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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르슬라 Aug 11. 2023

가장 따뜻한 색, 블루 (2014)

- 사랑하면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들

감독 : 압델라티프 케시시

출연 : 아델 엑사르코풀로스, 레아 세이두


BBC가 선정한 21세기 위대한 영화 45위에 랭크된 압델라티프 케시시 감독의 <가장 따뜻한 색, 블루>를 보았다. 지금껏 본 몇 안 되는 퀴어무비 중 가장 재미있었고 인상 깊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델(아델 엑사르코풀로스)의 감정을 우직하게 따라가는데 배우가 엄청난 호연을 한 것은 물론이고 그 연기를 끌어내기 위한 압델라티프 케시시 감독의 디렉션도 아주 디테일하고 생생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처음 보는 어린 배우가 이렇게까지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고등학생인 아델은 예쁜 외모로 인기가 많은 편이지만 연애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오히려 책을 좋아하고, 자기 생각을 편하게 남길 수 있는 일기 쓰기를 즐기는 여학생이다. 친구들이 부추겨서 자신을 훔쳐보는 남학생과 데이트를 하고 잠자리도 갖지만 뭔가 텅 빈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길에서 자신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짧은 파란색 머리를 한 여자가 아델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다. 거기에 학교 친구 한 명이 아델에게 '넌, 정말 예뻐' 하면서 입을 맞추는데 그 사건이 아델을 완전히 뒤흔든다. 설마 설마 했는데, 자신이 동성애 성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아델은 고민을 하다가 자신에게 입 맞춘 그 친구에게 키스하는데, 친구는 자신은 레즈비언이 아니다, 그냥 충동적으로 키스한 것뿐이다라며 선을 긋는다. 

상처를 받은 아델은 게이인 남사친과 함께 게이바라는 곳에 가게 되고 스스럼없이 애정을 표현하는 그들을 유심히 관찰한다. 하지만 아델이 찾는 것은 바로 파란 머리의 여자이다. 그리고 운명처럼 그녀를 만난다. 



대화를 하면서 점점 더 그녀에게 빠져드는 아델. 하지만 그녀 엠마(레아 세이두)에게는 2년 사귄 여자친구가 있다. 그렇게 아쉽게 헤어졌지만 엠마가 아델의 학교 앞으로 찾아오면서 두 사람은 급격하게 가까워진다.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스스럼없이 밝히는 엠마와 달리 고등학생인 아델에게는 아직은 힘든 일이다. 게이바에 갔다 온 사실만으로 친구들은 아델을 이전처럼 대하지 않는다. 자신을 몰아세우는 그들과 싸울 뿐, 자신이 여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말하지 못한다. 

서로에게 강하게 끌리는 엠마와 아델은 결국 연인이 된다. 엠마는 아델을 집으로 초대하고 엠마의 엄마는 이미 딸이 레즈비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 보인다. 얼마 후 이번에는 아델이 엠마를 자기 집으로 초대하는데 철학 과목을 도와주는 선배 정도로 소개할 뿐, 자신의 연인이라는 것은 말하지 못한다. 가정 분위기 역시 엠마의 집과는 달라서 아델의 아빠는 엠마가 '그림 그리는 것'으로 먹고살기 어렵다며 장래에 대해 어떤 생각이 있느냐고까지 묻는다. 하지만 부모님이 그러시거나 말거나 두 사람은 뜨겁게 사랑을 나누고 마음을 키워갈 뿐이다.


그림을 전공하고, 계속 그림을 그리면서 살아가고자 하는 목표가 확실한 엠마와 달리 그저 아이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유치원교사로 일하고 싶다는 아델. 영화는 시간을 겅중겅중 뛰어넘는데, 마치 어제와 오늘이 이어지듯 이어 붙이기 때문에 명확하지는 않으나 아마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유치원 교사로 일을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엠마와 함께 살면서 아델은 행복을 느낀다. 


엠마의 집에서 엠마의 예술가 친구들이 모여 파티를 연다. 아델은 그들을 대접하기 위해 정성껏 음식을 준비한다. 파스타를 정말 맛있게 만드는 아빠 솜씨를 그대로 닮아 요리도 잘하는 아델. 엠마의 연인으로 정식으로 인사하고 소개하고 받으며 기분이 좋아지지만 엠마의 옆에서 떠나지 않는 한 여자가 자꾸 신경이 쓰여 쳐다보게 된다. 또  아델이 엠마의 연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남자들은 예쁜 아델에게 관심을 보인다.



리즈(파티에서 엠마 옆에 붙어 있던 여자)에 대해서 물어보는 아델. 엠마는 리즈도 화가라는 말을 할 뿐 그녀를 좋게 말하거나 어떤 특별한 뉘앙스를 풍기면서 아델을 불안하게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너도 네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해야지'라는 말을 하면서 생리를 한다며 잠자리를 거부하는 엠마에게서 아델은 불안과 외로움을 느낀다. 솔직하게 자신의 심정을 말하면서 해결 방법을 찾는 대신 아델은 자신이 레즈비언인 것을 모르는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치원 동료 교사(남자)와 데이트를 한다. 집 앞에서 아델을 기다리던 엠마는 차 안에서 남자와 키스를 나누는 아델을 본 후, 그녀를 거칠게 몰아붙인다. 

아델에겐 별 의미 없는 만남이었고, 마음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기에, 여전히 엠마를 너무나 사랑하고 있고 그녀가 자신을 더 사랑해 주길 바라기 때문에 불같은 화를 내며 이 집에서 나가라고 소리 지르는 엠마가 아델은 너무나 당혹스럽다. 울며 불며 매달리고 내 얘기를 들어봐 달라고 하소연하지만 크게 배신감을 느낀 아델은 단 한 번의 기회도 주지 않고 아델을 내쫓아버린다.



