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막. 제주의 그라운드, 1루. ep5.
차례.
프롤로그.
서울의 외야석
- 원아웃
- 투아웃
제주의 그라운드
- 1루
- 2루
- 3루
다시, 웃기는 외야석
에필로그, 홈.
카페에 다녀온 후 미선의 행동이 더욱 신경 쓰였다. 우 실장이 알던 여자가 아니었다. 여기선 생기가 넘쳤다. 무엇이 저 여자를 저렇게 바꿨을지 궁금했다.
자세히 지켜보니 미선은 정기적으로 집을 비웠다. 이틀에 한번 정도 차를 타고 어딘가로 갔다 몇 시간 후에 돌아오곤 했다. 돌아올 땐 더욱 기분이 좋아 보였다.
바람이구나. 우 실장은 확인했다.
역시 바깥사람을 잊지 못하니 어쩌니 해도 바람이다. 중년에게 활력은 그것뿐이다.
미선이 괘씸했다. 질투는 아니었다. 질투라기보다는 네가 감히, 라는 기분이었다. 미선이 바람을 피운다는 건 상상도 못 했다. 집에서 살림이나 하는 여편네를 누가 좋아하겠는가. 평소 반에서 심부름이나 하던 녀석에게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미행을 하기로 했다. 꼬투리를 잡아야겠다. 바람난 놈도 궁금했다. 대체 어떤 얼간이기에 저런 여자와 바람이 난 건지.
그런데 막상 현장을 덮치면? 그다음엔? 거기까지 생각하니 좀 애매해졌다. 지금 상황에선 남편도 아닌데. 잠시 고민을 했지만 일단 현장을 급습하기로 했다. 그다음 일은 이후에 고민하기로 했다. 정 안되면 애들을 팔면 될 것 같았다. 이보시오, 주인장. 애들은 어쩌려고 이러시오. 정도의 대사를 치면 될 것이다.
미행을 하려면 이동 수단이 필요했다. 요리조리 운전을 하는 차를 미행하려면 기동력이 중요했다. 마침 마당에 있는 한별의 스쿠터가 눈에 띄었다. 짙은 핑크색이라서 좀 걸렸지만 아무래도 자동차보다는 기동력이 좋을 것 같았다.
한별에게 빌려달라고 부탁하니 “왜요? 타고 싶어요? 그럼 타세요. 대신 기름 값은 셀프예요.”라며 쿨하게 허락했다.
디데이가 다가왔다. 핑크색 오토바이에 올라 커다란 별이 그려진 핑크색 헬멧을 들고 미선의 차가 움직이길 기다렸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최근 며칠 동안 스쿠터 주행 연습을 했지만 스쿠터 운전은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다. 더군다나 미행을 하다 보면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예전에 봤던 첩보 영화가 생각났다.
멀리서 시동 거는 소리가 들리더니 미선의 차가 미끄러져 나갔다. 말이 뛰어가는 심벌이 새겨진 회색 자동차, 오늘의 목표다. 괜히 긴장됐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핑크색 헬멧을 썼다. 그리고 시동을 걸었다. 부르릉. 엔진 소리가 났다. 오늘따라 그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거리를 두고 천천히 따라갔다.
당연한 말이지만 미행은 난생처음이다. 영화에서 본 정보를 조합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따라가는 티를 내지 않으려 했다. 다행히 차도에 차가 없어서 멀찍이 떨어져 따라갈 수 있었다.
미선은 점점 외진 곳으로 들어갔다. 주변에 그나마 있던 차도 뜨문뜨문해졌다. 역시 외도는 엄습한 것이리라. 우 실장의 손에도 땀이 났다. 나이 먹고 는 건 땀밖에 없구나. 우 실장은 손잡이를 당기며 생각했다.
차는 점점 좁은 길로 들어서더니 갑자기 오른쪽으로 틀었다. 우 실장도 따라서 급하게 방향을 바꿨다.
점점 문명과 멀어지는 느낌이다. 야외 데이트인가. 조심성이 남다른 커플이다.
산길을 지나니 탁 트임 녹색 그라운드가 보였다.
그라운드?
그곳엔 열댓 명의 사람들이 공을 주고받고 있었다. 흰색 공이 그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야구 경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 앞에서 미선의 차가 멈췄다.
그라운드에선 막 야구 경기가 시작됐다. 하지만 우 실장의 눈엔 미선만 보였다. 미선은 손을 흔들며 덕아웃으로 들어갔다.
오호라, 저기 있는 남자 중 한 놈이랑 바람이 난 것이군. 비로소 이해가 됐다.
원래 미선은 열렬한 야구팬이었다. 남들이 다 양준혁을 좋아할 때 같은 팀 무명 포수인 김흥식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냥 듬직하잖아.”
언젠가 우 실장의 물음에 그렇게 대답했다.
제주 출신인 미선은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서울로 전학을 왔다. 서울 이모 집에서 지냈다고 했다. 타지 생활은 고독했다. 혼자 외롭게 생활을 하던 미선이 어느 날 우연히 동대문야구장에 갔다. 친구를 따라간 야구장에서 운명이 바뀌었다.
“처음 야구장에 들어가서 그라운드를 봤을 때, 너무 익숙했어. 꼭 제주도 같았거든. 푸르게 뻗은 넓은 들판. 거기에 말 대신 하얀 옷을 입은 까까머리 선수들이 있는 건 달랐지만.”
미선은 그렇게 야구팬이 돼버렸다. 수업도 꽤 빼먹었다고 했다. 그리고 어느 날 운명처럼 우 실장을 만났다.
