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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병찬 Nov 02. 2020

아이에겐 말 못할 누렁이 이야기

28. 산이 할머니네 이야기


세검정 사람들이라고 돈보다는 놀이, 투기보다는 인문, 개발보다는 보존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요즘 세상에 돈 앞에 장사가 어디 있으며, 투기 수익 앞에서 품격이 어디 있을까. 

세검정 마을은 북한산 줄기로 둘러싸여 있다. 들고 나는 곳이라곤 홍제천 개천이 흘러나가는 오간수문 쪽 한 곳뿐이었다. 나가더라도 4대문 안이 아니라 문화촌이다. 시내로 가려면 자하문고개를 넘는 수밖에 없었다. 항아리처럼 주둥이만 막히면 여지없이 산으로 갇힌 신세다. 어디 그뿐인가. 이곳은 국립공원에 포함돼 있거나 국립공원에 인접해 있어 풍치지구로 묶여 있다. 또 북악산을 사이에 두고 청와대와 붙어 있으니, 곳곳이 군사시설보호구역이다. 개발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시내 가깝지, 숲으로 둘러싸여 있지, 개천 흐르지, 풍광 최고인 이곳을 개발업자들이 그냥 놔둘 리 없다. 빈틈만 발견하면 귀신같은 로비력으로 파헤치고 올렸다. 시작은 절대권력이 이끌고 업자가 뒤처리를 했다. 지금은 보현봉을 중심으로 중앙의 사자봉 줄기와 왼쪽의 형제봉 능선 사이의 산지 6부 능선까지가 대한민국 최정상 갑부의 최고급 호화주택으로 들이차 있다. 국민의 자산인 북한산국립공원 평창동 쪽은 그렇게 갑부들 차지가 됐다.  

1970년대 초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외국인에게 자랑할 전시용 주거지역이 필요했다. 당시는 청계천 주변의 이른바 하꼬방(판자집), 낙산 와우산 등 산마루 달동네가 서울의 중심을 장악하고 스카이라인을 형성할 때였다. 정권은 이른바 개발의 성과와 성장의 결실을 과시하고 싶었지만 자랑할 만한 곳이 없었다. 동부이촌동과 성북동의 이른바 부자 동네가 있긴 하지만 규모나 주변 환경이 옹색했다. 그때 박 대통령의 눈에 들어온 곳이 있었다. 북한산 평창동 쪽 산자락이었다. 자연환경만 보면 미국 로스엔젤레스의 비버리힐즈는 발뒤꿈치도 따라오지 못할 곳이니, 전시용으로 이보다 더 훌륭한 곳은 없었다. 

국립공원에 무슨 주거지냐, 그것도 호화주거지냐는 볼멘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총통에게 딴지를 걸 사람은 없었다. 그의 결정에 따라 산비탈에 ‘산 00번지’ 문패를 달고 살던 이들은 바로 쫓겨나고, 대단위 택지개발이 시작됐다. 한 필지당 300평 이상이나 되었고, 자가용 없이는 접근하기도 힘들었으니, 이미 주인은 정해져 있었다. 6부 능선까지 횡으로 3단 산복도로를 내고, 종으로는 2백~3백여 미터마다 계단을 내고, 각 단마다 궁궐 담보다 높은 축대를 쌓아올려 택지를 조성했다. 이와 함께 북악터널을 뚫어 동서로 통하게 했고, 자하문터널과 구기터널을 뚫어 남북으로 통하게 했다. 그렇게 해놓고 보니 과연 평창동은 한국판 비버리힐즈였다. 재벌 갑부 권세가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이었다. 사방으로 길이 뚫리자 개발업자들이 권력을 등에 업고 나머지 지역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평창동 아랫동네에 중대형 빌라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빌라는 구기동으로 이어졌고, 한 채에 100평 안팎의 호화빌라가 구기동 계곡과 산허리에 들어섰다. 

업자들이 아예 눈도 주지 않았던 근대화슈퍼 일대. 50년 전 그대로다.

이미 오래된 주택이 많았던 신영동 홍지동 쪽은 보상비 등 때문에 개발에서 비켜났다. 상명대와 백사실 아래의 옛 마을이 그대로 남거나 다세대주택으로 얼키설키 얽혀 있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시세도 낮아 이곳은 지금도 서민들의 삶터로 남아 있다.  주민들은 시내 가깝고 살기 좋고 위해시설이 없다보니 웬만하면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는다. 나처럼 아버지와 딸 아들이 초등학교 동문인 경우가 적지 않다. 서울 시내에서 유동인구가 가장 적은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 때쯤 되면 규모가 큰 산허리 택지는 호화빌라, 옛 마을 짜투리 땅엔 연립, 다가구 주택이 빼곡이 들어서, 더 이상 손댈 만한 곳이 없었다. 그런데 김영삼 대통령 시절, 어느 날 갑자기 북악터널 옆에 난데없이 20층 가까운 아파트가 들어섰다. 형제봉 능선이 북악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버금갈 정도의 높이였다. 많은 사람들이 아연했다. 어떻게 저런 빌딩이 들어서지? 개인주택은 층고가 3층으로 제한돼 있고, 집단주택도 5층 이하만 지을 수 있도록 되어 있을 때였다. 당시 주민들은 구기동에 살고 있던, 정권의 최고 실세 김 대통령의 둘째 아들을 주목했다. 탕춘대 터가 있던 동산에 초호화 빌라가 들어선 것도 그때였다. 