어쩔 수 없이 출근은 하고, 내색 않고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혼자가 되면 절로 눈물이 난다. 그런 아픈 시간들이 흘러 흘러 몇 년 후 아델은 엠마에게 연락해 만난다.

아델을 만나러 나온 엠마. 그녀를 여전히 사랑하는 아델이지만 이미 엠마는 리즈와, 리즈가 낳은 아이(파티에서 만났을 때 리즈는 만삭이었다)와 함께 살고 있었다. 서로 안부를 묻다가 '잠자리도 만족하느냐?'는 아델의 질문에 '그렇지 못하다'는 뉘앙스의 대답을 한 엠마에게 아델은 적극적인 스킨십을 하며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엠마는 그녀의 돌발 행동에 무척 흥분을 느끼지만 곧 멈춘다. 


"너에 대한 애틋함은 있지만 널 사랑하지는 않아."


또 얼마의 시간의 흘러 엠마는 아델을 자신의 전시회에 초대하고, 큰 기대는 없었지만 예쁘게 꾸미고 간 아델이 보게 되는 건 엠마와 아델이 서로 나누는 따뜻한 눈빛과 포옹이다. 몇 년 전 파티에서 만났을 때 자신에게 호감을 표시하던 남자는 이번에도 그런 마음을 표현하지만 리즈와 행복해 보이는 엠마를 보는 것은 아델에겐 고문일 뿐이기에 말없이 그 자리를 빠져나온다.




나는 나의 감정은 비교적 빨리 분명하게 알아채는 편이지만 타인이 느끼는 감정에는 매우 둔하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벌써 알아차렸을 법한 수준의 표현에도 전혀 느끼지 못하고 무감각하게 반응할 때가 많다. 그래서 이렇게 감정을 낱낱이 보여주는 방식을 꽤 선호한다. 감정과잉은 불편하지만 감정을 천천히 제대로 보여주는 것은 좋다. 

영화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사랑의 본질'이라든지, '동성애'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가 아니다. 그저 '아델 한 사람의 마음'이다. 그것을 3시간 가까운 러닝 타임을 할애해 뚝심 있게 밀어붙인다. 어쨌든 '뚝심'이란 것은 나한테 있어서는 좋게 다가온다.


아델에게 엠마가 잊히지 않는 존재인 이유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 시점과 맞물려있다. 나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혼란스러워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혹시 그럴까 봐 꽤나 두려운 그때에 너무나 멋진 사람 엠마를 만나고 그녀와 사랑을 하게 되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비로소 분명하게 인식하고 동시에 그녀에게 사랑을 받으며 어느 정도 자존감도 올라갔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아델은 자신을 내보이는 데 있어서는 미숙하다. 호감은 적극적으로 표현하지만 부정적인 감정(불안과 외로움)은 숨기고 솔직히 내놓지 않는다. 이것은 외부에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밝히지 못하는 것, 엠마와 헤어졌을 때 홀로 슬픔을 삭이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수년이 흐른 후에도 아델이 누군가에게 자신이 여자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장면이 없고,  연인과 헤어져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리면서도 다른 누군가와 함께 슬픔을 나누지 않는다. 


왜 엠마는 아델의 이야기를 한 번도 제대로 듣지 않고 가차 없이 내쫓았을까?

순간적으로는 자신을 두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에 너무 화가 나고 상처 입었기 때문일 수 있지만 그 이후로도 엠마가 단 한 번을 먼저 아델을 찾지 않는 데는 더 본질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델이 왜 그랬을까?를 생각했을 때 자신이 옆에 있어도 불안을 느끼고, 다른 사람과 조금만 친밀한 모습을 보여도 힘들어하면서도 그 마음을 전혀 말하지 않은 것. 그런 사람과 계속 함께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아델은 헤어짐의 이유에 대해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이 상황을 받아들일 뿐이다. 폭주하지 않을 뿐이다. 용기를 내어 엠마와 만날 약속을 잡았으면서도 여전히 엠마가 자신이 바람을 피워 상처 입었다고만 생각하는 것이다. 


엠마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발견하게 된 첫날이 있을 것이다. 자신도 그날들을 거쳐왔기에 아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아델의 순수함과 다정함이 엠마를 끌어당겼고, 엠마 역시 그녀를 오롯이 사랑한 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사랑이란 '나는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가'에 의해 떠밀려가게 되어 있다.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을 숙고하며 찾기 위해 애쓰는 것, 그 길을 담대하게 걸어갈 수 있는 것, 자신이 어떠하든지 간에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며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그런 가치들이 엠마에게는 양보할 수 없을 만큼 중요했기 때문에 그것이 없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된 것일 테다. 


사랑이 우리 인생에 이토록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면서도 시작되는 것 이상으로 깨어지기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어떤 이유이든지 간에 '끌림'으로 인해 시작되는 사랑이 어느 날 깨어질 때는 상대방에게서 내가 가장 원하는 어떤 것, 양보하지 못하는 어떤 것을 더 이상 발견할 수 없을 것이라는 깨달음. 이별은 그것에서 시작되고 동시에 완성된다. 


하지만 첫사랑이란 내가 어떤 사람인지,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 알지 못할 그때에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래서 대부분 잃어버리는 것으로 끝난다. 

다가올 사랑을 오랫동안 간직하기 위해서는 지나간 사랑이 끝난 이유를 헤아려보는 것이 필요하다. 현상이 아닌 원리를 깨달으며 혼자일 때에도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갈 때 다시 하게 될 사랑에서 우리는 사랑의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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