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여정이 드디어 끝났다. 영국 오피스에서 머물다가 비자를 받고 미국으로 옮기기로 했다. 붙기만 하면 신나서 방방 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허무했다. 지난 몇 년간 해외 취업, 특히 미국의 유명한 IT 대기업에 취업하고자 노력했다. 열정이 넘치던 시절에는 잘 안되더니, 오히려 열정과 실력은 점점 떨어지고 해외 취업에 환상이 없어진 지금, 정말 마지막으로 지원해보고 안 되면 그냥 한국에서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시점에 합격했다.
원래 해외 취업 자체가 내 최종 목표는 아니었다. 지난 몇 년간 여러 가지 이유로 계속 해외 취업을 실패하고 자신감이 떨어지면서, 어느새 해외 취업 자체가 목표가 되어 버렸던 것 같다.
내가 왜 해외 취업을 하고 싶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봤다. 대학생 시절 소프트웨어 보안에 빠지기 시작했고, 그중에서도 좀 더 특정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너무 특정한 영역이다 보니 한국에서도 그런 일들을 하며 살 수 있을지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한국 기업에 대한 편견이 좀 있었다. 한국 회사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적은 연봉, ActiveX, 군대문화, 야근문화 같은 안 좋은 것들로 가득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해외 취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많은 환상이 생겼다.
힙한 기술이나 프로젝트들은 전부 미국에서 나오는 것 같았고, 그런 것들이 생겨나는 과정을 옆에서 직접 지켜보고, 나도 그런 기술을 만들어내는 사람 중 한 명이 되고 싶었다. 한국에서는 기술이나 코드를 최대한 숨기려 노력하는 반면, 해외에서는 널리 퍼트려 새로운 표준을 만들고자 하는 모습도 멋져 보였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환상들은 깨져갔고, 해외 취업에 흥미도 점점 잃었다. 멋져 보이는 일들도 사실은 그저 철저히 기업의 이윤을 위한 새로운 형태의 기업 전략일 뿐이라는 것도 알았다. 해외 생활이 쉽지만은 않다는 사실도 해외 생활 경험들을 하나둘씩 들으면서 알았고, 한국에도 좋은 기업과 실력자가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막상 한국에서 회사생활을 해보니 그동안 들었던 안 좋은 이야기들은 사실과 많이 달랐다. 또, 관심 기술 분야가 넓어지면서, 해외 취업을 하지 않아도 한국에서도 어느 정도는 내가 원하고 재미있는 일들을 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계속 도전은 했다. 미국에 가기도 전에 미국의 부정적인 모습들이 보이는 게 그냥 해외 취업을 하지 못 하는 나 자신에 대한 합리화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고, 그래도 개발자라면 한 번쯤은 꼭 경험하고 싶은 실리콘 밸리 생활이기 때문에 갔다가 돌아오더라도 직접 경험해보고 싶었다.
한국에 거주하면서 미국 기업으로 바로 취업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인맥이 없어서 더욱 힘들었던 것 같다. 리쿠르터들에게 콜드 메일도 많이 보내봤고, 홈페이지를 통해 이력서도 많이 넣어 봤다. 그중에 효과가 가장 좋았던 건, 트위터에서 구인 글을 보고 하이어링 매니저나 엔지니어들한테 직접 연락한 경우가 가장 진행이 잘 된 것 같다. 이력서는 당연히 수백 장은 뿌렸고, 전화/화상 면접은 지난 몇 년간 10-20번 정도 보게 된 것 같다. 그중 미국 온사이트에 초대된 것은 5번 미만 정도이다.
애초에 경력이 거의 없는 사람을 미국으로 데려가려는 회사는 별로 없었다. 미국 취업에 대해 찾아본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회사 입장에서는 비자 문제 때문에 비용, 시간, 불확실성 등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다. 간단히 예를 들어보면, 지원자를 온사이트로 데려와 인터뷰를 보기 위해 비행기표나 호텔 비용으로 수백만 원이 든다. 뽑고 나서도 일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비자 프로세스 때문에 몇 개월은 기다려야 한다. 운이 없어서 추첨에 떨어지면, 일 년을 더 기다려야 하거나, 다른 나라에서 원격으로 일하게 해야 한다. 이사비용도 지원해줘야 한다.
