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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요일 Oct 10. 2023

살해, 사랑, 일주일

D-7

⠀마치 살을 도려내는 듯한 추위라고나 할까. 바로 그 살벌한 느낌이 오늘 내 몸을 스쳐 지나갔다. 턱이 빠지도록 고대하던 그 한기. 육체는 두려움에 떨었지만, 정신은 서서히 말짱해지고 있었다.


⠀여름 다음 겨울. 이 말은 결코 틀리지 않는 진리의 문장이었다. 마침내 나는 마지막 계절의 순환을 오늘 보았다. 역시나 이곳은 새하얀 눈덩이들과 휑한 나뭇가지들, 그리고 그 아래의 싸늘한 눈빛들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공간이었다. 앙상한 벚꽃 따위가 머무를 수 있는 곳이 절대 아니었고, 새하얀 늑대의 울음소리가 온 사방에서 귀를 간지럽힐 것만 같은 허공이 온종일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러고는 다시는 맡고 싶지 않은 냄새를 양껏 풍겼다. 외로움에 사무친 내 옆 사람이 당장 하루 이틀 정도는 눈앞에서 사라져 버릴 수도 있을 정도였다. 나는 그 정도로 악명이 높은 이곳의 냉랭함을 냉랭한 표정으로 반겼다.  


⠀“그래도 난 이 추위가 반가워.”


⠀그는 아무래도 무척 지겨운 듯 보였다.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추운 건 추운 거였다. 내 입은 그저 추위에 무조건적으로 반사되는 육체의 떨림만을 내뱉고 있었다.


⠀"아니, 이건 너무 추운 거 아니야? 이렇게 날씨가 급변할 수 있다고? 윽, 추워..."


⠀몇 줄의 문장과 함께 입김이 흘러나왔다. ‘입김, 입김이라니...’ 혼자 속으로 하얀 입김의 실존을 자꾸만 의심했다. 그 와중에도 입 밖으로 내뱉어지는 문장은 새하얀 형상을 띠었다. 겉옷 주머니 속으로 감춘 두 손도 묘한 긴장감에 부르르 떨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소외된 땅 위에서 오늘의 아침을 맞았다.


⠀어제는 한밤중 차가운 복도 위에 홀로 서 있었다. 지겨울 법도 한 두 시간의 고독은 여전히 치가 떨렸다. 그러나 나는 몇 가지를 간과한 것이었다. 시월의 싸늘함, 흰색의 드넓은 복도, 그리고 여러 출입문의 빈틈으로 스며드는 한기와 지역 특유의 구린내. 하지만 그 한가운데 겁 없이 위치한 내 옷차림은 그것들을 감당하기엔 너무나 연약했다. 다시 겉옷을 주섬주섬 가지고 나와 상체를 두껍게 감쌌지만, 그럼에도 몸 전체가 몹시 떨렸다. 나는 그제야 이 순환되는 계절의 종말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새벽녘 복도 중앙으로 스며드는 냉기에는 분명 한 줄기 빛이 보였고, 졸음에 못 이겨 게슴츠레 뜨고 있던 내 눈에는 여유로운 열망이 담겨 있었다. 의지가 고인 눈빛 또한 싸늘한 복도 위에서 가뿐히 생존해 나갔다. 추위를 피해 주머니에 숨어든 두 손, 그 속에서 내가 움켜쥔 것은 틀림없이 앞날을 향한 열망이었다. 난 그렇게 또 남은 하루의 목을 신중히 베었다.


⠀각자가 짊어 온 일상의 궤적을 잘못된 것으로 규정하는 분위기는 일찌감치 탐탁지 않았다. 돼먹지도 않은 소리를 해대는 인간들의 입은 이따금 내 동공에 먹칠을 해댈 뿐이었다. 중독과 침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굴종적인 성향, 안타깝게도 나는 그따위 것들과 결국 친해지지 못했다. 이곳의 추위는 아직도 눈살을 찌뿌리게 할 뿐이며, 몇몇 인간들의 핍박은 지금도 열등감 섞인 푸념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주변을 오고 가는 저속한 말들, 그리고 야만스러운 인간들의 손짓은 볼 때마다 세상을 혐오하게 만들고, 이따금 체화되려 하는 나 자신마저 증오하도록 조용히 이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여태껏 시월의 협박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담배 물린 그들의 입에서만 뿜어져 나오는 흰 연기가 내 입에서 따뜻하게 나오는 날만을 손꼽아 고대했다.


⠀오늘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하루를 목졸라 살해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애틋한 대화를 나누고, 한숨이 아닌 조금은 이른 해방의 감격을 수화기 너머로 흘려보냈다. 진정한 의미의 사색과 고독을 즐기는 인간의 본모습이 점점 고개를 내밀고 있음을 난 비로소 오늘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불안과 걱정이 활개치는 시기가 다시 찾아온 것인지도 모르지만,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색깔의 감정들이었다. 불결한 냄새가 나지 않는, 적당히 아슬아슬한 분위기만이 내 주위를 온종일 감돌았다. 오래전부터 나는 이 느낌을 사랑했지만, 눈앞이 캄캄한 지난날에는 눈곱만치도 느껴지지 않는 감정이었다.


⠀“진짜 얼마 안 남았다.”


⠀하루에도 수십 번 내뱉는 문장, 그러나 족히 몇 백 번은 더 내뱉어야 할 것 같은 말. 난 오늘도 자기 최면을 걸었다. 요 며칠의 꿈들은 이 문장이 정말 실감 나게끔 화려한 연출을 내보였다. 섣부른 착각을 머금게 했지만, 어찌 보면 예견된 행복을 마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있었다. 가을바람에 차분히 흩날리는 머리칼, 네이비색 셔츠 위로 착지하는 벚꽃잎. 외딴곳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들을 나는 몇 번이고 새벽녘에 목격했다.


⠀멋쩍게 웃어 보이는 표정과 더불어 경직되는 광대는 아직도 여전하다. 애석하게도 나는 아직도 몇몇 인간들의 지저분한 입가를 어려워한다. 그러나 내 몸은 더 이상 아침나절에도 느릿느릿 굼뜨지 않는다. 그리 달갑지 않던 귀소본능이 비로소 이 자리에서 발현되기 시작한 시점은 바로 그저께부터였다. 날이 거듭될수록 발견되는 혓바닥 위 녹색 건더기, 제대로 된 토악질이 나오기까지는 아직 조금의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나는 오늘부로 유예된 꿈을 시궁창 속에서 건져 올렸다. 즐거움 또한 빌어먹을 수식어를 조금씩 떼내기 시작했다. 때 묻지 않은 자유의 숨결이 드디어 코앞으로 다가왔음에 나는 오늘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평범한 타인들의 빛을 주워 삼키며 겨우 생존하던 내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되찾기까지 걸린 시간, 오백사십일. 끝끝내 나는 다시금 불완전한 영혼의 소유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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