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속 고래는 어디에 있을까?

[고래사냥 1984] 어쩌면 대한민국 최고의 로드무비

by 차감성
영화를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 전문적인 영화 지식을 갖추지 않았을뿐더러, 절대적인 객관성, 기준이라는 것에 회의적입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 모두가 각자의 다른 경험을 가지고 다양한 감성을 가지고 있으니깐요.
저는 영화를 본 사람들이 느낀 여러 감정을 솔직하게 나누는 걸 좋아합니다. 서로의 감성을 나누다 보면, 어느새 제 생각의 폭이 넓어지는 걸 느끼거든요.

[한 컷으로 인생쓰기]는 영화의 전체적인 맥락보다는 인상 깊은 한 장면으로 필자의 자유로운 생각을 풀어내는 지면입니다. 각자의 감상을 존중하며 소통하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019년은 한국영화 100주년입니다. [한 컷으로 인생 쓰기]는 100주년을 맞은 한국영화를 기념하여, 2013년 한국영상자료원의 '한국영화 100선'을 중심으로 시작합니다.
한국영화박물관 도슨트 차감성



고래사냥(1984) - 배창호 감독
<줄거리>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대학생 병태(김수철)는 짝사랑에 실패하고 길거리에서 방황한다. 거리를 떠돌다 흘러 들어간 유치장에서 거렁뱅이 민우(안성기)를 만난다. 병태는 민우에게 고래를 잡기 전까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민우는 우울해 보이는 병태의 기분을 풀기 위해 사창가로 데려갔지만, 그곳에서 병태는 억울한 벙어리 춘자(이미숙)의 사연을 듣게 된다. 병태는 춘자를 춘자의 고향, 우도에 데려다 주기로 다짐하고 병태, 민우, 춘자는 먼 길을 찾아 떠난다. 험난한 모험 길에 병태는 갖은 고생을 하지만, 우도에 가까워질수록 고래가 어디에 있는지 깨달아 간다.



안성기 배우의 익살스러운 거지 연기와 김수철 배우(가수이자 이 영화의 음악 감독)의 날 것 그대로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던 영화였습니다. 옛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를 찾으러 떠나는 로드무비의 특징들은, 지금 봐도 재미있게 잘 그려냈죠. 제가 본 근래의 한국 영화들 중 이렇게 명확한 로드 무비를 본 적이 있을까 싶습니다.



물론 이 시대를 살지 않았던 저인지라, 특유의 대사, 구도, 줄거리 등은 다소 오글거렸지만 그건 어린 제가 왈가왈부할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포함하더라도 이 영화는 앞서 말했듯이 세 주인공의 여정을 다이나믹하게 그려내며 이야기를 끝까지 끌고 나가는 힘이 있습니다. 지금의 제가 봐도 재미있게 본 것처럼 말이죠.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한 청년이지만 과거의 방황하던 한 청년, 병태의 불안함과 공허함에 많은 공감을 했습니다. 80년대 특유의 어둡고 우울한 사회상을 담고 있기에 병태의 모습이 더욱 불안해 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모든 청년이 어른이 되기 직전 느끼는 막연한 불안감, 공허함은 지금이나 그 때나 모두 마찬가지 아닐까요?

지금도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심지어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조차 모르고 있는 경우도 많죠. 해외여행을 떠나고, 취미를 갖고, 친구를 만나 이야기도 해보지만 딱딱하고 정형화된 사회의 틀 속에 돌아오면 말랑말랑 하던 꿈은 다시금 건조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난 병태의 여정은 어딘지 모르게 답답했던 마음속에 작은 불씨를 불러일으킵니다. 영화 속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비현실적인 여정일 수도 있지만, 우린 언제나 비현실 속 희망을 현실로 가져오며 진화해 나갔으니깐요.


차감성의 한 컷


제가 꼽은 [고래사냥]의 한 컷은 바로 이 장면입니다. 모든 여정이 끝난 후, 고래를 잡았냐는 민우의 말에 병태는 이렇게 답합니다.


고랜 내 마음속에 있었어요.
내가 저 애하고 결혼하겠다는 건 위선이었어요.
누구를 위한다는 생각 자체도 거짓이었구요.
아까 신나게 얻어맞을 때 그걸 깨달았어요.
내가 그 애한테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너무나도 당연한 결말인가요? 정작 힘들게 목적지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가치는 알고 보니 내 안에 있었다 라는 결말. 하지만 저는 이 당연한 결말이야말로, 공허함이 가득한 망망대해 속 청춘들에게 꼭 필요한 장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가슴속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정신없이 바쁘게 살기도 하고, 일상을 벗어나 특별한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가만히 앉아 내 안의 울림에는 귀 기울인 적이 없었죠. 내가 정말 무엇을 원하는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내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일인지 고민할 시간이 없었던 겁니다.


'라이프 오브 파이'의 한 장면


우리 안의 고래는 처음에는 아주 작은 울림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 같습니다. 숨을 죽이고 귀 기울여야 그 위치를 알고 고래를 찾아 떠날 수 있죠. 하지만 어느 순간, 혹은 몇몇 사건을 계기로 그 울림은 점점 커지게 될 겁니다. 차분히, 그리고 꾸준히 나침반을 들고 고래를 찾다 보면 어느샌가 우리 눈 앞에 나만의 고래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여러분의 고래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그리고 그 고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나요?




신나게 웃으며 영화를 보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눈 앞에 보이는 '춘자'를 두고 다시금 먼 길을 떠나는 병태의 뒷모습은 고래를 찾았다는 희망과 더불어, 앞으로의 여정도 쉽지 않을 거라는 불안감도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런 병태가 걱정되지는 않습니다. 고래만 잡은 것이 아닌, 고래 잡는 방법을 터득한 병태는 더 이상 망망대해에서 방황하지 않을 테니깐요.



영화를 본 여러분의 솔직한 생각이 궁금합니다.

[한 컷으로 인생쓰기], 오늘은 [고래사냥 1984]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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