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랏빛으로 물들어 가는 저녁놀을 보며 수변공원 산책로를 걷다가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눈물겹게 아름다운 서쪽 하늘 사진을 먼저 찍어 보내고 난 뒤였다.
전화를 받자마자 아버지는 웃으며 말했다.
“저녁놀 참 멋지다. 좋은 데 사네, 우리 딸.”
엄마가 하늘나라에 간 뒤에 언제나 내 전화를 반겨줄 사람은 아버지뿐이었다.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흘러나왔다.
1년 전 교 통사고로 다리를 절게 된 여든한 살의 아버지가 혼자 밥상을 차리는 모습이 그려졌다.
함께 살아야 하나, 아니면 서로의 거리를 지키며 안부를 나누어야 하나 갈등했지만, 자주 연락하고 마음을 보태는 것으로 만족하는 중이었다.
싱글 4년 차가 된 아버지는 싱글 새내기인 딸에게 든든한 선배였다. 쓸쓸하고 헛헛할 때 아버지와 통화할 수 있어 얼마나 감사한지, 뭉클해져서 평소에 하지 않던 소리를 했다.
“아빠, 나 어떻게 살아야 돼?”
몸이 멀쩡한 내가 늙고 다리가 불편한 아버지에게 푸념을 늘어놓은 것인데, 아버지는 힘찬 목소리로 답했다.
“우리 창창, 슬기로운 솔로 생활을 해 보자고.”
그날 이후 아버지의 말은 내 삶의 작은 등불이 되었다.
아버지는 더 이상 엄마가 그립다고 울고만 있는 분이 아니고, 당신의 삶을 건강하게 꾸려가려고 이렇게 저렇게 노력하고 있었다.
엄마랑 살 때 돌봄을 지극히 받았던 아버지는 혼자가 되니 집안일을 할 줄 아는 게 없어 무척 허둥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당신만의 방식으로 집안을 정돈하고 빨래하며 밥상을 차렸다.
만들 수 있는 반찬 가짓수도 늘어났다.
시중에서 파는 사골국물에 표고버섯을 듬성듬성 썰어 넣어 끓인 된장국, 탱글탱글한 도토리 묵도 직접 만들었다고 사진을 찍어 보내기도 했다. 담백한 조개젓무침을 만들어 나이 오십이 넘은 딸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엄마에게 ‘친구 좀 만나러 나가라’고 성화를 듣던 아버지의 인간관계가 넓어진 것도 격변이었다. 친구들과 매일 걸으며 안부를 나누고, 노인대학과 성경공부 모임에도 열심히 다녔다.
냉장고를 채워 주고 반찬을 나누어 주는 이웃들 얘기에선,
“내 평판이 좋은 편이야.”
라며 해맑은 웃음을 짓기도 했다.
밝아진 아버지를 보며 50년 함께 산 배우자를 잃은 건 슬픈 일이지만, 누구의 간섭도 없는 싱글의 삶은 자기의 본모습을 찾아 나가는 기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버지를 곁에서 지켜보며, 거센 파도를 정면으로 맞아내는 방파제처럼 삶의 무게를 피하지 않고 감당하다 보면 언젠가는 파도가 잔잔해지는 날이 온다는 것을 배웠다. 그것이 아버지가 내게 남겨준 가장 큰 돌봄이었다.
나 역시 혼자의 삶에 적응해야 했다. 삼십 년을 함께한 친구이자 남편이 ‘여생을 혼자 살고 싶다’라며 떠난 자리에, 나는 빈틈을 혼자로 채워야 했다.
공부방 운영을 하며 세금 신고하는 법을 몰라 미루다 세금 폭탄을 맞았고, 이사 등 큰일을 처리할 때 성급한 결정으로 금전적 손해를 입기도 했다.
그 과정을 겪으며 나는 더 이상 배우자 뒤에 숨었던 구경꾼이 아니라 ‘내 삶의 당사자’가 되어갔다.
