악, 으악’하며 고문이라도 당하는 듯 소리를 쳐 댔다. 큰일이다 싶어 발걸음을 떼려는 찰나 날카로운 뇌성이 공간을 가르며 울려 퍼졌다.
“그만 좀 하라고 이 미친년아. 왜 이렇게 울어? 나랑 확 죽어 버릴까? 내가 죽어야 속이 시원하겠니!”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아내가 욕을 하는 건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내 기억으로 제일 심한 말은 ‘병신’이었고 그것도 남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를 지칭한 말이었다. 심지어 영화를 보다가도 거친 말이 나오면 얼굴을 찡그리던 아내였다. 그런데 ‘미친년’이라니. 그것도 연서한테 말이다. 내 귀가 잘못됐나 싶었다. 그러다 다시 아내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연서야 제발 이러지 마. 말도 못 하고 그렇게 울기만 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어?”
절규하던 아내는 이내 연서를 끌어안고 펑펑 눈물을 쏟아 냈다. 차마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처음 보는 아내의 발작적인 모습이 충격이었고 그런 모습을 내게 보였다는 걸 아내가 알게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문틀에 기대서서 연서 울음이 멈추길, 그리고 아내가 진정되길 기다렸다. 10분이 넘도록 연서는 멈출 줄 몰랐다. 한참을 울며 소리를 지르고 달래기를 반복하던 아내도 마침내 포기한 듯했다. 더 이상 거친 말을 내뱉지도 흐느끼지도 않았다. 나는 슬금슬금 발걸음을 옮겨 아내에게 다가갔다.
“괜찮어? 들어가 자. 내가 연서 볼게.”
“됐어.”
“좀 쉬어.”
“당신이나 들어가 쉬어.”
“아, 내가 본다고. 그냥 들어가 자. 지금 상태로 뭘 애를 본다는 거야.”
“지금 상태? 지금 내 상태가 어때서?”
“피곤한 거 같으니까 우선 들어가서 쉬라니까. 연서는 내가 보면 돼.”
“뭘 어떻게 볼 건데, 이 병신아! 들어가 너나 자. 얘 이러는 게 하루 이틀인 줄 알아? 이제 와서 봐 주겠다고? 매일 이러는데 하루 봐 주면서 무슨 체험학습이라도 해 보겠다는 거야?”
“아, 쫌! 알았으니까 일단 들어가라고.”
아내는 탱중한 분노와 앵돌아진 눈씨로 날 한번 흘겨보고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시위하듯 ‘쾅’하고 방문을 닫았다.
연서는 그때까지도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울고 있었다. 캑캑거리다 으악 으악 하면서 팔다리를 움직이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그러곤 허리를 활처럼 뒤로 젖히고 발버둥을 쳤다. 나는 왼팔로 내 머리를 받히고 오른손으로 연서 입에 쪽쪽이를 물리며 누웠다. 연서는 기다렸다는 듯 쪽쪽이를 빨며 한동안 조용하다 싶더니 쪽쪽이를 뱉어 내고는 울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쪽쪽이를 입에 물리고 연서 등을 토닥였다. 안방에서는 이불을 들척거리는 소리와 함께 세상 무너지는 듯한 긴 한숨이 규칙적으로 새어 나왔다.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친 나는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문득 인기척에 눈을 떴다. 아내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방싯대는 연서를 간질이며 웃고 있었다. 나는 어젯밤 보았던 아내 모습이 자꾸 머릿속에 떠올라 혼란스럽기만 했다. 괜찮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미국으로 돌아오고 몇 주간은 별일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기억도 안 날 만큼 사소한 일로 아내와 말다툼을 했다. 티격태격하는 와중에 아내는 감정이 격해졌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내뱉은 말은 ‘그래봤자 최악은 당신이야. 당신은 여기 있지도 않잖아. 다른 사람들은 최소한 옆에 있기는 하지’였다. 날 두고 한국에 가기로 했던 게 본인이었다는 건 까맣게 잊은 모양이다. 아내는 내 부재를 탓하며 신랄하게 퍼붓기 시작했다. 집에 전구가 나가 관리실에 얘기해야 하는 것도 내 탓이었고 (내가 갈아 끼웠다면 낯선 사람이 집에 들어오거나 전구를 만지다 날리던 먼지에 재채기하며 온 거실에 침을 뿌리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을 테니까), 소아과에 가려다 주차위반을 한 것도 내 탓이었다. (내가 같이 있었다면 아내와 연서를 소아과에 올려 보내고 나는 주차를 하고 따라 올라가면 되니까.) 그날만큼은 나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작작 좀 해. 그래봤자 일주일에 한 번이잖아.”
“뭐라고?”
“평일엔 아줌마 있잖아.”
“당신 제발 책을 읽거나 인터넷 좀 찾아보고 해. 나 같은 사람한테 어떤 말을 하면 안 되는지 공부 좀 하라고. 그럼 최소한 미친년 더 돌게 만드는 짓은 안 할 거 아니야. 아줌마만 있으면 다 해결돼? 어떻게 애를 아줌마한테만 맡기고 가만히 있냐, 이 멍청아. 그러다 아줌마도 관두면 난 어떻게 되는데? 그런 건 생각이나 해 봤어?”
