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운전면허증은 장롱에 고이 모셔져 있다. 운전면허를 취득한 지 오래지만 쓸 일이 없었다. 한마디로 장롱면허다.
20대 중반, 처음 면허를 따고 두어 번 동네 가까운 곳에 차를 몰고 나간 적이 있긴 했지만 그때마다 문제가 생겼다. 당시 우리집은 낮은 언덕쯤에 위치해 있었는데, 차를 몰고 비탈길을 오르는 게 쉽지 않았다. 액셀을 밟아도 차가 자꾸만 뒤로 미끄러지는 느낌이었다. 평평한 도로에서의 운전은 비교적 순조로웠지만 그야말로 생초보였던 나에게 비탈길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경사면 위에서 앞으로 나아가지도, 그렇다고 다시 뒤로 가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멈춰 있었다. '차'라는 거대한 물체가 나를 압도하는 기분이었다. 버리고 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뒤에서 다른 차가 따라 올라온다면 민폐가 따로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
또 한 번은 접촉사고였다. 집 근처 도로에서 유턴을 하고 달려가는데 뒤에서 하얀색 소나타가 나를 계속 따라왔다. 도로가 떠나갈 듯 요란하게 클랙슨을 눌러대더니 급기야 내 옆으로 다가와 차를 세우라며 소리쳤다. 눈 화장이 진한 40대 초반 정도의 여성 운전자였다. 영문을 모른 채 갓길에 차를 세우는데 심장이 쿵쾅거렸다. 무슨 일이지? 내가 뭘 잘못했나?
잔뜩 화가 난 운전자가 나를 뺑소니범으로 몰았다. 내가 유턴을 하며 횡단보도 옆에 정차되어 있던 그녀의 차를 스치고 그냥 가버렸다는 거였다. 아닌 게 아니라 정차되어 있던 소나타 때문에 차의 회전 반경이 나오지 않아 신호가 바뀌기 전에 가까스로 유턴을 했던 터였다. 오로지 유턴에만 초집중한 상태였어서 정차되어 있던 차를 스친 걸 알아차리지 못했나 보다. 아무리 생초보 운전자라지만 그래도 설마, 차를 스쳤다면 꽤 가까이 붙었다는 건데, 그걸 전혀 몰랐을까. 나도 나를 믿을 수 없었다. 당황스러웠다. 어쨌거나 그녀의 차 왼쪽 면에 살짝 스크래치가 생겨 있었다. 사과를 하는 게 먼저였다.
'죄송하다, 고의로 뺑소니를 친 건 아니었다, 초보 운전자라 미숙하고 상황 파악이 안 됐다'며 정중히 사과를 했지만 소나타 운전자는 막무가내였다. 당장이라도 뺑소니범으로 경찰에 나를 신고할 태세였다. 겁을 잔뜩 먹은 나는 이번에도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집 근처였던지라 엄마가 급히 나와 어찌어찌 해결이 되었다.
"이제 운전하지 마!"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엄마가 꺼낸 첫 말이었다. 운전을 하겠다고 두 번이나 차를 몰고 나갔다가 두 번 다 사고를 치고 엄마에게 뒷수습을 요청했으니 엄마의 반응은 정당했다. 뒤이어 걱정이 뒤섞인 잔소리가 이어졌다.
"너는 아무리 봐도 운전할 체질이 아니야. 그냥 운전 잘하는 남자 만나서 편안하게 조수석에 타고 다녀."
아마도 이 말은 걱정이 뒤섞인 잔소리가 아니라, 잔소리를 가장한 엄마의 걱정이었을 테다. 엄마의 눈에 야무지고 대범한 구석이라곤 전혀 없는 딸이 험한 도로에서 운전을 하기엔 못 미덥고 불안해 보였겠지. 이해한다.
사실 엄마의 말과 상관없이 나 역시도 운전이 두려웠다. 수많은 차들이 쌩쌩 오가는 도로 위가 마치 살벌한 사회생활의 축소판 같았다. 서바이벌 경기가 펼쳐지는 경기장처럼 느껴졌다. 조금이라도 주춤대고 머뭇거리고 어리바리하면 가차 없이 내몰릴 것 같았다. 위험부담을 감수하기 싫었고, 무엇보다 운전을 하며 겪어야 하는 모든 것들이 피곤해졌다. 운전의 득보다는 실이 많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엄마까지 운전을 하지 말라고 하니 얼마나 다행인가. 엄마 핑계를 대며 이제 운전 따윈 쳐다도 안 보겠어, 다짐 아닌 다짐을 했다.
그날 이후, 엄마의 말을 주문처럼 여긴 나는 다시는 운전대를 잡지 않았다. 연애를 하면서 엄마 말대로 운전 잘하는 남자 만나 편안하게 조수석에 타고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운전'을 생각할 때면 마음 한 구석이 늘 불편했다. 뭔가 무능해지는 느낌, 무서워서 헐레벌떡 도망쳤다는 자괴감, 마치 패배자가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운전이 늘 끝내지 못한 숙제처럼 남아있었다.
