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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ewon Kong Dec 27. 2022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클래식쟁이가 클래식을 바라보는 어떤 시각

클래식을 듣는 것. 그것은 이 시대에 제법 흔하면서도 제법 희소한 취미다. 좋아하는 사람은 꽤 되지만, 길을 가다 흔히 마주칠 정도는 아니다. 그렇다고 주변에 단 한 명도 없어, 라고 말할 정도도 아니니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은 것 같다.


클래식을, 음악을 듣는 방법은 다양하고 듣는 이유도 다양하다. 클래식을 좋아한다는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평론이 있지만, 평론가여야 클래식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두에게 나름의 평론이 있겠고,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평론을 특히나 좋아하지만 말이다.


국밥 한 그릇

몇년 전, 아직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을 공부하던 무렵, 어떤 건물 지하에 있는 식당가를 자주 간 적이 있다. 사무실로 가득한 건물 지하로 내려가면, 푸드코트처럼 넓은 공간에 여러 음식점들이 즐비했다. 나는 국밥을 좋아해서 순대국밥집에 자주 갔는데, 줄 서서 기다리면 항상 주인 아저씨가 틀어놓은 클래식 라디오 방송이 들렸다. 아저씨는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 음악은 클래식 뿐이라고 했다. 그래서 가요를 듣다 클래식을 듣는다고 했다. 싸구려 오디오에, FM 라디오로 듣는 음악이었지만, 순대국 뚝배기를 데우며 클래식을 듣는 것은 참으로 멋지다고 나는 생각했다.


포근한 뒷 자리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근무를 시작한 첫해에, 나는 유난히 야근이 잦았다. 다행히 내가 다녔던 회사는 야근을 하면 택시비를 지원해줬고, 나는 종종 택시를 타고 집에 갔다. 그날도 어김없이 야근을 하고 택시를 타고 집에 가던 차였다. 택시를 탔는데 성악가들의 음악소리가 들렸다. 기사님은 오페라를 듣고 있었다.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이었다. 기사님은 집에 가는 내내 나에게 한 마디도 걸지 않으셨고, 나도 음악에 깊이 빠져들어 편안히 집으로 갈 수 있었다. 


야근을 하고 집으로 가는 길은 보통 험난하고, 피곤해서 헛구역질이 나고 어지러운데 부드러운 음악을 들으며 앉아 있으니 피로가 조금이나마 풀리는 듯 했다. 밤 시간 대에 고단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하는 승객들을 위한 기사님의 배려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기사님의 그런 배려에서 고상한 취미기 묻어나 속으로 존경했다.


유서깊은 교회에서 듣는 오르간 연주

얼마 전, 살면서 처음으로 유럽에 갔다. 해외여행을 자주 다닌 편이었는데, 유럽은 항상 여행에 있어 너무 클리셰한 장소 같았고, 그래서 인도를 두 번, 쿠바와 멕시코를 한 번 갈 동안 유럽은 한 번도 가지 않았었다. 


나이가 들 만큼 들고 유럽에 갔을 때, 우연히 드레스덴의 성모 교회를 갔다. 유서깊은 교회인 드레스덴 성모 교회는 2차대전 때 처칠의 폭격을 맞고 무너졌던 것을 다시 복원한 것이다. 동독시절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그대로 보관했다가 다시 재건했다고 한다.


드레스덴 성모 교회에서는 매일 낮 12시에 예배가 열리는데, 예배에 참석하면 높은 교회의 한켠을 가득 메운 오르간에서 들려오는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물론 나도 오르간 연주를 듣기 위해 예배에 참석했다. 비록 독일어는 한 마디도 몰랐고, 기독교인도 아니었지만 설교 중간 중간에 가미되는 오르간 연주는 각별했다. 대리석으로 된 교회가 쩌렁쩌렁하게 울렸고, 대리석이 울리면 내 가슴도 함께 울렸다. 심장에 스미듯 소리는 웅장했다. 나는 우스갯 소리처럼, 내가 독일에서 태어났다면 기독교 신자가 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매일 교회에 가면 오르간 연주를 들었을 테니 말이다.


음악의 정수, 베토벤 <합창>

12월 말이 되면, 세계의 정상급 교향악단들은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 공연을 한다. 마치 연례 행사처럼, 이 공연은 매년 연말 비슷한 시기에 열린다. 세상에 수많은 클래식 곡들이 있고, 꽤 많은 교향곡이 있지만, 매년 1번씩은 꼭 연주하는 곡은 베토벤의 <합창>이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베토벤의 <합창>은 클래식 애호가들에게는 각별한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연주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자신의 최선으로 이 음악을 마주한다. 그건 일종의 존경이다. 악성. 음악의 성인. 베토벤은 그렇게 불린다. 연주자도 관객도 음악의 성인인 베토벤을 존경하고 경외하는 마음을 담아, 한 음 한 음 꾹 꾹 눌러 담아진 <합창>을 마주하는 것이다.