비봉능선 끝자락 향로봉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능선이 상명대학교쯤에서 하나는 홍제천 오간수문 건너 인왕산 쪽으로, 다른 하나는 백사실 쪽으로 갈라지는데, 백사실 쪽 줄기가 개천을 건너지 못하고 우뚝 선 곳에 있던 것이 연산군의 탕춘대였다. 탕춘대에 서면 보현봉에서 발원한 북쪽의 비봉 능선, 서쪽의 탕춘대 능선, 동쪽의 형제봉 능선 그리고 남쪽의 북악산 능선, 인왕산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백운봉에서 보현 문수봉으로 흘러내려온 북한산 정기가 한데 모인, 인체로 치면 단전과 같은 북한산 최고의 혈처다.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라도 보존해야 했지만, 업자들은 신통한 재주로 그 터를 사들여 엄청난 이윤을 남겼다. 최초의 빌라 주민 중에는 김영삼 대통령 시절 정무수석 하던 이도 포함돼 있었다.

탕춘대 자리 호화빌라 밑 소공원. 이곳의 가난한 움막은 빌라신축과 함께 사라졌다. 

빌라 밑 개천 주변은 조선조 조지서 작업장이었다. 한지를 직접 제작도 하고, 이미 사용한 한지를 재활용하던 곳이었다. 한지가 화학종이에 밀려 사라지자 그곳의, 천민이나 하던 종이 노동자들은 작업장을 나누어 눌러앉았다. 천민이나 다름없던 이들이었으니 오갈 데도 없었다. 이들의 움막은 빌라 신축을 전후로 뜬금없이 실시된 하천정비 사업과 함께 사라졌다. 탕춘대 주변의 원주민들은 누대에 걸쳐 피땀을 흘렸지만, 국유지인 하천부지에서 한마디 대꾸도 못 하고 떠나야 했다. 

알다시피 한지 제조의 입지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맑고 풍부한 물이었다. 닥나무를 빨고 삶아 짓이기고 닥풀을 쑤어 한지를 뜨는 과정은 모두 맑은 물과 함께 이루어졌다. 제조 과정만이 아니다. 재활용 과정 역시 맑은 물에서 이루어진다. 한지는 물속에서도 풀어지지 않는다. 빨래처럼 빨아도 원형을 유지한다. 

그래서 옷감이 귀한 전통 시절, 서민들은 한지로 옷을 만들어 입기도 했다. 요즘 방탄조끼를 만드는 데도 이용할 정도로 질긴 섬유라니 옷감으로도 손색이 없다. 펄프와 화학약품으로 만든 화학 종이는 수명이 길어야 100년을 넘기기 어렵지만, 한지는 1000년 이상 원형을 유지한다. 우리나라에 고문서가 많은 건 순전히 한지 덕택이다. 

질기긴 했지만 만들기는 쉽지 않았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특히 공문서가 많았던 조정에서는 한지가 귀했다. 보관기한이 지난 문서들을 재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많은 공문서가, 실록의 기초사료인 사초였다. 조정에서 일어나는 일,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해야 했으니, 수요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실록을 작성하고 나면 사초를 파기하도록 했다. 무오사화처럼 사초 내용 때문에 사관들이 처형당하거나 부관참시까지 당하고, 당쟁이나 권력투쟁이 벌어지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란을 예방해야 했으며, 무엇보다 사관의 안전을 보장해 언론의 독립성을 지켜야 했다. 중종은 실록 편찬과 함께 사초를 아예 불태워 없애도록 했다. 그러나 한지 물량이 워낙 부족해지자, 조정은 사초를 빨아서 다시 쓰도록 했다.

사초에서 글자를 씻어내는 것을 세초라고 했다. 세검정 맑은 계류는 세초에 안성맞춤이고, 볕과 바람이 좋고 깨끗한 반석은 세초를 끝낸 한지를 말리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이곳에서 얼마나 세초를 많이 했으면, 세검정 명칭의 연원이 바로 ‘세초’에서 비롯됐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사실 세검정 정자는 연륜이 그리 긴 것도 아닌데 명칭의 연원은 이설이 분분하다. 인조반정의 주역들이 쿠데타 결의를 하면서 이곳에서 칼을 갈았다는 데서 비롯됐다는 게 통설이다. 하지만 반정의 주역인 이귀나 김류 등이 이곳에서 광해군 폐위를 논의하고, 성공한 뒤 이곳에서 칼을 씻으며, 더 이상 그런 하극상이 없기를 기원했다고 한 데서 비롯됐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이밖에 숙종이 한양성 북쪽을 지키는 병사들을 위해 쉬고 또 병장기를 정비하도록 지은 정자여서 그렇게 명몀했다는 소수설도 있다. 

