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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영 Sep 01. 2019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도록.

학교는 작은 사회, 학교의 현실은 미래 세대의 현실.

'정치가 문제야'라고 모두가 생각하지만, '새로운 정치를 들고 나오는 기존 정치인'들이 계속해서 당선되고, 사회적 약자들은 스스로를 대변할 정당에 투표하지 못한다. 이렇게 계속 가다간 사회의 부정의와 불합리를 해결할 수 없겠다는 암담한 생각이 드는데, '왜 그럴까'라는 물음에 항상 내가 내린 결론은 '교육이 문제'라는 거였다. 창의성이다 자율이다 자치다 교육과정이 바뀔수록 좋은 말은 많이 들어가는데, 아직까지 교육과정의 변화는 사회 변화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 같다. 학생더러 '미래 시민'이나 '미래의 주역'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잘못된 학교 문화. 교육제도를 바꾸지 않는 건 무슨 생각인지 정말 모르겠다.


학교란 학생의 삶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공간이다. 집에서 자는 시간을 빼고 나면 활동하는 시간이 가장 긴 공간. 공부를 하고 친구들과 만나고 선생님과 이야기하는 공간. 학생들은 그 공간에서 지식을 배우고 사람을 배우고 사는 방법을 배운다.

그냥 집에서만 있으면 하지 못할 경험들도 많이 한다. 대학생들과 진학 멘토링을 하거나, 현장학습을 간다던지 하는. 쉬는 시간. 방과 후에는 책을 읽을 수도, 운동을 할 수도, 악기를 배우거나 그림을 그릴 수도 있다. 혼자 하는 것보다 여럿이 하기에 그 안에서 친밀감도 기르고 협동심도 기르며 생활한다. 집에서만 있으면 책을 읽을 수도, 운동을 할 수도, 악기를 배울 수도, 그림을 그릴 수도 있지만 사회성과 협동심을 기르기는 어렵다. 학교는 결국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장소. 많은 경험을 선사하는 장소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굳이 학교에서 공부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학교가 그런(많은 경험을 선사하는) 역할을 '충분히' 수행해가고 있는가. 이 말에는 좀 회의적인 입장이다. 창의성을 기르고 논리 사고력을 기르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고 복잡할 텐데, 우리는 효율성만 찾는다.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도록.

학생들끼리 잡다한 이야기를 하는 것. 평가할만한 눈에 띄는 성과나 이렇다 할 결론은 나지 않지만, 나는 그 안에서 많은 걸 배웠다. 획일화된 교복 대신 주체적이고 개성 있는 복장을 착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도, 시행한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았을 때 '적절한가'라며 성급하게 이야기하기보다 올바른 문화가 제대로 정착될 수 있도록 논의하고 토의하는 시간을 주어야 한다. '이것이 문제다'라고 말만 하지 말고 스스로 올바른 문화를 만들어내기 위한 시간도 주어져야 하는데, 교복 자율화 시행 후 2년에서 3년 지나면 '성적 향상'이라던지 '눈에 띄는' 긍정적인 변화가 없다면서 다시 교복을 입자고 이야기한다.



나는 수도권이지만 비교적 시골인 동네에 산다. 얼마나 시골이냐면, 아파트가 없고 주위를 둘러보면 논밭이 대부분이다. 초등학교 한 곳, 중학교 한 곳에 고등학교는 아예 없고 큰 마트도 하나로마트가 전부다. 도서관도 학교도서관을 제외하면 마을에 있는 '작은 도서관' 하나만 있다. 이 작은 도서관은 학교 도서관과 비슷한 수준. 작년에는 운영시간이 길었는데, 올해부터 짧아지는 바람에 학원에 다니지 않는 (나를 비롯한) 다른 학생들이 공부할 마땅한 공간이 없어지게 됐다.

어떡하면 좋지 속으로 발을 동동 구르다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라고 마음먹었다. 근데 중학생이 할 수 있는 게 별 게 있나, 페이스북으로 만난 도의원에게 문자를 보냈다.