“….”
“일주일에 한 번? 그래서 아줌마 주라고 돈 송금하면 끝이지? 참 마음 편해 좋겠다. 연서 울면 난 가만히 있어? 얘 울기 시작하면 나도 이불 뒤집어쓰고 울어. 아무리 애를 써도 눈물이 멈추질 않아. 정말 힘들어 미칠 것 같다고, 이 병신아!”
“….”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확히 한 달 뒤, 나는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했다.
외로움 때문이었을까, 괴로움 때문이었을까? 홀로 한국에 있던 6개월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내는 딴사람이 된 듯 변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상처가 그녀 무의식 깊숙이 각인된 것 같았다. 육아가 힘들다는 건 나 역시 몸으로 체득했다. 아내와 연서가 미국에 있을 땐 2, 3시간마다 일어나 우유를 덥히고 투정 부리는 연서를 달래며 밤을 새우다 출근한 적도 많았다. 회의실에 처박혀 쪽잠을 잤고 출퇴근길에 사고도 여러 번 날 뻔했다. 아내가 한국에 간 뒤 육아를 혼자 해야 하는 건 사실이었지만 처가도 옆에 있고 무엇보다 입주 도우미가 있었다. 도우미는 저녁이면 연서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고 아침까지는 나오지 않았다. 최소한 밤에 잠을 설칠 일은 없는 것이다. 도우미가 집 안 청소를 하거나 식사를 준비할 때 잠깐씩만 연서를 보면 됐다. 마침 강사 자리도 생겨 일주일에 두세 번은 강의도 나갈 수 있게 됐다. 집에만 계속 있는 것보단 바람이라도 쐬면 마음은 편해지지 않을까 싶었다. 모든 면에서 상황은 나아지고 있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내 나름 추리를 해 보자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건 내 부재였던 것 같다. 하지만 부재가 영향을 미친다는 건 무슨 뜻일까? 영향을 미치려면 무언가 실재해야 한다. 예를 들면 연서가 아프다거나, 집안에 무언가 고장나든가 말이다. 연서가 아파서 아내가 힘들다면 그건 죽을 듯 울어 대는 연서를 보며 생기는 신경 반응과 병원까지의 물리적 움직임 때문이다. 내 부재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다. 물론 내가 있었다면 신경 반응은 완화됐을 거고, 이동도 내가 운전하면 되니 훨씬 수월하긴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가 내 탓으로 돌리는 고통이란 건 내가 있다는 가정 하에서의 상황과 내가 없는 현실과의 괴리감에서 오는 정신적 고통이라고 할 수 있다. 온전히 생각에서 비롯된, 물리적 근거라곤 일도 없는 고통이다. 그렇다면 그 고통의 원인은 도대체 뭘까? 내 부재란 그저 허상일 뿐인데 아무것도 아닌 허상이 그렇게 큰 멍울을 만들었단 말인가? 하물며 중력 같은 개념도 물질이 존재해야 생기는 것인데 아무런 실체도 없는 정신이 어떻게 10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영혼에 각인된 그런 상처를 남길 수 있을까?
원인은 허상에 불과할지 몰라도 상흔은 실재했다. 몸에 어떤 주홍 글씨가 새겨졌는지, 교량하던 눈빛과 가볍기 그지없던 목소리에선 수시로 불안 증세가 나타났다. 어쩌다 신경을 잘못 건드릴 때면 가스관에 불을 붙인 듯 분격하거나 수도가 터진 듯 눈물을 쏟아 냈다. 그러면서 나에게 갖은 폭언을 퍼부었다. 생쥐를 노려보는 굶주린 들고양이처럼 전신의 신경을 곤두세웠고,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는 날엔 쏜살같이 달려들어 날카로운 발톱을 내리꽂았다. 물고 할퀴고 무언가에 홀린 듯 그렇게 말이다. 그러다 자신의 괴악스러운 행동에 흠칫 놀라 혼란스러운 듯 나를 밀쳐 내거나 등을 돌리고 소리 없이 쓰디쓴 눈물을 삼켰다. 끝없이 샘솟던 행복의 우물은 어느 순간 말라 버렸고 남은 건 사막 같은 황무지뿐이었다. 아무리 물을 쏟아부어도 활기가 도는 건 잠시뿐, 물은 아지랑이와 함께 증발하거나 모래알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난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물어볼까 하다가도 그날 밤 연서를 앞에 두고 몸을 앞뒤로 흔들며 흐느끼던 그녀 모습이 자꾸 떠올라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병원에 가 보는 건 어때?’라는 말이 목젖까지 올라온 것도 수십 번이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귀국해 새 직장에 안정적으로 정착했고 집도 마련했다. 언제 말을 하나 싶던 연서는 이제 영어도 곧잘 한다. 가끔 신문에 나오는 그런 집안 자제분들이 다니는 사립학교에 운 좋게 붙었고 학교 가는 걸 무척이나 좋아한다. 혼자라도 구김살 없고 모든 아이들과 잘 어울려 다닌다. 자기 말로는 반에서 인기투표하면 항상 1위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아내의 울음과 화도 가라앉았다. 특히 어둠 속에서 맹수가 튀어나오듯 발진되는 격분은 눈에 띄게 줄었다. 나에게 얘기하진 않았지만 정신과 치료도 시작한 것 같았다. 어느 순간 카드 청구서에 정신과 진료 내역이 뜨기 시작했고 주기적으로 약도 처방받았다.
