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산이 할머니네 이야기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학교 운동장은 왜 그리 넓었는지, 교문에서 교실까지가 아득하기만 했다. 학교 담장에 자라던 미루나무는 또 왜 그리 높다란지, 바람에 반짝이며 흔들리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났다. 그 넓고 높은 곳 한 가운데 서면 나는 바닷가의 조약돌처럼 한없이 작아졌다. 그랬던 운동장이, 학년이 올라갈수록 어찌된 노릇인지 자꾸만 작아졌다. 어른이 되어 찾아갔을 땐, 어떻게 저 비좁은 곳에서 운동회를 했을까 싶었다.
아이가 산이와 즐겨 놀러가는 곳이 상명대학교 운동장이다. 축구장이 있고, 주변에 농구 코트, 100미터 트랙, 2차선 넓이의 자동차로가 있으니 초등학교 운동장과는 비교할 수 없다. 육십 넘은 내가 보아도 아득한데, 아이 눈에는 어떻게 비칠까. 운동장에 들어설 때마다 궁금했다. 운동장 주변엔 어른 서넛이 손을 맞잡아야 할 정도로 둥치가 큰 미루나무도 있었다. 꽃가루 민원 때문에 잘렸다.
아이는 축구장에서 산이와 달리기 하는 게 신난다. ‘나, 잡아 봐라’는 멜로영화의 남녀 주인공이나 하는 게 아니었다. 아이는 매번 앞장서 달리면서 산이에게 소리쳤다. ‘나 잡아봐라.’ 산이는 군말 없이 그 뒤를 쫓아간다. 아이는 산이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잘 알지만, 산이가 제 옆에서 겅중겅중 뛸 뿐 앞서지 않으리라는 것도 안다.
한여름 해지면 학교 운동장은 그런 아이들과 엄마들의 놀이터가 된다. 세발자전거, 씽씽보드 타는 대여섯 살 아이들, 축구공 차는 고학년 아이들, 모래밭에서 흙장난하는 서너 살 꼬마들~. 엄마가 아이들 부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멀리 남산타워에 불이 들어오고, 북악산 한양성 따라 붉은 조명등이 꿈틀거리며 하늘로 오르고, 바람은 자하문 노루목을 지나 세검정 산마루 상명 운동장으로 밀려온다. 가장 평화로운 시간이다.
그런 학교지만, 나에게는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시고 쓴 기억이 있다. 달걀 자전거를 뒤에서 밀며 할아버지를 도와드릴 때였으니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위로는 지금의 서울예고 근처 구멍가게(만보장)부터 아래로는 상명학교(상명여중고와 여자대학교) 매점까지 구역이 넓었다. 이 가운데 가장 가기 싫은 곳이 바로 상명학교 매점이었다. 매점은 아마 지금의 음악실쯤에 있었을 것이다. 학교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오르막도 문제긴 했다. 워낙 가팔라 학생들은, 3년만 이 학교를 오르내리면 무 다리가 될 거라는 푸념을 입에 달고 다녔다. 그런 곳을 달걀 30판 정도 실은 짐 자전거를 뒤에서 밀며 오르는 일이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싫었던 건 또래 여중생들의 시선 때문이었다. 막 사춘기에 접어든 때였으니, 또래 소녀들에게 남루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거다. 매점까지 올라가는 동안 나는 얼굴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자전거 뒤에서 고개를 처박고 다닌 덕에 내 눈에는 숲에서 뛰어나왔다가 소스라쳐 돌아가는 다람쥐만 들어왔다. “할아버지, 오늘은 다섯 마리 봤어.” 내 말의 뜻을 할아버지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니 수금까지 하라고 나를 학교에 올려보내곤 하셨다.
중학교 1학년 2학기부터 신문을 돌리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지금의 근대화수퍼 옆 신문지국으로 달려갔다. 50~60부를 들고 산동네를 다니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배달소년이 되면서 나는 상명학교 오르내리는 일에서 해방된 것이 기뻤다. 사실 그걸 노리고 배달의 길로 나섰을 것이다. 지국은 만화방도 겸하고 있었으니 나에게 그런 해방구는 없었다.
