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샌프란시스코
다행히 앞자리에 앉아 비행기에서 나가는 데 오래 걸리진 않았다. 속도보다는 꼼꼼함과 깐깐함을 미덕으로 여기는 미국 출입국 관리관도 연서만 한번 힐끗 보고는 별 질문 없이 통과시켜 줬다. 샌프란시스코는 출장을 많이 와 봤던 곳이라 익숙했다.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겨 트램을 타고 렌터카센터까지 찾아가는 내 모습을 보며 불안이 가셨는지 아니면 6월 샌프란시스코의 청량한 공기가 마음에 들었는지 아내는 캐리어 위에 올라탄 연서와 장난을 치며 한결 편해진 모습이었다.
“연서야, 여기가 실리콘밸리야. 저쪽 너머로 가면 페이스북이 있어. 아, 인제 메타라고 해야 하나? 연서, 인스타그램 알지? 그걸 저기서 만드는 거야.”
나는 101번 고속도로를 따라 산호세 쪽으로 내려가며 연서 흥미를 끌 만한 얘기를 계속 꺼냈다. 하얀 스탠퍼드 의대 건물을 가리키기도 하고 마운틴뷰 근처에선 고속도로 가에 있는 알록달록한 로고를 가리키며 저게 다 구글 캠퍼스라는 얘길 해 줬다. 연서는 컴퓨터 수업을 들으며 본 게 있는지 마냥 신기하다는 듯 고속도로를 쳐다봤다.
호텔에는 1시간이 채 되지 않아 도착했다. 실리콘밸리는 호텔 방 잡기 어렵고 비싸기로 뉴욕 못지않았다. 아무리 허름한 호텔도 이삼백 불 넘기가 예사였고 최소 몇 주 전에는 예약해야 방을 구할 수 있었다. 그중 서니베일 코트야드는 가장 가성비 좋은 3성급 호텔이었다. 비행기를 이코노미로 끊으면서 호텔은 좋은 데로 하자고 얘기했지만 백만 원을 더 써야 하는 4성급 산타클라라 메리어트보단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일요일에 PG&E에서 전기공사를 한다고 합니다. 몇 시간 정도 전원이 나갈 수 있는데 괜찮으세요?”
체크인을 하려는데 매니저가 말했다. 역시 미국이다. 여기 살 때도 가끔 이런 일이 있었다. 선진국이라 해도 그만큼 오래전 도입돼 낙후된 인프라가 여기저기 고장 나기 일쑤였다. 특히 전기와 통신은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는 우리나라와 다르게 조금만 시골로 들어가면 빈번히 문제가 발생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스낵 쿠폰을 받거나 포인트라도 조금 더 달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아내나 연서를 생각하면 더 이상 지체할 순 없었다. 난 비행기에서 괴로워하던 아내를 떠올리며 방이나 빨리 달라고 재촉했다. 전기공사 하나가 나중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상상도 못 한 채 말이다.
“당신, 여기 슬리퍼가 없는데.”
“응?”
“슬리퍼가 없다고.”
목소리에 날이 잔뜩 서 있었다. 슬리퍼와 샤워 가운은 4성급 이상 호텔에만 있다. 코트야드에는 없는 게 당연했다. 아내는 호텔 방을 살피며 맨발로 방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신발을 신고 들어가지도 못한 채 입구에 서 있었다.
“여긴 원래 없어. 그냥 들어가.”
내 말에 아내는 쓰레기장을 걸어 들어가듯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책상에 털퍼덕 앉으려는 연서를 잡고는 가방에서 소독 티슈를 꺼내 책상부터 문고리까지 닦기 시작했다.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할까 하다가 뻔히 예상되는 핀잔 소리에 조용히 짐만 풀었다.
“뭐야!”