하지만 치유된 건 아니었다. 내가 알지 못하고 알 수 없는 것, ‘그것’은 모습을 감추고 아내의 마음속 심연을 떠다니고 있었다. <그것>의 페니와이즈처럼 언제고 다시 나타나 아내의 정신과 육체를 갉아먹을 수 있었다. 보이진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그것이 여전히 아내의 마음속 어딘가 똬리를 틀고 부활하길 기다리고 있다는 걸 말이다. 그게 무엇일지, 어떻게 생겨난 건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 어둠의 심연을 엿보는 순간 무엇을 마주하게 될지 두려웠다. 원망과 한숨이 응집된 검은 응어리가 칼날 같은 촉수를 뻗치며 날 응시하고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의 흔적은 수시로 나타났다. 연서가 자라고 예전에 비해 삶의 질은 훨씬 나아졌지만 불안은 여전히 존재했다. 유기농 식 같은 연서 먹거리부터 입을 거리, 놀거리까지 아내에겐 모두 걱정거리였다. 요즘 아내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는 이제 10살 된 연서의 대학입시다. 입시원서에 쓸 항목은 이미 정했고 그 항목 하나하나를 만들어내기 위해 매일 고민한다. 얼마 전만 해도 존스홉킨스대학에서 주최하는 영재 교육프로그램(CTY, Center for Talented Youth) 여름캠프에 참석해야 한다며 SCAT란 입학시험을 준비한다고 부산을 떨었고, 뉴욕 카네기홀을 대관해 여는 바이올린 연주회에 참가해야 한다며 경험 있는 강사를 물색해 계획 짜기에 바빴다. 보다 못한 나는 무슨 드라마 찍냐며 얘기를 꺼내 봤지만 아는 엄마들은 남들 모르게 다 준비하고 있다며 핀잔만 들었다. 도와줄 거 아니면 가만히나 있으라고 말이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만성적 조급증과 불안증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 누구도 정시에 오는 일이 없는 동창 모임에도 10분 전까지 도착하지 않으면 안절부절못했고, 차 기름이 절반 이하로 떨어지면 강남이건 어디건 기름값은 확인도 안하고 주유소로 향했다. 이런 문제들이야 본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니 상관없었다. 하지만 북한이 미사일을 쏜다거나 일본 어디서 지진이 나는 것도 아내 신경을 건드리니 방심할 틈이 없었다.
요즘엔 그나마 요령이 생겨 상황이 조금 나아지긴 했다. 아내가 스트레스를 받을 만한 타이밍이면, 예를 들어 연서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칠 때면, 난 일부러 그녀 눈길을 피해 마트에 간다든가 세차하러 가는 등 자리를 피했다. 아내도 예전엔 술래잡기하듯 숨어 있는 나를 찾아내 있는 대로 퍼부었지만 나와 몇 번 심하게 부딪힌 후론 나를 피하기 시작했다. 한번 화가 나면 며칠이고 입을 닫아 버리는 내 성격 때문에 아내도 자주 부딪히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던 거다. 부딪히는 빈도는 점점 낮아졌고 압도적 위력을 보였던 그 가공의 존재는 영원히 모습을 감춘 듯했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 난 어김없이 ‘그것’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 수면 위로 머리를 슬며시 내밀고 악마의 웃음을 짓는 광대의 존재를. 아내는 그것을 몰아내기 위해 프로작을 삼켰을 거다. 폭탄 세례를 퍼부은 듯 위장이 쓰려 오고 근육통이 전신을 강타하겠지만 그것을 물리치려면 우악한 외세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 십분 남짓 비상구 주위를 서성거리던 아내는 그제야 진정이 됐는지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약 기운이 퍼진 듯 눈을 감고 스르르 잠이 들었다.
세상엔 이해할 수 없는 게 참 많다. 일주일 전 검사 결과를 들으려 강인찬 박사를 찾아갔다. 공식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그 많은 검사 끝에 알아낸 건 알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뿐이었다. 다만 스트레스로 인해 신경계에 문제가 생긴 것 같으니, 일단 상황을 지켜보자고 했다. 증세가 완화될 때까지는 감정을 자극하지 말고 최대한 안정을 취하라고 했다. 문득 원인도 치료 방법도 없는 내 병이 아내 증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것’은 내 심연에도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내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 잡고 내 삶을, 그리고 우리 가족의 삶을 파괴할 기회만 엿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끝없이 몸과 정신을 들볶으며 난리를 쳐 대는 통에 내 몸도 고장 난 건 아닐까? 스티븐 킹의 <그것>처럼 어떤 우주적 힘이나 근원적 공포와 불안이 내 안에 들어와 꿈틀대는 건 아닐까? 비행시간 내내 난 그 불가해한 존재를 향해 답 없는 질문만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