갖가지 사연과 이야기가 남아 있는 곳이지만, 지금 세검정 정자 부근에는 이런 사실과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부자 빌라의 영역을 표시하는 담장만 개울 따라 둘러쳐져 있을 뿐이다. 

나의 두 번째 집은 개울 건너 세검정 정자와 마주보고 있다. 지금의 근대화슈퍼가 그곳이다. 우리 구멍가게 옆 만화방과 신문사 지국은 주택 개보수 설비업체로 바뀌었지만 집은 50여 년 전 단층 슬라브 그대로다. 식구가 늘면서 분가했던 세 번째 살림집은 오토바이 수리점으로 바뀌었다. 주변의 시선을 피해 만화 삼매경에 빠지곤 했던 헛간 자리엔 모텔이 들어섰다.

구멍가게 시절이었다. 중1 때였다. 담임선생님이 아무 예고도 없이 가정방문을 오셨다. 초중고교 시절을 통틀어 처음이자 마지막 담임선생의 가정방문이었다. 선생님과 함께 온 반장에게는 학급에서 모은 불우이웃돕기 쌀 포대가 들려 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혼비백산 했다.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선생님의 가정방문도 그렇지만, 쌀 포대까지 가져왔고, 게다가 손주 놈은 어딜 갔는지 찾을 수 없으니 그럴 만도 했다. 작은 형에게 찾아오도록 했다. 

신문을 돌리고 헛간에서 만화책 보며 뒹굴던 나는 작은형에 이끌려 가게로 갔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데면데면 인사했고, 선생님도 특별한 말씀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긴 그 좁은 구멍가게 안에서 무슨 할 말이 있을까. 

한여름 복치레 다리 위를 할미와 아이가 걷고 있다. 건너편이 나의 2,3번째 살던 집.

손녀는 근대화슈퍼 앞 매대에 쌓여있는 땅콩 꼬투리가 신기하기만 하다. 주인아저씨 눈치를 보면서 땅콩을 집었다가 놓기를 반복한다. 가게 안에는 나이 지긋한 아저씨가 땅콩을 까고 있었다. 아내가 물었다. 

“백사실 오이 있나요?” “장마에 다 녹아버렸는지 올해는 안 나왔습니다.” “땅콩은 어디서 온 거죠?” “예천에서 왔습니다. 집사람 동생이 농사를 지은 거랍니다.” “아주머니는 왜 안 나오셨어요?” “몸이 불편해요.” 아내는 깐 땅콩 대두 한 되 샀다. 2만 원이라는데 “국산 땅콩으로는 싼 편”이라며 아내는 웃었다. 

아이와 함께 다리 난간에 기대어 잠시 쉬었다. 정자를 받치고 있는 반석 밑으로 우당탕 떨어지는 물소리는 여전하다. 다리 밑 반석은 지난 여름 폭우로 말끔히 씻겨 눈부시다. 그때 그 자리다. 동네 어른들이 복날 가마솥에 불을 지피던 바로 그곳.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저녁밥상에 고깃국이 올라왔다. 명절도 아닌데~. 한 그릇 해치우고 난 뒤였다. 형이 물었다. “할머니, 누렁이는 어딨어?” 

당시 우리는 개 한 마리를 개울가에 묶어놓고 키웠다. 털이 누렇다고 누렁이였다. 누렁이는 형을 잘 따랐다. 형이 청계천에서 일하고 돌아오면 가장 먼저 반겨주던 게 누렁이였다. 그날따라 누렁이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 형은 이상했다. 배고프니 일단 밥부터 먹고 나서 할머니에게 물어본 것이었다. 할머니는 못 들은 척 설거지만 하셨다. 할아버지가 옆에서 뭐라고 한마디 했다. 형은 뛰어나갔다. 잠시 후 문밖에서 다 큰 어른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때 세검정 다리 밑은 여름철 복달임을 하던 곳이었다. 한 집에서 복 치레용으로 개를 내면, 장정들이 다리 난간에 매달아 타작하고, 반석에 불피워놓고 그슬리고 해체했다. 일부는 가마솥에 삶아 그 자리에서 해결하고, 나머지는 나눴다. 

산이 목줄이 팽팽하다. 낌새를 알아차렸나? 아니면 신통찮은 구경 그만하고 빨리 가자는 걸까. 산이가 낑낑대자, 아이도 할머니 손을 잡아끈다. 자리를 뜨기 전 다시 한번 귀를 기울였다. 우당탕 물소리에 그때 그 왁자한 웃음소리, 신음 같았던 울음소리가 섞여 흐르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아무래도 아이에게는 할 수 없겠다. 아이가 충분히 장성하여, 아주 오래전 가난한 이들의 복 치레를 이해할 수 있을 때나 전해야겠다. 그런데 그런 날이 도대체 오기나 할까? 저렇게 산이를 피붙이로 애지중지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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