혼자 사는 삶은 자유가 차고 넘쳤지만, 방종으로 생활이 엉망이 되기도 했다.
과음 후 어둠 속에서 자전거를 타다 다친 적도 있었고, 술 마신 밤 목걸이를 잃어버린 적도 있었다.
몇 날 며칠 집을 치우지 않아서 방바닥에 늘어진 전깃줄에 걸려 상처를 입은 적도 있었다. 그렇게 절제하지 못하는 내가 싫어서 화를 내며 울음을 터뜨린 날, 내가 나에게 너무 불친절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 디딜 틈 없는 공간에 나를 던져두듯 생활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내 공간은 곧 나인 만큼, 나를 위해 공간을 최대한 단출하고 깔끔하게 유지하기 시작했다.
실패도 경험이라 여기며 하나씩 고쳐가는 과정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강한 방식을 찾았다.
어차피 인생은 완성형이 아니라 진행형 아닌가.
사랑받고, 사랑하고 싶어서 싱글 3년차에는 남자를 소개받은 적도 있다.
두 번의 소개팅을 겪은 뒤 내가 원한 것은 남사친(남자사람친구) 같은 존재였음을 깨달았다.
전 배우자를 그리워하면서 나는 왜 그렇게 연애할 상대를 찾는 것일까, 내 마음이 궁금했다.
스스로 물었지만, 답을 찾지 못할 때, 심리상담을 통해 알게 되었다.
내 안의 허기는 ‘타인에게서 받을 돌봄’을 찾고 있었다는 걸.
전 배우자가 그리워서라기보다 그 사람처럼 내게 ‘잘한다, 응원한다’라며 격려해 줄 이를 찾고 있었다는 것을.
열 번의 상담 중 마지막 시간에 상담사가 해 준 말이 오래 남아 있다.
“타인에게서 찾으면 끝이 없겠지요. 이젠 자신을 믿고 좀 아껴 주세요.”
내 마음은 나를 아껴달라고 아우성치는데 나는 바깥에서 답을 찾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오랫동안 외면하고 미워한 나에게 미안해서 한참을 울었다.
싱글이 된 뒤 모든 게 암담했지만, 길목마다 좋은 사람들이 있었다.
폐업자 교육에서 만난 직업상담사, 직업상담사가 '이혼 후 고충상담'을 받아보라고 연결해 준 심리상담사, 내 아픔에만 매몰될 뻔한 시선을 돌려준 세월호 공부 모임과 여성단체의 친구들.
혼자가 되자 내 곁에 찾아와 준 사람들이 더욱 귀했다.
가까운 이들과는 더 깊이 연결되었다. 병든 아버지를 돌봐 드리며 우리 오빠와 동생이 얼마나 좋은 사람들인지 새삼 알게 되었고, 오랜 친구들과 함께 매일글쓰기를 하며 서로가 몰랐던 내면을 이해하고 토닥이게 되었다.
그들의 손길은 내 삶의 울타리가 되었고, 혼자이지만 함께 살아갈 방법을 배워갔다.
주말이나 밤, 어쩔 수 없이 혼자인 날이 있다. 그럴 땐 외롭다고 울지 않고 그 시간을 충만하게 보내는 나만의 기술을 쌓기로 했다.
도서관에 책을 반납할 일을 늦추었다가 해안가로 돌아 산책 겸 걷는다거나, 율동적인 근력운동 영상을 켜놓고 신나게 몸을 흔든다거나 리듬에 맞춰 스트레칭을 한다. 그것들은 기분 좋게 잠들 수 있고, 내일을 기대해도 좋겠다는 마음이 들게 해 주는 작은 습관이 되었다.
싱글 선배인 아버지에게서 ‘슬기로운 솔로 생활’의 가능성을 보았고, 가족을 넘어 다양한 사람들과 서로를 돌보는 법을 배워온 지난 5년.
삶이 힘들 때일수록 오히려 더 좋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는 신호라는 걸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