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학교에서 돌아와 저녁 식사를 시작하려던 첫째가 전화를 받더니 자기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힘들게 운동하고 왔으니 조금 쉬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고, 특별히 중요한 통화도 아닌 것 같은데 따뜻하게 준비해 놓은 밥상을 기다리게 하는 아이가 못마땅해 마음이 부글거리더라고요. 늘 자기보다 남을 먼저 위하는 것 같고, 그래서 아이가 손해를 보고 있다는 생각으로까지-비논리적이며 편향적인 생각의 줄기라는 거... 저도 압니다만... 여하튼 그 순간은 그랬어요- 궁리가 번지기 시작했어요.
방에서 나온 아이는 후배가 버스에서 정류장을 놓쳐 길을 잃어버려서 연락을 했다며 통화 내용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아니 선배라고 길 안내까지 해줘야 하나?! 자기 부모는 두고 왜 피곤한 '내 아들'한테 연락을 해?!' 갑자기 싸늘해진 마음에 아들에게 퉁명스럽게 되물었습니다. "아니 후배 길까지 네가 영상통화로 알려줘야 해?" 큰아들은 "내가 잘 아는 길이라 물어보는 거지~"하고 별일 아니라는 듯이 응답했습니다. 아차! 그 순간 누가 제 뒤통수를 한 대 세게 친 느낌이 들었어요. '어머! 나 지금 뭐라 그랬니!'
시리 허스트베트는 '어머니의 기원'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머니가 말했다.
"자식을 사랑하는 건 당연하지. 하지만 아이를 '존중'하는 것도 그만큼 중요하단다." (중략) 사랑은 자동으로 생겨나는 마음 같았다. 하지만 존중은 자동으로 생겨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이가 아니고, 바로 그렇기에 아이가 자신과 분리된 또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존중해야 할 의무가 있다.
-어머니와의 산책, <어머니의 기원> p.79
아이도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으니 통화를 했을 거고, 그 후배도 당장 도움을 받을만한 사람이 선배뿐이니 급한 마음에 연락을 했겠지요. 그런데 저는 왜 그렇게 피해의식을 가지고 상황을 바라봤을까요. 자녀를 해결해야 할 문제 덩어리로 바라보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줘야 하는 존재로 바라보는 미숙한 나의 사랑을 알아차리는 부끄러운 순간이었습니다.
후배들에게 믿고 의지하는 선배가 된 큰아들의 좋은 부분들은 떠올리지도 못한 채, 나의 상황-따뜻하게 잘 차려진 밥상을 큰 아이에게 먹이고 싶어 알맞게 준비한-의 잣대로만 아이를 바라보는 나를 알아차리고는 민망한 마음이 들어 아이에게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해대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배가 너 좋아하는 거 아냐? 왜 너한테 연락해서 길을 물어봐?"라고 말도 안 되는 농담을 던지고, 사태를 무마하려고 연이어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해대고 돌아서면서 다시 한번 시리의 글을 떠올렸습니다.
'존중은 자동으로 생겨나지 않아!'
사랑하니까 잘 되길 바라고, 존중하니까 거리를 두고 바라봅니다. 큰 아이의 키가 훌쩍 자라 이젠 적당이 떨어져야 아이를 한눈에 담을 수 있습니다. 아이의 세계가 보다 확장되면 아이를 제대로 보기 위해 지금보다 더 물러서야 하겠지요. 심리학자들이 말하던 아이들의 '자립'은 어떠면 부모로부터 '멀어짐'이 있어야 얻어지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