이런 과정들을 뚫고 미국 기업에 취직을 하기 위해서는 비용이나 시간에 좀 더 관대한 대기업이 좀 더 확률이 높지 않을까 생각했고, 그런 복잡한 과정이 있음에도 나를 데리고 오고 싶은 메리트가 있거나 회사의 리스크를 줄여줄 수 있는 다른 우회 방법을 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구글코리아 같은 국내 지사에 입사해서 사내 트랜스퍼를 하는 방법도 찾아봤다. 국내 지사를 통하면 비자 문제는 전혀 없고, 필요한 영어의 난이도도 낮아진다. 하지만 구글은 인터뷰 문제 난이도가 높고 사람을 많이 뽑는 것도 아니어서 실력과 운이 모두 필요하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직군으로 좀 준비해서 구글코리아에 지원해봤으나 온사이트에서 떨어졌다. 릿코드 200문제 정도를 풀고 갔다가 떨어졌는데, 그 후에 500문제 정도까지 풀고 다시 도전하려고 했으나,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다.
최근 아마존 같은 경우는 한국에 와서 대규모 채용을 해가기 때문에, 인터뷰 비용이라는 장애물이 줄어든다. 아마존은 진행은 하지 않았지만, 지금 시점에 해외취업을 노린다면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다. 다른 방법으로는, 미국에서 석사과정을 하고 몇 년간 임시로 취업할 수 있는 권한을 사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이미 한국에서 석사를 했기 때문에 다시 석사과정을 밟고 싶지는 않았다.
그와 동시에 미국지사에 어필하기 위해 계속 방법을 찾아봤다. 학생/주니어 입장에서는 당연히 경력이 없으니 대외 활동밖에는 방법이 없는 것 같았다. 대회 수상, 오픈소스 활동, 블로그, 발표, 그 외 사이드 프로젝트 등을 통해서 자신을 알리는 수밖에 없다. 처음엔 데프콘이라는 해킹대회에 여러 번 본선 진출한 내용을 통해 어필하려고 했지만, 생각보다 회사에서는 별로 관심 없어했다. 크롬에서 사용하는 자바스크립트 엔진 V8에 커밋을 50개 정도 하면서 오픈소스 활동을 하기도 했는데, 몇몇 기업에서는 이 부분도 관심을 가지기도 했지만, 이것 자체가 서류 통과를 도와줄 정도의 영향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커미터 정도는 되어야 했던 것 같다. 또 다른 활동으로 크롬 등의 취약점을 찾아 리포트를 하고 포상금을 받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경험들이 있었는데, 이 부분에 많은 기업들이 관심을 가졌다. 입사하고 들은 이야기지만, 동료 중에 블로그 활동을 하다가 눈에 띄어서 입사한 케이스도 있었다.
해외취업의 기회는 대학교 석사과정 도중 처음으로 찾아왔다. 원래 대학교를 다닐 때는 박사과정만 생각하고 살다가, 석사과정을 하던 도중 취업에 대해서도 고민을 해보기 시작했는데, 기왕 하는 것 해외로 취업해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깃헙에 취약점을 리포트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깃헙 보안팀의 인턴으로 지원했다. 취약점 리포트 기록이 있어서인지 서류는 무난하게 통과했고, 웹 어플리케이션 소스코드를 주고 취약점을 찾아 고치는 과제를 내줬는데, 별로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폰 인터뷰를 두 번 봤다. 영어에 자신이 없어서 예상 질문들을 최대한 많이 생각해서 답을 외우는 식으로 준비를 했었다. 첫 번째 인터뷰는 예상했던 질문들만 나와서 무난하게 통과했지만, 최종 인터뷰에서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해서 영어를 계속 버벅거리다가 떨어졌다.
동시에 구글 코리아에도 지원을 했다. 그 당시만 해도 구글코리아는 영업직이 대부분이고, 개발보다는 한글화 작업 등만 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건너 건너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지원을 했다. 근데, 내 이력서를 보고는 본사의 시큐리티 엔지니어 생각이 없냐면서 이력서를 그쪽으로 넘겼다. 개인 사정이 있어서 결국 인터뷰 진행은 포기했지만, 그때 보안 쪽 담당 리쿠르터를 처음 알게 되었다.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일자리를 본격적으로 알아보면서 다시 해외 취업에 도전했다. 유명한 기업들에 생각나는 대로 전부다 이력서를 넣었다. 채용 페이지를 통해 이력서를 넣기도 했고, 구글은 이전에 알았던 리쿠르터를 통해 넣고, 레딧 같은 곳에 올라온 공고를 보고 이메일로 이력서를 넣기도 했다. 거의 대부분은 연락이 안 왔다. 수십 명 규모의 스타트업 몇 군데와, 구글, 우버, 도커 정도에서 연락이 왔다.
구글은 리쿠르터 콜만 몇 번 하다가 진행을 못했다. 원하는 포지션이 안 열리기도 했고, 미국 비자 추첨 확률은 점점 떨어져 가고 하다 보니 석사 과정 때 왔던 기회처럼 미국에 바로 지원하기는 힘들었다. 결국 시드니 쪽에 조금 다른 포지션은 어떠냐고 물어보더니, 좀 알아보다가 원하는 팀이 없는 것 같다며 진행을 못했다. 그렇게 구글은 계속 연락만 오갈 뿐 몇 년간 면접을 시작하지도 못했다.