길고 장황하게 쓰긴 했지만 간절함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그 정도로 받아들여 주세요

결국 도의원님과 교장선생님이 이야기를 해서 시험기간에는 밤 9시까지 학교 문을 열어두기로 했다. 고등학교나 공부를 열심히 하는 중학교나 가야 볼 수 있는 야간 자율학습(야자)과 비슷한데, 신청을 해야 한다거나 어떤 강제성이 있는 건 아니다. 누구든 자유롭게 와서 간식도 먹으면서 공부할 수 있다. 공부하기 너무도 싫어서 혼자 해서는 도저히 집중이 완 될 때, 시험은 잘 봐야 되니 울며 겨자라도 먹는 심정으로 학교에 남아 공부한다.


그날도 문 닫는 시간까지 친구들이랑 공부를 하고, 집까지 걸어가는 길이었다. 핸드폰을 하며 걸을 수도 없고, 공부는 질리게 했으니 서로 이야기를 하며 걸었다. 지나가다 얼핏 들으면 별 시답잖은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 대화를 하면서 '우리가 이렇게 자라는구나' 싶었다.

하굣길의 대화 내용은 아이러니하게도 '등교'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등굣길에 생긴 일.'



"나 얼마 전에 자전거 타고 등교하는데, 어떤 차랑 부딪혔어. 근데 그 차에 타고 있던 아저씨가 자기 차는 보지도 않고 창문 열고 나한테 먼저 괜찮냐고 물어봤어."

"나도. 학교 가는 길에 차를 못 보고 부딪혔는데 아저씨가 내리더니 나 일으켜주고 괜찮냐고 물어보고 전화번호 주면서 아프면 연락하랬어."


별 것 아닌 이야기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같은 상황이 한 번 더 있었다. 집에 들어오는 골목길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내 옆으로 비싼 차가 한 대 지나갔다. 길가로 비켜서서 지나가려다가 같이는 못 지나갈 거 같아서 넘어지듯 내려섰다. 그랬더니 차에 타고 있던 분이 창문을 내리시더니 내게 물으셨다.


"얘, 차 안 긁혔니?"


그때의 기억과 친구들과 나눈 이 대화가 오버랩됐다. 아마 차랑 부딪혀서 멈췄다고 생각하신 모양이었다. 그 차가 비싼 차고, (만약 부딪혔더라고 해도) 그 차 수리비가 넘어진 사람의 병원비보다 비쌀 수도 있지만, 창문 내려서 하는 말이 고작 넘어진 '사람'보다 '내 물건'의 생채기를 걱정하는 말을 내뱉는 세상이 정말 좋은 세상, 우리가 유지시키고 보존해야 할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후자의 이야기에 나오는 어른이 '보통의 어른'이고, 먼젓번 이야기의 어른이 '멋진 어른'이라면 우리는 그때 그 대화를 통해 '멋진 어른'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셈이었다. 멋진 어른이란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해야 멋진 어른이 될 수 있을지. 더 '행복한 사람'이 많은 세상을 만들어가려면 무엇을, 또 어떻게 해 나가야 하는지.



수학 문제를 풀다 막힐 때면 친구들이 이런 소리를 한다. '나중에 커서 써먹지도 않을 거 왜 가르쳐서 사람 힘들게 해요." (이 말이 선생님 앞에서 해도 되는 말인지에 대한 문제와는 별개로) 사실 나도 굳이 실생활에서 쓸 일이 얼마나 많이 있을까 싶을 때가 종종 있다. 하지만 우리가 수학을 배우는 이유는 '실생활에 써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논리적 추론 능력과 논리적 사고 능력을 기르는 데에 있다. 심지어 수학 교과서 맨 첫 페이지에 그렇게 적혀있다.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는 단지 '시험 잘 보고 좋은 학교에 입학해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는 과거의 아픔을 배워서 나중엔 그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함이고, 국어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필요한 소통의 다양한 방법을 배우고, 글의 문맥을 파악하고 이해하는데 필요한 학문이다. 음악과 미술은 개개인의 정서발달과 안정에 도움을 주고, 기술가정은 살아가면서 알아야 할 기술과 가정에 관한 상식들을 배운다. 어느 하나 사람의 발달 과정에 필요하지 않은 학문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나는 배울 수 있어서 좋다.


