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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cm Apr 22. 2020

<B급 기자 막전막후> 국정농단과 호스트바

특종기

 “고영태? 내가 호스트바 면접 봤던 얘야”


2년차 새내기 기자였다. 주말마다 촛불집회가 열렸다. 취재라는 명목으로 광화문을 나왔지만, 집회 참가자에 가까웠다. 수 십만이 넘는 촛불이 심장을 뜨겁게 했다. 그 기운을 받아 국정농단 사건에 뛰어들었다.


2016년 10월.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대한민국이 뒤집어졌다. 최순실이 박근혜 정부의 국정에 개입했다는 것과 미르재단·K스포츠재단의 설립하며, 대기업들에게 수백억 원의 뇌물을 기부금 명목으로 받은 사실이 언론을 통해 폭로됐다.


당시 모든 기자가 몸이 달아올랐다. 현직 대통령과 비선실세 그리고 대기업까지 엮인 초대형 게이트다. 기자들에게 이런 대목은 또 없다. 수많은 기자가 최순실 게이트를 쑤시고 다녔다. 나도 그런 기자 중 하나였다. <한겨레>, JTBC같은 특종은 바라지도 않았다. 썩은 준치라도 건져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국정농단 초중반 고영태라는 이름이 등장했다. 고영태에 대해 알려진 게 거의 없었다. 전직 펜싱 국가대표였고, 최순실이 설립한 페이퍼컴퍼니 더블루K의 상무이사였다는 게 전부였다.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박근혜와 문고리 3인방 같은 최고 권력자마저 최순실을 선생님이라고 칭하는데, 고영태만 유일하게 최순실의 이름을 불렀다. 나이조차 뛰어넘어 말을 놓는 사이였을 정도로 친했다. 두 사람은 최씨가 자주 출입했던 강남의 한 유흥업소에서 만난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기사를 보고, 두 남녀의  관계가 궁금했다. 어쩌다 둘은 유흥업소에서 만났을까. 이 때 ‘고영태가 호스트바 출신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에이 설마. 혹시나 싶은 마음에 과거 강남에서 유흥업소를 크게 했던 취재원에게 전화를 걸어 툭 던져봤다.  

 

“대표님 혹시 고영태라는 사람 알아요? 최순실 측근인데, 호스트바 쪽에 일했던 사람 같은데.”

“고영태? 잘 모르는데? 사진 있어?”


내 취재원은 최순실 게이트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잘 모르는 눈치였다. 고영태의 사진은 언론에 공개된 상태였다. 전화를 끊고 고영태 사진이 나온 기사를 링크해 취재원에게 보냈다. 1분도 안 돼 전화가 왔다.


“야 얘가 최순실이랑 관련 있어? 얘 이름이 고영태였어? 민우로만 알고 있었는데. 내가 예전에 호스트바 츄라이(면접)했던 얘야.”


놀라웠다. 생각 없이 물어봤는데, 그가 진짜 호스트바 출신이었다는 거다. 그것도 내 취재원이 직접 면접까지 봤다고 한다. 고영태는 고민우라는 가명으로 활동했다는 디테일도 있었다. 실제로 고영태는 더블루k 상무이사이던 시절 고민우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바로 취재원을 만나러 청담동에 달려갔다. 크로스 체크를 하고 싶었다. 고영태 아는 사람을 소개해달라고 취재원을 졸랐다. 취재원은 고영태를 오랫동안 알고 있던 한 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스피커 폰을 켰다.


“너 민우(고영태 가명) 기사 나온 거 봤냐. 걔 대박이더라.”

“나도 기사 보고 깜짝 놀랐어. 가라오케 호떡(호스트바를 지칭하는 은어)이 정치계 거물이 됐네.”


충격적이었다. 비선실세의 최측근 인사가 호스트바였고, 최순실게이트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이 다니. 막장드라마에 나올 법한 스토리다. 크로스체크는 됐지만, 이 정도 내용으로는 기사를 쓸 수 없었다. 고영태 과거에 대한 디테일이 더 있어야 한다. 강남에 살고 있는 모든 취재원에 전화를 돌렸다. 한 이틀을 청담동과 압구정, 논현동을 해 집고 다니며, 고영태 과거 지인들을 찾아다녔다.