벚꽃이 막 피어나던 계절이었다. 사람들은 거리를 걸으며 활짝 피어나는 벚꽃처럼 자신의 미래도 화창할 것이라 믿었다. 거리엔 은은한 설렘을 품은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누군가는 연애에, 누군가는 우정에, 누군가는 이상에 미래를 걸었다. 좋은 계절이었다.
마침 봄을 맞아 선거가 펼쳐지던 때이기도 했다. 거리엔 시끄러운 스피커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기호 1번, 기호 2번, 서로 목소리를 높여서 외쳤다.
우 실장은 그러거나 말거나 빠르게 거리를 지나갔다. 머리엔 야구로 성공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거리의 지나친 활력도 부담스러웠다. 자신이 있으면 안 될 곳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때 누군가 우 실장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아직 학생이세요?”
미선과의 첫 만남이었다. 우 실장은 미선을 보면서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학생인데. 그래도 투표는 해야죠?”
미선이 우 실장에게 눈을 찡긋하며 속삭였다. 속삭이는 미선에게서 봄날의 향기가 났다.
미선은 우 실장과 같은 고등학교 3학년이라고 했다. 사회의 변화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그리고 열렬한 야구팬이었다.
이후 홀린 듯 미선을 따라다녔다. 생전 처음 정치 현장에 나가서 팸플릿을 나눠주기도 했다. 운동하는 짬짬이 시간을 냈다.
“야구랑 똑같아. 아무리 지고 있어도 게임을 포기하면 안 된다는 점. 언젠가 홈런 한 방으로 세상이 바뀔지도 모르잖아.”
언젠가 미선이 말했다. 우 실장은 애매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알 것 같기도 하고, 전혀 모를 것 같기도 한 말이었다.
하지만 막상 미선은 우 실장에게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어딘가에 홀린 듯 항상 먼 곳을 바라봤다. 애가 탔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냥 멀리서 바라보는 게 전부였다.
미선은 언제나 가장 앞줄에 서 있었다. 우 실장은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봤다. 뜨거운 미선이 빛나 보였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미선의 마음엔 빈자리가 없었다. 눈동자는 항상 먼 곳을 향해 있었다. 저 눈에 내가 들어갈 자리는 없겠구나. 어렴풋이 생각했다. 그래, 성공하자. 그리고 다시 찾아가자. 스스로 당당해진 다음 그녀에게 프로포즈하자. 그렇게 결심했다.
이후 야구에 전념했다. 프로에도 입단했다. 비록 하위 라운드였지만 프로 선수가 됐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수소문 끝에 미선을 찾아갔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달라져 있었다. 그녀 안의 뜨거움은 식고 차가움만 남아 있었다. 항상 먼 곳을 바라보던 눈동자는 텅 비어있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미선은 대학을 휴학하고 어떤 시민단체 같은 곳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곳에서 본인이 꿈꾸던 이상이 펼쳐질 거라 믿었다고 했다. 하지만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세 달도 안 돼 나왔다고 했다.
“그냥.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더라고. 그래서…”
언젠가 미선이 그렇게 말해준 적이 있었다. 대답하는 미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무슨 일이 있는지 묻진 않았다. 대신 그녀의 모습을 보고 짐작을 했다. 그녀는 텅 빈 화초가 되어 있었다.
미선을 따라다녔다. 자신 있었다. 미래는 온통 파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렇게 결혼까지 하게 됐다. 프로포즈는 결국 생략했다. 반지를 내밀지도 않았다. 나중에 프로에서 성공하면 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식을 올렸다.
결혼 후에도 미선의 뜨거움이 남아있던 게 하나 있었다. 바로 야구였다. 미선은 결혼 후에도 야구장을 찾아왔다. 집에선 항상 야구 중계를 틀어놓았다.
하지만 우 실장이 프로에서 방출을 당한 후에 상황이 달라졌다. 우 실장은 야구라는 게 꼴도 보기 싫었다. 집에서 야구 중계를 보는 미선의 모습도 한심해 보였다. 남편은 밖에서 전쟁을 하고 있는데 한가하게 중계나 보다니… 언젠가 둘이 큰 소리를 내면서 싸움을 했다. 이후 미선은 우 실장이 있을 땐 야구를 보지 않았다.
그런데 엄마의 영향을 받았는지 한철이 야구를 한답시고 폼을 잡았다. 아무리 너그럽게 봐주려고 해도 아들의 한계가 분명하게 보였다. 그래서 반대했다. 야구를 하다가 실패한 건 우 실장 혼자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철은 포기하지 않았다. 한철의 뒤에 미선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한철이 야구에 청춘을 낭비하는 것도 다 미선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야구장에 서 있는 미선을 본 것이다.
우 실장은 스쿠터 뒤에 몸을 숨기고 미선을 계속 관찰했다. 그런데 바람이 너무 심했다. 시합은 막 5회를 마친 상황이었다.
“바람이 너무 심하네요.”
누군가 소리쳤다.
“그럼 그냥 비긴 걸로 하고 끝낼까요?”
“그래, 그러시죠.”
그라운드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서로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아무도 승부에는 상관하지 않는지 싱글벙글 이었다.
그때 우 실장의 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첫 번째 경기가 끝났습니다.”
우 실장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속삭일 만큼 근처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 이거구나. 이렇게 그라운드에서 9번의 경기가 끝나면 나는 홈으로 돌아가는 건가 보군. 우 실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