다만 그런 '지식 전수'에만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 막 경험하고 있는 학생으로서,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학교 밖의 것만이 좋다고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꼭 학교 안에서만 배울 수 있는 건 아니다. 적어도 학교 밖에서도 좋은 공부를 충분히 할 수 있다. 지혜도 지식이 있어야 한다지만, 지식만 있고 지혜는 없는 사람들을 숱하게 보아오지 않았나. 학교에서는 생각하는 법.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하지만 재촉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더 빠른 길'로 가려하지 '더 옳은 길'로 가려하지 않을 테니까. 조바심을 내게 하면 안 된다. 좋은 과정으로 좋은 결과를 내는 경험을 해 보아야 한다. 조바심에 못 이겨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쓴소리 하지 않고, 서로의 특성을 파악해서 서로에게 알맞은 일을 하는 것. 어른 되어서 '빨리빨리' 살아갈 거, 청소년기에는 좀 천천히 살아갈 수 있게.


지식의 전달은. 그리고 지혜의 전수는 꼭 학교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온 세상이 다 학교가 될 수 있다. 근데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왜 '멋진 어른이 되는 법' 같은 중요한 이야기를 일과 속에서가 아니라 하교 후에나 나눌 수 있을까. 


'통일이 필요하다.'라고 체감하는 청소년이 급감하고 있다고 한다. 실제 독서 교육 종합시스템에 올라오는 통일 관련 토론에는 '통일을 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하는 청소년이 많다. 청소년들은 전쟁의 아픔. 생이별의 쓰라림을 모른다. 문화재가 파괴되는 것도, 자연유산이 훼손될 수 있다는 것도 간과한 채 '어차피 전쟁하면 우리가 이긴다.'는 말을 내뱉곤 한다.

내가 생각한 '전쟁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한강이 아름답고, 강둑에서 타는 자전거 바람이 상쾌하기 때문이다.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작년 자전거 여행을 가면서 우리나라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깨달았다. 이런 아름다운 자연유산을 갖고 있으면서 맨날 유럽만 부러워하는 건 너무 안타까운 현실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이 모든 게 황폐해진다는 생각에. 다시는 이런 강바람을 못 느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문득 소름이 끼쳤다.

내가 생각한 '통일을 해야 하는 이유'는 금강산에 자전거 타고 가보고 싶어서다. 문경새재 자전거길이 너무 힘들었는데도, 올라가니 그 경치가 이루 말로 할 수 없었다. 그냥 산도 이런데, 아름답다고 정평이 나 있는 금강산은 어떨까.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의 산과 강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다. 바람이 이렇게 싱그러운지 까먹었었고, 내리쬐는 햇볕도 따가웠지만 행복했고, 땀방울이 온몸을 타고 흘렀지만 친구들과 함께 달리니 짜증이 나지 않았다. 실컷 달리고 에어컨이 틀어진 방에서 쉰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도 깨달았다. 함께한다는 게 이렇게 신나는 일인지. 길가에 자라난 풀과 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미처 알지 못했었다. 전쟁이라는 건 이 모든 걸 파괴시킨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고, 함께한다면 더 즐거울 수 있겠구나 싶었다.


다만 이렇게 느끼는 부분은 개개인이 다 다를 수 있다. '너네도 경험해 봐.' 하면서 힘없는 애를 무작정 자전거 태워서 부산까지 보낸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내 관심사가 무엇인지,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은 무엇인지 스스로 찾고, '통일이 된다면?'으로 연결시켜야 한다. 내가 돈에 관심이 많고 경제가 잘 됐으면 좋겠다면 분단비용보다 통일비용이 더 싸다는 계산을 통해 통일을 이야기할 수도 있고, 인도주의와 인권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북한에서 제대로 인간 대우를 받지 못하는 북한 주민들이 자유로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하기 위해 통일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 결과로 모두가 통일을 바라게 되지는 않을지라도, '냄비근성'을 벗어나 본인만의 가치관, 통일관을 확립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런 '좋은 경험'을 한 자전거 여행을, 내 돈. 내 시간 들여서 갔다 왔다. 학교에 현장체험학습 신청을 하고, 부모님께 허락받고. 그동안 모아뒀던 돈을 털어서 갔다. 부담이 없을 수 없다. 학생 개개인이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나라에서는 장려하고 또 지원해줘야 한다. 

그런데 사실 장려나 지원만으로는 어려운 현실이다. 학원이 있고, 시험이 있고, 과제가 있다. '의무교육'이니까.