화장실에서 퍼지는 아내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샤워실 구석을 가리키는 아내 손가락을 따라 눈길을 돌리니 모서리 줄눈을 따라 누런 물때가 보였다. 지금 이걸 더럽다고 불평하는 건가? 사실 실리콘밸리에서 이 정도면 양호한 편인데 이해할 수 없었다. 하룻밤에 사오십만 원씩 쓸 생각이 아니라면 이 정도는 감당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쪽 동네 호텔이 원래 다 그래. 너도 여기 살아 봤으니 알 거 아냐?”
하긴 아내는 여기 아파트에 살았던 거지 호텔에 있어 본 적은 없으니 모를 수도 있었다. 게다가 코로나 후로는 국내 여행만 다녔으니 과도하게 깔끔하고 깨끗한 환경에 익숙해져 버린 걸지도 모른다. 실리콘밸리와 뉴욕 출장을 오가며 허름한 미국 호텔에 걸맞은 기대치가 있던 나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일그러진 표정을 억누르며 아무 말 없이 짐을 풀었다. 젠장. 그래도 서니베일 코트야드면 이 동네에서 가성비는 제일 좋은데, 그것도 내가 그만큼 출장을 와 봐서 아는 건데 왜 이런 반응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내는 나와 눈도 안 마주치며 한참 동안 호텔 방 안을 닦고 정리했다. 우리가 첫 행선지인 산타나 로우로 향한 건 한참 뒤 정리가 모두 끝난 후였다.
밖에 나오니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 역시나 캘리포니아 공기는 상쾌했고 햇볕은 따사롭기만 했다. 주차하고 산타나 로우 메인 도로로 나가자, 연서는 바로 탄성을 질렀다. 도보를 따라 형형색색 파라솔이 펼쳐졌고 길가 곳곳에 놓인 화단에는 진홍빛 프리뮬러와 코럴빛 마리골드가 가득 피었다. 사이사이 돋아난 연보랏빛 라벤더와 핑크뮬리는 바람에 살랑이며 푸근한 향을 풍겼다. 아내는 흥분한 당나귀처럼 폴짝폴짝 뛰면서 앞으로 나가려는 연서 옷깃을 잡아당겼다. 갓 상경한 시골 쥐 같다며 창피하다 하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미국은 참 변화가 느리다. 예전에 있었던 세포라나 술라테이블 매장 모두 그대로다. 아내와 둘이서만 거닐던 이 길을 셋이 걷자니 무언가 벅차오르는 느낌이 있었다. 연서는 아내 손을 끌고는 세포라에 들어갔다. 한국에서도 자주 갔던 매장이고 미국이라고 딱히 다를 건 없는데 연서는 마냥 신기한가 보다. 어딘가 익숙함과 새로움 사이에서 편안함과 재미를 찾았다고나 할까? 세포라를 한 바퀴 둘러본 연서는 이제 전초전은 마쳤다는 표정을 지으며 본격적으로 산타나 로우를 탐방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변하게 한 건 뭐고 변하지 않은 건 뭘까? 한 달에 두세 번씩 주말에 아내와 오게 되면 습관처럼 둘러봤던 매장들은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연서가 습관으로 굳어졌던 기억에 들어오자 모든 게 새롭게 채색됐다. 연서가 가장 좋아한 건 페이퍼소스라는 문구점이었다. 연서는 중동 양탄자처럼 화려한 문양을 한 포장지나 금문교가 담긴 스노우볼을 쳐다보다 계산대 근처에 꽂혀 있던 책 한 권을 꺼냈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혼자서 킥킥대며 책을 읽던 연서는 내가 다가서자, 책 표지를 내밀어 날 가로막았다. 책 표지에는 <아빠들 조크, Daddy Jokes>라고 쓰여 있었다.
"아빠, 아빠. 골프치는 데 왜 양말을 한 짝 더 가져가는 줄 알어?“
“양말? 왜?”
“홀인원 날까 봐. 알겠어? 홀, 인, 원이라고.”