호스트바에 대해 공부도 했다. 인터넷을 뒤지며, 호스트바의 업계를 답습했다. 집에서는 호스트바 세계를 그린 영화 ‘비스티 보이즈’를 봤다. 망한 영화인 줄 알았는데, 상당히 흥미로웠다.


강남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또 다른 취재원이 과거 고영태와 친하게 지냈다고 증언했다. 이 취재원은 고영태가 강남 유흥업계에서 잘나간 호스트바였으며, 그와 술도 여러 번 마셨다고 말했다. 골프도 몇 번 같이 쳤다고 한 것 같다. 당시 고영태는 의류 잡화 장사를 했는데, 내 취재원이 고영태한테 가방까지 샀다. 나에게 직접 그 가방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심지어 그는 내 앞에서 고영태와 직접 통화까지 했다. 취재원도 몇 년 만에 통화하는 거라고 하더라.

 <일요시사>가 보도했던 고영태 호스트바 지면 기사 .

또 마침 고영태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취재원도 있었다. 고영태의 학창 시절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취재원에 따르면 고영태는 전라남도 담양 출신으로 부모님 중 한 분이 5.18 때 돌아가셔서, 국립묘지에 안장돼 있다고 했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고 하더라.


이 정도면 기사를 써도 될법한데, 그가 마지막으로 언제까지 호스트바 생활을 했는지 알고 싶었다. 최초로 사실 관계를 확인해줬던, 전직 유흥업소 대표에게 부탁했다. 덕분에 고영태와 호스트바를 뛰었던 인사를 취재할 수 있었다. 고영태가 마지막으로 호스트바로 일했던 시기와 술집까지 알아냈다. 덤으로 국정농단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인 뮤직비디오 감독 차은택을 최순실에게 소개해준 게 고영태였다는 것도 알았다.


이날 취재를 마치고 회사에 돌아왔다. 화요일 저녁 여덟 시였다. 모두 퇴근해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감은 수요일부터지만, 나는 하루빨리 기사를 쓰고 싶었다. 금방 다른 언론사에서 쓸 것만 같았다. 책상에 앉아 취재한 내용을 영혼까지 끌어모아 컴퓨터 자판에 쏟아냈다. 녹취록을 수도 없이 들으며, 멘트 하나하나 그대로 썼다.


기사를 쓰다 보니 취재하면서 간과했던 것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최순실의 최측근이 호스트바 출신이라는 사실을 '보도할 가치가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을까?’ ‘너무 선정적인 기사가 아닐까?’ 등. 한 개인을 호스트바로 매장하는 게 아닐까 걱정도 들었다.


객관적으로 이 기사를 평가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타사 선배 기자들의 조언을 구했다. 선배들이 부정적으로 평가한다면 기사를 접을 생각도 있었다. 데스크한테는 아직 보고하지 않은 상태였다.


선배들에게 내가 취재했던 과정을 날 것 그대로 설명하며, “이게 기사로 쓸 가치가 있느냐?”라고 물었다. 선배들은 생각보다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선정적이지만, 지금 국면에서 충분히 필요한 기사라고 격려해줬다. 한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이 기사는 너만 쓸 수 있어. 고영태의 과거를 이 정도까지 취재한 기자는 너 밖에 없을 테니깐.”


이 말에 힘을 얻었다. 이날 밤을 새웠다. 기사를 다 쓰고 나니, 새벽 5시였다. 회의실에 있는 라꾸라꾸 침대를 펴고 눈을 붙였다. 아침 7시 데스크가 출근하자마자, 취재 내용을 보고했다. 데스크는 파장이 클 것이라고 예상했다. 내 기사를 30분가량 만졌다. 10월26일 오전 11시 “최순실 측근 고영태는 강남 호빠 출신” 기사가 출고됐다. <일요시사> 기사 일부를 옮겨본다.