의무교육은 목표를 설정해 놓고 '더 나은 결과'를 도출해내기 위해서 구성원들끼리 끊임없이 경쟁하게 만드는 구조여서는 안 된다. 이미 사회가 그렇게 움직이고 있으니까. '우수한 자만 살아남는' 공간이어서는 안 된다. 마치 잘 먹기 대회를 하는 것 마냥, 남들보다 한 줄. 한 자 더 외우려고 일 분 일 초를 아껴가며 공부하는 건 옳지 않다. 적어도 의무교육의 교육과정에서만큼은 그래서는 안 된다. 공부를 경쟁시킨다는 건 개개인의 지적 수준을 깊게 하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깊은 지식보다 개괄적인 지식만 늘어나게 되고, '몰라도 대충 아는 척'하며 넘어가게 된다. 내가 스스로 공식을 만들어내는 방법은 모르면서, 남들이 만들어 놓은 공식만 달달 외워서 문제를 푼다.


아무렇지도 않게 소수자를 비하하는 말을 하고, 감탄사의 성격으로 욕을 한다. 대화를 나눌 땐 본인 이야기에 매몰되어 타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슨 일을 할 때 '좋은 게 좋은 거'로 생각한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선 안 되는데, 학교에선 공부만 시킬 뿐 무엇이 왜 문제인지 가르치지 않는다. 아니 가르치지는 않더라도, 스스로 토론하고 개선해나가기 위한 시간조차 주지 않는다. 어쩌면, '공부'라면 모든 게 허용이 되는 분위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시험기간이니까 성격이 날카로워질 수 있어. 수험생이니까 네가 좀 이해해라 이런 말들로. 어쩌면, 우리는 '공부'라는 것 때문에 잘못된 학생들의 문화를 개선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 우리는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조차 없는 건 아닐까.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도록. 이 말은 학교 현장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모두가 빨리빨리를 외쳐 댈 때, 학교만큼은 학생에게 '천천히'라고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결과만 좋은' 결과를 만들지 말고, 과정에 있어서도 옳은. '결과까지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게 해야 한다. 올바른 일을 하는 경험을 선사해주어야 한다. 지금은 너무 빨리 생각하고 공부하는 나머지, 정작 중요한 것들은 다 빼먹는다. 건설을 의뢰한 시행사가 투자자와의 계약(이나 기타 등등)을 위해 시공사를 후려치면 후려칠수록 원청과 재하청 업체는 죽어나가는 것처럼, '단가 후려치기'를 통해 노동자가 아닌 사업주만을 배 불리기 위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 것처럼, 이미 우리 사회는 '옳은 과정'보다는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데 열중하고 있다.

다들 빨리빨리를 외쳐 댈 때, 천천히 하라고 말해주는 곳. 옳은 방법으로 옳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게 하는 곳. (사진: Unsplash)

하지만 좋은 결과만 있는 사회는 결코 옳은 사회라고 말할 수 없다. '옳은 과정이 수반된 좋은 결과'가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며, '과정은 옳았으나 결과가 좋지 못한' 경우 결과를 좋게 만들기 위한 노력을 펼칠 수 있다. 다만 '결과만 좋은' 경우 다시 '옳은 과정'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이미 결과가 좋으니까. 옳은 과정. 옳은 방법의 결여는 결국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다.

그래서 적어도 학교에서만큼은, 옳은 과정으로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게 해야 한다.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라, 다 같이 잘 살려면, 서로의 개성으로 서로의 단점을 어떻게 보완하며 살 수 있을지 그 경험을 학교에서 해야 한다. 다양한 경험을 해볼 수 있고, 또 실패할 기회를 주는 것. 다시 일어설 기회를 주는 것 또한 학교의 역할이자 의무다. 가치관이 정립되는 청소년기, 그런 경험을 통해 '옳은 과정'으로 성장하는 사회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갈 수 있을 것이다.


1년은 365일이고 계절은 4계절이다. 보통 대부분의 주기가 1년 단위로 맞춰져 있다. 그 이유 때문에 (안 그래도 방학이 짧은데) '학생들에게 더 많은 시간을 주자'며 그저 출석일수를 늘리는 일은 오히려 학생들에게 부담이 된다. 출석일수를 늘리지 않고 어떻게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삶과 다양한 경험을 선사할 수 있을까.