연서는 낄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난 한참이 지나서야 홀인원(hole in one)이 ‘한 짝에 구멍이 났다’와 같은 뜻이란 걸 이해했다. 쳇. 영어 유치원을 괜히 보낸 건 아닌가 보다. 하긴 돈을 그렇게 썼는데.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이런 고단수 영어 농담을 혼자 이해하고 웃다니 말이다.
우린 그대로 길을 따라 웨스트필드 쇼핑몰까지 갔다. 연서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매장을 구경하기 바빴고 난 펄을 잔뜩 넣은 달짝지근한 밀크티를 들고 한 발짝 뒤에서 여유롭게 연서와 아내를 뒤따랐다. 갖은 유혹에도 잘 버텨 내던 연서는 ‘클레어스’라는 악세서리 매장에서 무너졌다. 아내 말로는 아이들 성지라고 하는데 애들 반지, 목걸이부터 화장품이나 할로윈 코스튬까지 없는 게 없었다. 연서는 결국 거금 50불을 눈가에 붙이는 반짝이 스티커를 사는 데 써 버렸다. 친구들에게 선물할 거라며 천금 같은 미소를 보이는데 지갑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니다 보니 한때 일상으로 오가며 거닐었던 주거지가 이제 큰맘 먹고 여행을 와야 올 수 있는 관광지가 되어 버렸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머릿속에 의문 하나가 떠올랐다. 아내는 이 여유로운 삶을 두고 왜 한국에 갔던 걸까?
아내가 폭탄선언을 했던 건 연서를 낳고 두 달쯤 됐던 어느 날이었다.
“나 한국 들어갈래.”
“한국? 갑자기 무슨 소리야? 연서하고 난 어떻게 하고?”
“당신은 여기 있어. 일도 있는데 갑자기 들어갈 순 없으니까. 연서는 당연히 내가 데리고 들어가야지.”
“연서를 혼자 어떻게 보려고?”
“한국 가면 입주 아줌마도 쓸 수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오히려 여기보다 나을 것 같아. 그게 들어가려고 하는 이유 중 하나기도 하고.”
“그래도 이건 너무 큰 결정이잖아. 갑자기 왜?”
“연서도 연서지만 나 여기선 일도 못 하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교수님이 들어오면 강사 자리 만들어 준다고 그러셨거든.”
보통 기러기라면 남편이 한국에 있고 아내와 아이들이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로 유학을 가는 케이스인데 내 경우엔 반대가 됐다. 아내는 미국에서 육아가 힘들다는 둥, 일을 다시 하고 싶다는 둥, 핑계를 대긴 했지만 진짜 이유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바로 최근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아버님 때문이었다. 아버님에 대한 그녀 마음은 각별했다. 똑 부러지고 철두철미한 변호사 동생이 어머니와 연대가 깊었다면 아내는 딸바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막내 같은 첫째로 자랐다. 그래서 은퇴 후 힘이 빠진 아버지의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렸고 급기야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자, 자신이 아버지를 지켜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이 생겼던 것 같다. 나는 다시 생각해 보라며 말리긴 했지만 이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 역시 연서 때문에 지칠 대로 지쳤기 때문이다. 아내가 강사 일을 한다면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때는 몇 개월간 미국에서 함께 있을 수 있고 나도 일 년에 두어 번 정도는 한국에 나갈 수 있으니 떨어져 있는 게 크게 우려될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우리 삶은 달라졌다. 잠깐 들어가 있는 것일 뿐이라고, 때가 되면 정리하고 다시 미국에 올 거라 했지만 아내는 돌아오지 못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연서는 어느새 훌쩍 커버렸고, 아내는 일도 그만두게 됐지만 이제 미국에 다시 간다는 건 생각조차 하기 힘든 일이 돼 버렸다. 만약 미국에 계속 있었다면 우리 가족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지금 풍경과 비슷한 삶이 되진 않았을까? 불가피했던 선택으로 가지 못했던 길과 그로 인해 달리진 모든 것들이 현실과 중첩되어 눈앞에 아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