베토벤은 9번 교향곡 <합창>을 작곡할 때에, 이미 귀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베토벤이 이 세상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자, 비로소 천상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고들 했다. 음악가가 음악을 들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은 마라토너가 뛸 수 없는 것, 사진가가 볼 수 없는 것처럼 괴로울 것이다. 그 온갖 고난과 역경과 괴로움과 좌절을 견딘 베토벤은 <합창>을 남겼다. <합창>은 1악장부터 세상을 요동치게 할 정도의 강인한 에너지로 이끌려가는 음악이고, 환희의 송가가 유명한 4악장에 이르러서는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초월하는 숭고함의 극치까지 나아간다.


이 음악은 음악이되 한 편의 영화이고, 하나의 서사이며, 음악을 이해할수록 그 끝없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어지는 하나의 블랙홀이다. 그리고, 서양 음악사의 ‘완성’과도 같은 이 음악과, 온갖 고난과 좌절을 헤쳐 삶을 살아낸 베토벤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연주자도 관객도 한 음절 한 음절 꾹꾹 정성과 열정을 담아 이 음악을 풀어내는 것이다.


청년 브람스의 좌절과 성장

일설에 따르면, 청년 브람스를 가장 좌절케한 사람이 바로 베토벤이고, 그 곡이 바로 <합창> 교향곡이었다고 한다. 청년 브람스는 베토벤의 장례식에 직접 참석했다. 운구 행렬을 따라간 사람 중에 하나였다. 그는 당연히 <합창> 교향곡도 들었다. <합창>을 들은 브람스는 교향곡을 작곡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교향곡 1번을 작곡하며 그는 끊임없이 좌절했다. 베토벤 <합창>이 인류 음악사를 진보시킨 만큼, 자신의 교향곡이 그것을 퇴보시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 <합창>이라는 너무나도 위대한 저작 앞에서 작아져만 가는 자신 때문에 그는 쉽사리 교향곡을 작곡할 수 없었다.


브람스가 첫 교향곡을 선보이는 데는 무려 20여 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20대에 작곡을 시작한 교향곡 1번은 40대가 되어서야 출판될 수 있었다. 20여 년의 세월동안 그가 했을 마음 고통은 결코 작은 것은 아니었으리라.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은 그의 그런 마음을 담고있는 것 같다. 무겁게 시작하는 1악장을 지나 2악장 말미의 바이올린 솔로는 애처롭기 그지 없다. 마치, 있는 힘껏 쏟아지는 매서운 빗방울을 뚫고 굳게 잠긴 대문 앞에 서 있는 것처럼. 하지만 이 음악도 2악장을 뒤로 3악장에 이르러서는 서서히 힘을 얻기 시작하고 4악장에서 드디어 밝게 피어난다.


나는 음악에 정통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4악장에서 느끼는 의미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것은 일종의 '인간 승리'다.  나는 브람스가 자신의 첫 교향곡에서 숱한 고뇌와 어려움을 뚫고 ‘자신다움’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브람스는 베토벤을 뛰어 넘을 필요가 없다. 브람스는 브람스다. 브람스는 브람스로 위대하고 베토벤은 베토벤으로 위대하다. 나는 나로서 위대하고 당신은 당신으로서 위대하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로서 위대한 것이지, 위대함을 증명하기 위해 누구를 이겨야 하거나 뛰어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위대한 경지는 나 자신을 이기는 것이고, 나 자신을 아는 것이고, 나다움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나는 브람스가 그의 첫 교향곡을 완성시키며 그 경지에 다다랐다고 생각한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클래식은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것은 한 그릇의 순대국밥이면서 따뜻한 뒷자석이고, 웅장한 대리석이면서 하늘 높은 숭고함이고 인간의 승리이다. 하지만, 겁먹을 필요는 없다. 클래식을 즐기는 데에 사실 어떠한 사전 지식도 필요 없고, 어떠한 고급 장비도 필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들어내는 의지이고 음악에 대한 애정이며, 다른 모든 것은 부차적인 것이다.


귀가 들리지 않았던 베토벤조차 음악을 했고, 눈이 보이지 않던 스메타나도 음악을 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작곡가조차 이럴진데, 듣는 사람이야 오죽할까. 다만, 한 가지 당부할 것은 클래식은 쉬운 음악은 아니라는 것이다. 경청하는 자세와 열린 마음이면 그것을 듣는 데 충분하지만, 마음에 충분한 여유가 없다면 쉬이 듣기 어려운 음악일지도 모른다.


세상에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 음악과 나이가 들어도 즐거움이 여전한 음악은 그리 많지 않다. 어렸을 땐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쾌락이 새로웠지만, 나이가 들수록 즐거움은 줄어가는 것 같아 서글픈 요즘. 들으면 들을 수록 더 좋아지고, 더 깊어지는 감동을 선사하는 게 나에게는 클래식인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더 좋아지는 것이 있다는 것은 결코 작지 않은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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