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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걷는 시간, 그 흔적을 찾는 공간

03. 이별의 순간 – 아름다움이 남긴 흔적

by 이서

- mini prolog -

사라진 순간조차 시간이 지나면 아름다움으로 굳어진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때로 가장 깊은 상처로 남는다.


금요일의 문은 여전히 삐걱이며 나를 맞았다.

그 소리는 낡은 문이 아니라, 내 안의 균열이 내는 소리였다.

서점의 공기는 숨 막히게 짙었고, 그 속엔 오래된 그녀의 향기가 달게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내가 가장 아프게 사랑했던 시간이 잠들어 있었다.

에일은 그곳에 있었다. 언제나처럼.

그의 얼굴에는 감정이 없었지만, 눈빛 어딘가에는 내 욕망의 그림자가 섞여 있었다.


“오늘 밤도, 시간의 문을 여시겠죠. 고통을 기억이라 부르며.”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나의 몸이, 나의 의식이 그 장면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장은 스스로 한 권의 책을 밀어냈다.

[이별의 순간, 아름다움이 남긴 흔적]

손끝이 책의 모서리에 닿자마자 멈춰 있던 시간이 천천히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눈을 뜨자 전철의 진동이 느껴졌다.

그녀가 내게 기대어 잠들던 그날 이후, 모든 시간이 흘러, 지금 이 순간에 닿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공기 속을 가르며 도착했다.


“나… 조만간 결혼해.”


그 말이 나에게 닿는 순간, 세상이 숨을 멈춘 듯했다.

전철의 흔들림도, 사람들의 웅성거림도, 내 심장의 박동마저 멈춰 있었다.

오직 그녀만이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이제껏 그 장면을 수없이 반복해서 봐 왔다.

그 말, 그 표정, 그 어색하고 차가운 미소.

나는 목적도 의미도 없이, 다만 그 순간의 모든 것을 되짚기 위해 서점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 감정의 고통이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대한 탐닉일 뿐이다.


“좋은 사람이야.”


그녀가 덧붙였다.


‘… 그래요. 좋은 사람이겠죠.’


그 말의 어색함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그 순간의 공기를 되짚었다.

그 거짓이 주는 현실감, 그 절망이 만들어내는 잔인한 아름다움.

나는 잠시 그 안에서 숨을 멈췄다.

이내 세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전철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녀는 변함없이 열린 문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여전히 말 한마디,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 역시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때의 나처럼, 지금도 나는 그 순간에 갇혀 있다.

닫히는 문 사이로 스며드는 겨울의 차가운 바람, 그리고 항상 남겨져 있는 나.


“이 장면을 몇 번이나 반복했죠?”


언제 어디에서 생겨났는지 알 수 없는 빛 속을 천천히 걸어 나오며 에일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모르겠어요. 그냥… 이 순간만은 언제나 깊게 남아 있어요.”

“이건 살아 있는 게 아닙니다. 당신이 붙잡고 있는 건, 이미 끝난 기억의 잔상일 뿐이에요.”


그의 목소리는 차갑지만, 어딘가 낯익었다.

그녀가 떠나던 날의 그 온도와도 같았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매번 이 장면을 찾아오죠. 사랑이 아니라, 탐닉에 가까운 반복으로.”

“이게 없으면, 난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에일이 잠시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 속에, 나는 잠시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가 했던 말투, 그 눈의 결이 스쳐 지나갔다.


“당신은…”

“지금 하려고 하는 말은 다음에 하는 게 좋겠어요.”


그의 목소리는 낮고 깊게 울렸다.


“다음 금요일이면, 당신도 알게 될 거예요.”


그의 손이 내 어깨를 또다시 스쳤다.

그 손끝엔 더 이상 경고의 냉기는 없었다.

오히려, 오래되고 익숙한 기억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서점의 불빛이 흐려졌다.

그리고 책의 표지가 천천히 닫혔다.

나는 손끝에 남은 그 감각을 느끼며,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이 장면, 이 고통, 이 아름다움.

그것은 끝나지 않는 계절처럼 내 안에 머물러 있었다.

내 다음 금요일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나는 또다시 이 장면을 열 것이고, 그녀는 또다시 나를 지나쳐 갈 것이다.

서점 어딘가에서, 책의 모서리가 아주 천천히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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