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겪어보지 못한 인생을 이해하는 방법

와해된, 몸 - 크리스티나 크로스비

by 차미박


설 명절 선물로 들어온 샴푸 린스 바디워시 위에 큼지막하게 이름을 써두었다. 아침에 할머니가 말하길 눈이 나빠 뭐가 샴푸고 린스인지를 잘 구분하지 못하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샴푸 린스가 새로운 통으로 바뀔 때마다 몇 번이고 할머니는 욕실로 나를 부르곤 무엇이 샴푸고 린스인지를 물어보곤 했다. 평소 같았으면 그렇게 말씀하시는 할머니의 말을 그냥 흘려보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 막 크리스티나 크로스비의 <와해된 몸>을 다 읽었기에 귀찮은 마음을 옆으로 미루고 한 글자씩 당연한 단어들을 플라스틱 통 위에 썼다.



크리스티나 크로스비의 <와해된, 몸>은 유능한 대학 교수였던 저자가 50살에 자전거 사고로 전신마비가 되어 겪은 일과 생각들을 담은 책이다.


최근 변영주 작가의 <창작수업>이라는 책에서 아래와 같은 문장을 읽었다.


문학은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으로 나를 밀어 넣는 역할을 합니다. 내가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그런 일을 겪은 사람을 보는 거지요. 저는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보다 박완서 선생의 '휘청거리는 오후」가 훨씬 훌륭하다고 말하고 다닙니다. 그 소설을 보면 제 선배나 어머니 세대에 대해 알 것만 같거든요. 그게 문학, 소설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시는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가진 문학만이 가진 힘이라고 생각합니 다. 미처 겪어보진 못한 상황 속으로 나를 집어넣는 힘요. -68


변영주 감독은 저 책을 보고는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을 책이라는 통로로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때마침 도서관 신간코너에서 이 책을 발견하면서 읽게 되었다.


전신마비라는 경험을 해 본사람은 소수일 것이다. 또는 주위에 전신마비를 겪은 사람이 있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전신마비를 겪은 사람의 생활이 어떤지 감정이 어떤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책이라는 통로로 우리는 그 삶을 간접 경험해 볼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 크리스티나가 사고당시나 치료를 받으면서 겪는 과정을 묘사할 때면 입에서 신물이 올라오고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로 몰입된다.


나는 갈증에 시달렸다. 입 속의 아치형 고정 장치와 얼굴의 핀 때문에 얼굴과 목구멍의 근육이 위축되고 있었다. 얼굴뼈는 여전히 불안정했고 많은 뼛조각이 아직 핀과 함께 붙지 않은 상태였다. 요구르트처럼 걸쭉한 액체는 감당할 수 있었지만 물은 삼키지 못했다. -44


또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불편함과 소외도 그녀의 눈을 통해 보니 얼마나 이 세상이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가혹한지 또한 알게 됐다.


요즘 사회나 정치를 보면 ‘이해’라는 단어는 사라진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다. 적극적으로 그 상황에 자신을 대입해 보거나 최대한 그와 같은 본인의 경험을 떠올려내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그런 노력을 기울이기에 우리는 너무 바쁘고 마음에 여유가 없다.


몇 년 전 서울에 볼일이 있어 가게 되었을 때, 서울 지하철 역을 점거하고 장애인들이 시위를 벌인적이 있었다. 때문에 지하철 운행이 중단되어 불편을 겪었던 적이 있는데 그때 많은 사람들의 반응은 꽤나 부정적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의 일행이었던 분도 '시위를 하는 건 괜찮다고요. 하지만 왜 일반인들이 불편을 겪어야 하냐고요. 이러니까 오히려 장애인들에 대해 반감이 생기는 거 아니에요?'라고 내 동의를 구하듯 말했다. 그때 나는 겉으로 그냥 엷은 미소만 띠었지만 속으로는 생각했다. '과연 저기 저 변방, 아무런 피해도 끼치지 않는 곳에서 장애인들이 조용하게 시위를 한다면, 어느 누가 관심을 줄까? 거들떠보기나 할까? 알기나 할까?' 우리가 그 순간에 겪는 잠깐의 불편함을 우리는 참지 못했지만, 장애인들은 매일매일, 매 순간,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들어가는 순간까지 그런 불편함을 안고 살아간다.



장애는 만들어지는 것이다. 건축 법규와 교육 정책, 작동되지 않는 지하철 엘리베이터와 도착하지 않는 학교 버스에 의해, 그리고 모든 소외, 착취, 비하 행위, 장애가 있는 자들의 완전한 접근과 평등을 부정하는 적극적인 배제에 의해. -20



와해된, 몸을 읽으면 묘한 두려움이 생기기도 한다. '나도 언제든 그런 상황이 생길 수 있다'라는 생각이 내 몸을 엄습한다. 크리스티나는 우리와 다른 어떤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대학교수로 똑똑하고 운동을 좋아해서 아주아주 건강한 그런 성공한 여성이었다. 비장애인 가운데서도 특별히 특출 난 사람이었다. 하지만 자전거 바퀴에 걸린 그 나뭇가지 하나로 아주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그리고 이건 우리에게 아주 먼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약한 것들에 대한 이해는 그런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 내가 할머니에게 큰 글자로 샴푸와 린스를 적어준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나도 결국 나이가 들 거고 눈이 흐려질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야 말로 이해의 첫걸음이다. 그것만 있다면 우리는 서로를 좀 더 보듬어주고 이해하고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공간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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