영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보면 각 분야에 관련된 지식은 '거의 박사' 정도 되지만, 정작 초등학교 공부는 하지 않아 초등학생인 청년이 등장한다. 그걸 잘못되었다 말할 수 있을까? '이걸 하다 보니 이거에 관심이 생겨서' 더 알아볼 수도 있고, '그러다 보니 끝까지 가서' 거의 박사 학위를 딸 수준까지 이르러도 좋지 않을까.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는 끝까지 노력해서 성취감을 맛볼 수 있게 도와주는 학교 제도가 필요하다. 또 그 과정에서 지식이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학교를 다시 다니거나 도서관에 가거나 학원에 다니는 그런 제도. 플라톤은 "기본 과목은 어릴 적부터 가르쳐야 하지만 강요해서는 안 된다. 자유인은 자식 획득에 있어서도 자유인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강제에 못 이겨 습득한 지식은 오래 기억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강요하지 마라. 오히려 초등 교육은 일종의 오락이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어린이의 자연적 소질을 알아내는 데 더욱 유리할 것."이라고 했다. 우리가 자유인으로 남으려면, 또다시 독재 정권이 출현하지 않도록 저지하려면, 숙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되기 위해서 우리는 자유인이어야 한다. 자유 없이 공부만 주야장천 하고 자유인으로 성장할 수 없다. 우리는 지식인이기 전에 자유인이어야 한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주어야 할 건 '자유'다. (필요하긴 하지만) 교복이나 핸드폰 같은 규제의 완화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그보다, 걱정 없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자유. 해야 할 일의 굴레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자존감을 높일 자유. 친구들이랑 언제든 훌쩍 여행을 떠날 자유. 친한 친구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에 참석 수 있는 자유. 시험기간에 늦은 시간까지 앉아서 교과서만 들여다보기보다 책에 온전히 푹 빠져서 볼 자유. 감상문 쓸 걱정 하거나 학습지를 채울 걱정 없이 영화를 볼 자유. 세상의 불합리와 불평등이 왜 지속되고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탐구해볼 자유. 국회 청문회에서 다뤄지는 세상 일을 보고 본인만의 생각을 만들어나갈 자유. 그런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내가, 개인이 다양한 경험을 하고 그게 (스펙이 되는 게 아니라) 나를 만들고 가꿔줘서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나가는 과정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그게 교육이어야 한다.

혹자는 '이 모든 걸 1년 이내에 할 수 없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굳이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이렇게 정해놓을 필요가 있을까? 전 세계가 공통적으로 정해놓은 것도 아니고, 어떤 심리학적 근거나 교육학적 근거도 잘 모르겠다. 너무나 이상하리만큼 '꼭' 1년 주기로 돌아가야 하고, 모두가 그걸 따른다. 만약 각자의 개성과 꿈을 실현하기 위해 1, 2년 여행을 다니거나 공부에 매진하거나 세상을 경험하는 일 등이 자연스럽게 이뤄질 때, 학년 구분은 말 그대로 배우는 내용의 차이뿐이 된다. 학년이 다양한 나이 때로 구성되고, 자신의 개성을 실현하고 탐구하는 과정이 존중받는다면 저학년을 함부로 무시하는 학교의 부당한 문화도 어느새 사라지게 되지 않을까.


학생들(뿐만 아니라 선생님들도 평가받지만)은 학교에서 평가받는다. 출석일수로 성실성을, 성적으로 지식수준을, 생활기록부로 다양한 생활 속의 모습이 기록되고 평가된다. 평가는 평가받는 사람을 구속하고, 자유를 억제한다. 자유가 억제된 사람은 보상을 바라게 되기 마련이다. 보상심리는 이렇게 작용한다. 학교에선 위계질서로, 사회에서는 직업의 귀천으로.

우리는 지금, 정말 돈보다 사람이 귀하다 단언할 수 있을까?


학원은 지식 전수를 위한 곳이다. 학교는 그런 곳인가? 학원이란 학교의 연장선인가? 아니다. 학교는 지식 전수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학원은 학교의 기능 중 ‘지식 전수’를 보완하는 기관이다. 개개인의 학습부족이나 공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대안적 기관’인 셈이다. 학원을 필수로 여겨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학원을 다녀야만 하는 현실’은 변화해야 한다.