두려워서 도저히 못 할 것 같지만 꼭 해내고 싶은 것 중에 운전 말고 물구나무서기가 있었다. 물구나무서기는 요가에서 '시르사아사나'라고 불리는 동작이다. 요가를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시르사아사나는 꿈도 꾸지 못했다. 뒤로 넘어져 목뼈가 부러지면 어쩌나 두려웠고, 당연히 내가 할 수 없는 동작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마음은 멋지게 시르사아사나를 해내고 싶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연습 끝에 지금은 시르사아사나를 잘할 수 있게 되었고 거꾸로 서서 하는 변형 동작들에도 도전하고 있다.
운전도 시르사아사나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두렵더라도 그냥 하면 되지 않을까. 두려움을 극복하고 시르사아사나를 성공하기까지의 과정을 떠올려보기로 한다.
처음에는 벽에 대고 한 다리를 차 올려 거꾸로 서 있는 것부터 시작했다. 다음에는 두 다리를 들어 올리는 것을 연습했다. 물론 쉽지 않았지만 그냥 했다. 그냥 하니 어느 순간 조금씩 나아지는 게 보였다. 조금 자신이 생기자 벽에서 물러나 해보기로 했다. 뒤에 벽이 없다고 생각하니 뒤로 넘어갈까 두려워 다리를 바닥에서 뗄 수가 없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그동안 연습한 건 다 어디로 갔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뒤로 넘어가도 괜찮다고, 별일 없을 거라고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뒤로 넘어갈 것을 대비해 척추를 동그랗게 말아 뒤구르는 연습도 미리 해보았다. 막상 실제로 한 번 뒤로 넘어가 보니 생각만큼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뒤로 넘어가는 것이 놀이처럼 재미있기까지 했다. 이렇게 1년여의 시간이 흘러 물구나무서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두려움에 맞서는 최고의 방법은 두려운 그것을 '그냥 하기'다. 단순 무식하게 그냥 해버리는 것이다. 물론 그냥 한다고 해서 단번에 성공하지는 않는다. 당연히 능숙해지는 과정이 필요하다. 처음의 두려움을 떨쳐내고 어떻게든 시작할 수 있다면 조금씩 시야가 열리고 노하우가 습득되면서 두려움도 점차 사라져 간다.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마음의 공간이 넓어지고, 상황을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난다. 그때 비로소 두려움의 자리가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다시 채워진다.
하지만 시작하지 않으면 두려움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상상 속에서 두려움의 크기는 더 커져갈 테고, 어느새 두려움은 나보다 더 큰 존재가 되어 평생 내 삶을 따라다닐 것이다. 한 번뿐인 인생임을 되새긴다면 두려움에 굴복한 채 소중한 날들을 흘려보낸다는 것이 화가 난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진짜도 아니고 스스로 만들어낸 가짜 장애물에 불과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다면 더 억울하지 않을까.
어느 시점부터 내 인생은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도전과 응전의 역사가 되었다. 장르로 따지면 내 안의 두려움과 정면으로 맞짱 뜨는, 짠내 나는 좌충우돌 성장기라고 할까. 이제 다음 도전은 미루고 또 미뤄놓았던 운전이다. 이번 여름에는 더 이상 핑계 대지 않고 운전연수를 받아야겠다. 일단 시작하고 나면 어떻게든 되겠지. 시르사아사나를 배울 때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두려움을 하나씩 극복해가면서 자존감도 점점 높아졌다. '하면 된다'는 말을 입으로만 외칠 땐 없는 자신감을 꾸역꾸역 욱여넣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몸으로 직접 체득한 후에 나오는 '하면 된다'는 말은 엄연한 팩트이기에 힘이 실린다.
물론 시르사아사나를 연습하며 어깨와 목에 통증을 느끼기도 하고 뒤구르기를 하기도 했던 것처럼 운전을 하면서도 자잘한 골칫거리들이 생겨날 것을 안다. 이제는 그 골칫거리들을 피곤하다 여기지 않고 능숙해져 가는 과정으로 생각하려 한다. 문제 상황을 재빨리 파악하고 능숙하게 해결하는 법도 운전을 하며 배울 수 있지 않을까.
그동안 엄마와 여행을 갈 때면 늘 운전은 엄마 몫이었다. 펜션이나 음식점 사장님들이 장성한 딸이 아니라 나이 드신 엄마가 운전대에 앉는 걸 보며 왜 운전을 엄마가 하냐며 묻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렸었다. 이제 엄마도 일흔이 넘으셨고 언제까지 운전을 하실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엄마와 좀 더 편하게 오랜 시간을 함께 하려면 이제 내가 운전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엄마,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운전은 내가 할 테니 엄마는 편안하게 조수석에 앉으면 돼요."
도로 위를 멋지게 주행하는 베스트 드라이버가 되는 날을 꿈꾼다. 운전면허증은 장롱에 넣어두는 물건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