남대문시장에 달걀 떼러 가는 일도 싫긴 했다. 도매상에서 100판 정도 사서 네 묶음 정도로 나눈 뒤 시내버스에 실어 세검정까지 나르는 일은 할아버지 혼자서는 힘든 일이었다. 특히 힘든 것은 달걀 묶음을 시내버스에 올리는 일이었다. 누군가 도와주지 않고는 차장의 푸념을 바가지로 들어야 했다. 나는 할아버지가 두 무더기를 들고 올라가면 버스 문턱에서 지키고 있다가 하나씩 올려주는 구실을 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간데는 이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당시 시내버스는 승객과 화물을 함께 실어나르는 수단이었다. 기사나 차장으로서는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손님도 많은데 짐까지 부려놓으니,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푸념을 온전히 받아내야 했다. 특히 큰 문제는 시간이 지체되는 것이었다. 짐 손님이 많다보면 기사에겐 생명과도 같은 것이 배차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때문에 차장 언니들은 짐이 많은 손님이 다가오면 재빨리 문을 두 번 두둘겨 차를 떠나도록 했다. 그런데 까까머리 꼬마가 짐을 들고 문턱에서 지켜보면 제아무리 냉정한 차장도 그냥 내빼지는 못했다. 그 언니들에게도 대개는 그만한 동생이 있었다. 내 역할은 그런 차장 언니에게 애처로운 눈으로 하소연하는 것이었다.
딸은 상명학교를 중고교 6년간 다녔다. 내가 중고교 시절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반장 부반장도 하고, 졸업할 땐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제법 큰 상도 받았다. 딸의 동창들은 대부분 초등학교부터 같이 다니던 친구들이어서 지금도 가장 막역하다. 딸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그 옛날 금남의 구역이던 시절, 고개를 처박은 채 달걀 자전거를 뒤에서 밀며 비탈을 오르던 소년이 제 아빠였으리라는 것을.
이제 그 딸의 아이와 함께 학교 운동장을 달린다. 나풀거리는 아이의 단발이 그때 그 소녀들의 머리카락 같다. 주원아, 저기가 매점이었어. 저리로 할아버지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자전거를 뒤에서 밀며 올라갔다. 다람쥐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왔지. 이맘때니까 아마 도토리 주우러 왔을 거야. 난 다람쥐하고만 눈을 맞췄어. 손녀가 듣건 말건, 알건 모르건, 그동안 아이 엄마에게도 또 아내에게도 하지 않았던, 숨겨둔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엊그제 아이 아빠가 파마 한 아이의 사진을 올렸다. 곱슬곱슬해진 머리카락의 얼굴 옆모습에 제 엄마 소싯적 모습이 잔뜩 들어가 있다. 아이구, 벌써 저렇게 컸나? 지난봄 나는 아이와 함께 생강을 심고는 두 달 정도 안달복달했다. 생강은 심은지 60일 가까이 되어서야 겨우 싹 하나씩 냈다. 그동안 나는 거의 매일 볏짚을 들추며 싹이 나왔는 확인했다. 왜 그렇게 더딘지. 손녀가 아기였을 때도 그랬다. 저 놈이 언제 자라서 언제 기고, 언제 걸을까~. 그런데 벌써 운동장을 달린다.
생강은 장마와 함께 무더위가 찾아오자 그야말로 죽순처럼 자랐다. 늦게 나온 싹들이 더 빨리 자랐다. 씨 생강 하나에 줄기가 네댓 개나 나왔으니 생강밭은 조릿대 숲이 됐다. 지금은 생강 줄기가 내 허리춤까지 온다. 돌아보니 눈 깜짝할 사이다. 아이가 자란 것도 생강과 같다. 요즘 아이는 생강과 키재기를 한다. 어쭈 쟤가 언제 저렇게 컸지?
‘나, 잡아봐라.’ 산이 위로 잘 생긴 남자애가 오버랩 된다. 갑자기 머리가 띵하다. 그런 날이 미구에 불현듯 찾아올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