학교가 지식 전수의 기능만 강조되면, 학교보다 학원의 기능이 더 확대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게 되면 교과서보다 참고서가, 학교 교사보다 학원 교사와 과외 교사가 더 중요한 직업이 된다. 결국 학교에서는 공부 외의 또다른 본연의 기능인 '전인교육'을 할 수 없게 된다. 학원은 말 그대로 '지식 전수'만을 위한 기관인데 학교는 단순히 그런 기능만을 하는 공간은 아니니까.

‘학원을 다녀야만 하는 현실’은 모순된다. 학원은 대안적 기관이기에, ‘선택적’이어야 한다. 학원뿐만 아니라 자율학습 또한 마찬가지다. 지식 전수는 ‘하고자 하는 학생’에게 욕구를 충족시켜주거나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수준’의 학생에게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을 수준으로만 해 주면 된다. 그 이상은, 본인의 의지에 따라야 한다.

사교육에 지출하는 돈이 연 20조 원을 넘는다는 글을 읽었다. 이건 좀 이상한 현상이다. 우리 사회가 그 정도로 평균 이하의 지식수준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닌데, 다들 공부 욕구가 엄청 올라 있는 것도 아닌데 사교육비가 20조 인 건 학원이 본래 목적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학원'을 만든 건 학교와 교육 제도다.


'학원을 다녀야만 하는 현실'을 만들어낸 고교 서열화는 반드시 철폐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제도의 변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굳이 바꾸지 말고, 교육제도를 여러 개로 만들어도 좋지 않을까. 다른 말로 하면 ‘대안교육의 공교육화’라고도 할 수 있겠다. 경쟁이 필요한 사람도, 하고 싶은 학생도 있을 수 있으나, ‘그 교육만이 유일한 교육 방법’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 원하는 사람은 원하는 교육을 받고 평가 방식도 스스로 정할 수 있어야 한다.

교육의 다원화는 밀의 <자유론>에도 명시되어 있다. 획일화된 교육은 자유롭지 못한, 노예를 생산할 뿐이다. 개개인이 모여 사회를 이루기에, 뛰어난 엘리트 한 명이 구성원을 이끌기보다 각자가 지닌 개성이 서로의 단점을 상호 보완하며 작용할 때 사회는 더 나은 사회로 성장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교육의 다원화가 필요하다. '특성화고등학교'나 '특수목적고등학교'를 말하는 게 아니라, 교육과정의 편성에 있어 하나의 일률적인 규칙만이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

교육이 다원화가 되면 입시문화가 상대적으로 약해질 수밖에 없다. 획일화된 교육제도는 ‘평등한 입시’를 할 수 있게 하는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획일화된 교육제도 그 자체가 입시 위주의 문화를 지속시키는 데에 일조하고 있다.

꼭 지적 수준만이 아니라 개인의 가치관과 특성에 따라 진학을 결정하게 된다면, 즉 고교 서열화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좋은 대학에 많이 보내는 학교’만이 ‘좋은 교육’을 한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그 결과 내 신념을 굽혀서라도 '공부 잘하는' 학교에 진학하기보다 내 가치관과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학교에 진학할 수 있다.

결국 ‘더 행복한 미래’를 위해 현재 불행한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학생들의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게 된다. ‘좋은 대학에 많이 보내는 학교’가 아닌 내가 관심 있는 분야의 학교에 진학하면 공부를 왜 하는지 모르겠다는 학생도, 그래서 불행한 학생도 줄어들 것이다.

앞으로 시행될 고교학점제를 뿐만 아니라 중학교에도 학점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좋은 제도라고 생각한다. 학생에게 '시간을 충분히 주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고, 단순히 조기졸업만을 위한 제도로만 여겨질 게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할 수 있는. 그럴 수 있는, 그러기 위한 제도로 자리매김하면 좋겠다.



학교 공간이 변화되어도, —쉼의 공간이 늘어나고, 개성을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공간 확대— ‘시간이 없다’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다. 없는 것보다 있는 게 좋지만, ‘효율성’과 ‘합리성’보다는 ‘친화성’에 초점을 맞춘 설계가 필요하며 그 공간을 충분히 향유할 수 있도록 시스템 또한 개선되어야 한다.

교육 공간의 변화는 교육의 변화로 나아가는 시발점이어야 한다. 그저 ‘공간의 변화’만으로 생각하고 설계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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