“고영태는 강남 가라오케 선수였다”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실세로 지목되고 있는 최순실씨의 최측근인 고영태씨. 최씨와 고씨가 막역한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들 관계를 둘러싼 뒷말이 무성했다. 그런데 <일요시사> 취재 결과 고씨가 전직 호빠(호스트바) 출신인 것으로 단독 확인됐다. 강남 일대의 복수의 유흥업계 관계자와 고씨의 지인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고씨는 8∼9년 전까지 호스트 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중략) 고씨가 가라오케 호스트바 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일요시사>가 단독 확인했다. 복수의 유흥업계 관계자와 고씨의 지인 등에 따르면 8∼9년 전까지 고씨가 호스트 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본지가 취재한 유흥업계 관계자들은 호스트바(정확한 명칭은 가라오케라는 게 업계 설명) 사장, 호스트바에 투자했던 관계자, 전직 호스트바 출신 등이 있다. 이뿐만 아니라 고씨의 지인 등을 취재하며 다각도로 사실 확인을 거쳤다.
고씨는 광주서 출생했으며, 어려서부터 불우한 환경에 자란 것으로 전해진다. 고씨의 고려중학교 한 동창은 “5·18 때 부모님 중 한 분이 돌아가셔서 지금 망월동 묘역에 안장돼 있다”며 “어린 시절 조부모님과 지내며 불우하게 지냈다”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그가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펜싱 사브르 종목서 금메달을 딴 것은 동창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집안 사정은 여전히 여의치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씨의 동창은 “금메달 따서 연금을 일시금으로 수령했다”라고 귀띔했다. 고씨가 호스트 생활을 시작한 것도 이런 어려운 환경에서 연유된 것으로 추정된다.


파장은 상상 이상이었다. 출고 30분 만에 ‘고영태’ ‘호스트바’ ‘호빠’가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에 올랐다. 회사 홈페이지는 다운됐다. 조·중·동 등 메이저 언론을 비롯해 30여개 매체가 내 기사(일요시사)를 인용 보도했다. 창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하더라. 타 언론사도 고영태에 대한 후속 보도를 했다.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서는 고영태와 호스트바 생활을 했던 관계자까지 인터뷰했다.


이주 주말 나는 또 광화문에 나갔다. 지난 주보다 집회에 참석자가 더 많아졌다. 참가자들은 ‘박근혜 하야’ ‘박근혜 탄핵’ ‘박근혜 구속’ 피켓을 들고 열심히 구호를 외쳤다. 수 십 개의 피켓들 중 유독 눈길이 가는 피켓이 있었다. ‘호빠가 국정을 농단했다’ ‘비선실세와 호스트바, 이게 나라냐’


이후 고영태는 최순실 게이트의 키맨으로 부상했다. 국회에도 출석해 ‘사이다 폭로’로 청문회 스타가 됐다. 검찰 수사에 협조해 박근혜-최순실-안종범 등 공범 관계를 드러내는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세관장 인사 청탁 명목으로 뒷돈을 받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 기사는 나에게 가장 아픈 손가락이다. 확실히 좋은 기사는 아니었다. 관음증을 자극한 기사였고, 한 개인의 인생을 호스트바로 매도했다. 최순실 게이트를 최초로 보도했던, TV조선이나 <한겨레>는 고영태가 호스트바 출신이라는 걸 분명히 알았을 거다. 기사로서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 보도하지 않은 거라고 생각한다.  


다시 이때로 돌아간다면, 기자로서 이 보도를 하지 못 할 것 같다. 하지만 이 기사가 나에게 주는 의미는 적지 않다. 상상 이상의 파장을 일으켰고, 더 많은 사람을 광화문으로 나오게 했다. 국정농단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은 기사였다. 이 기사가 좋든 나쁘든, 난 처음으로 희망을 봤다. 나도 기자로서 어떻게든 1인분을 할 수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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