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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요일 Jun 21. 2023

공작초의 감격

D-119

  삽시간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이었다. 어언 두 달 만에 마주 본 서로의 눈빛은 좀처럼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혹시, 그때 가졌던 감정들 아직도 남아 있어?”

  “아니, 그럴 리가.”

  내 얼굴은 금세 붉게 익은 토마토처럼, 그리고 두 광대는 여름 모기에 톡 쏘인 것처럼 빠르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풀던지.”

  더한 이야기가 이전에 오고 갔지만, 불과 몇 분 전인데도 기억이 안 날 만큼 우리는 설레면서도, 조심스러운 감정을 도서관에서 토해내고 있었다. 서로의 민망스러운 미소를 넌지시 호흡하며, 붉게 달아오른 두 뺨으로 애먼 공간을 청소하던 우리였다.

  “나 진짜 용기 낸 거 알지.”

  “맞아. 너 무진장 용기 냈어. 난 도저히 못 할 것 같았거든.”

  틀림없이 그가 엄청난 용기를 냈음을 난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우리는 서로에게 솔직한 사람이었다.     

  오묘한 열기를 수많은 책에 맡기고 우리는 그렇게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몇 분 전만 하더라도 우연찮게 배정된 둘만의 청소 구역은 어쩌면 우리를 고통으로 내몰 것처럼 보였지만, 다행히 한쪽의 용기가 그 불쾌한 정적을 깨트린 것이었다. 난 그런 그가 무척 고맙게 느껴졌다. 그렇게 난 속된 말을 어색히 내뱉으며 오랜만에 그의 어깨를 지그시 감쌌다.     


  “너무 힘들었어. 그동안 재미가 너무 없었거든.”     


  가장 친밀했던 사람의 부재, 그리고 그런 그와의 다툼은 틀림없이 우리를 완전히 외로운 젊은이로 만들고 있었다. 외딴섬에 버려진 두 청년은 점점 섬의 양 끝으로 안식처를 옮기고 있었고, 그 사이의 공기는 더욱이 수분을 잃어가는 중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 시들어 버린 꽃처럼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듯했다. 훗날 두 시체는 분명 동떨어진 곳에서 발견되는 것이었다.     


  “자꾸 네가 생각나더라고. 의식을 안 할 수가 없더라.”

  “말해 뭐해. 난 네가 계속 꿈에 나왔어.”     


  이전까지의 우리는 너무 가까운 나머지 서로의 감정에 몹시 솔직했었다. 그러다 보니 별것 아닌 것에 서운함을 토로할 때가 잦았고, 사소한 뒤틀림에 과한 의미를 부여하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 그 당시의 우리에게는 예민하게만 다가왔다. 아무래도 우린 너무 과도한 정을 나눴고, 그런 식으로 극대화된 말다툼이 여태껏 우리를 고독사 직전으로 내몰고 있던 것이었다.     


  “내심 네가 먼저 다가오길 기대했는데, 어쩌다 보니 시간이 너무 흘러버렸어. 그러다 갑자기 둘이 청소하게 됐으니, 오늘이 적기다 싶었지.”     


  적개심을 빌려 관계에 애써 무심해지려 해봐도, 공작초의 꽃말이 이따금 꿈속에서 아른거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눈동자에 비친 서로의 그림자가 매번 허수아비처럼 쓸쓸한 형상을 띠고 있었다. 그렇게 분리되어 흘러가는 외딴 시간은 주변인들에게마저 썩 달갑지 않았다. 우린 그만큼 몇 안 되는 이곳의 돈독한 사이였다. 그러나 지속되는 어색한 침묵과 정적은 둘의 간극을 넓혀갈 뿐이었고, 할 말은 산더미처럼 켜켜이 쌓여만 갔다. 그럼에도 내게 용기는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나도 그냥 질러본 거야. 네가 받아주지 않는다 한들, 이 상황을 더 이상을 끌고 갈 수 없다고 판단했으니까. 일단 뱉어나 보자 한 거지.”     


  무심과 불안의 혼재, 회피와 애틋함의 혼란들 속에서 흘러간 두 달은 남겨둔 일말의 여지마저 차츰 지워가는 듯했다. 그렇게 용기는 더더욱 미약해져만 갔고, 함께 지내는 공간의 여백은 부피를 점점 더 키워가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관계의 덧없음을 억지로 곱씹으며 외딴 생존을 홀로 이어갈 뿐이었다. 우리는 분명 멀어지고 있었고, 다시는 회생할 수 없는 관계라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 자리한 공작초의 보랏빛은 자꾸만 내 목을 들쑤셨다. 도저히 일상에서 지워지지 않는 그의 흔적들이 잔여 적개심을 조금씩 억누르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내뱉는 그의 이름, 그리고 우리의 지난 대화와 추억들이 허공에 스며들 때마다 난 좀처럼 그의 부재를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난 새벽 무렵이 돼서야 잠꼬대를 빌려 용기를 뱉었다.

     

  나란히 침대에 누워 엄마를 어둠 속에서 발설한 순간도, 이 불행과 우울의 글씨들을 함께 붙잡은 여러 순간도 모두 그와 함께였다. 그저 외딴곳의 외딴 즐거움을 공유할 사람. 단순히 개인이 아닌, 동반자로 다가오는 따스한 의지체. 그걸 찾는 것은 분명 하늘의 별따기지만, 다행히도 난 오늘 흩어진 빛 조각을 다시 모을 수 있었다.     


  “나 원 참, 감격의 눈물이 절로 흐른다. 이 자식아.”

  “뭐라는 거야. 정말.”     


  나는 드디어 공작초의 감격에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믈론 여전히 겁쟁이인 나 자신을 향한 조금의 탄식을 섞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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