우버는 구글과는 달리 캐나다 지사에 있다가 주재원 비자를 받고 미국에 넘어가는 방식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리쿠르터 콜을 한 다음에 첫 번째 기술면접을 화상채팅으로 봤다. 분위기도 좋았고 주제도 친숙해서 영어도 술술 나왔다. 첫 번째 기술면접은 합격했고, 두 번째 화상면접 일정을 곧 알려주겠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몇 주 동안 답장이 오지 않아서 물어보니까 모집이 중지되었다고 한다. 어이가 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도커는 간단한 리쿠르터 콜 후에 두 번의 화상면접 후 온사이트 인터뷰를 보는 일정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첫 번째는 보안 기술에 관한 인터뷰였다. 커널 쪽에 대해 모르는 부분들이 좀 있어서 완벽히 대답 못한 부분들도 있었지만 내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최대한 추측해서 대답하는 식으로 했다. 두 번째 인터뷰는 코딩 인터뷰였는데 당시 다른 면접들을 위해 알고리즘을 공부하고 있을 때여서 무난하게 다 풀었다. 그리고 두 인터뷰를 통과했다며 다음 스텝으로 샌프란시스코로 초대해서 인터뷰를 진행하기로 했는데, 도커 내부에서 새 제품 릴리즈를 하는 시점이어서 바쁘다며 한두 달 정도 딜레이가 되었다. 문제는 그동안 비자를 신청하기 위한 타이밍을 놓쳐버렸고, 그쪽에서 변호사랑 얘기를 해보더니 갑자기 온사이트 전에 한 번 더 화상 인터뷰를 보자고 했다. 근데 난이도가 급격히 상승했다. 실제 리눅스 커널 내부를 자세하게 알지 못하면 대답 못할만한 질문들만 계속했고, 당연히 커널 쪽 경험이 전혀 없던 나는 답을 제대로 못했고 떨어졌다. 현재는 성장할 사람보다는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인력을 구하고 있다며 탈락 통보를 받고 마무리를 했다.
그 외에 몇몇 스타트업 면접들도 봤다. 전부 화상면접을 보고 난 후 떨어졌다. 아마도 스타트업 입장에서는 당장 실무에 투입될 사람이 필요한데, 영어나 실력이 기대에 못 미쳤던 것 같다. 한 번은, 생전 처음 들어본 영국 지방의 엑센트 때문에 대화의 90%를 못 알아들은 적도 있었다. 상대방도 도저히 안 되겠는지, 화상을 틀어놓고도 그냥 채팅으로 면접을 보자고 했다. 그쪽도 내 발음을 못 알아듣겠는지, 말로 대답을 하려고 해도 말하지 말고 채팅으로 대답하라고 했다. 그때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다 떨어지고 나서는, 도저히 안 되겠어서 한국의 좋은 회사로 취직했다. 처음에는, 밤낮없이 온 힘을 다 쏟아부어서 연구를 하던 대학원 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평화로운 회사로 가서 워라밸이 생기니 한 동안은 낯설었다. 그러다가 적응을 하고 한국 회사도 괜찮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어가고 있을 때,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그렇게 구글, 퀄컴, 마이크로소프트의 면접을 보게 되었는데, 이 부분은 다른 글에서 하나씩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결론적으로는 구글은 최종 탈락하고, 퀄컴에 붙어서 2개월 정도의 회사 생활을 하다가 퇴사를 했다. 그러고 좀 방황을 하다가 마이크로소프트에 합격을 했는데, 신나기보다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퀄컴에 들어가자마자 퇴사했던 경험도 떠올랐고, 굳이 고생을 사서 하고 있는 건 아닌지에 대한 생각이 밀려왔다. 오퍼를 수락하고 영국으로 옮기기 전 몇 달 동안 심리 상담도 받아보고, 정말 미국에 정말 가고 싶은 것인지,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 다시 한번 깊게 고민을 해 본 후에, 최종적으로 입사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갔다가 안 맞으면 그냥 돌아오면 된다. 차분히 생각해보면 크게 두려워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았다. 아직도 어느 길을 가야 할지 몰라서 방황하고 있는 나에게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았다.
면접을 준비할 때나 미국에 왜 가고 싶은가를 고민하면서 해외 직장생활에 관한 유튜브 채널이나 글들을 많이 찾아봤고, 도움을 많이 받았다. 나도 직접 경험하며 느낀 것들이나, 실제로 어떤 생활을 하게 되는지를 가끔씩 공유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