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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os 지니 Mar 28. 2016

피로감 사회를 극복하는 법



                        -  피로감을 유발하는 사회  -



언제부턴가 우리는 피로, 피곤이 아닌 피로(감)이라는 표현에 익숙해졌다. 피로감이란 말의 의미는 ‘정신이나 몸이 지쳐 힘든 (느낌)’이라고 한다. 보통 피곤하다거나 피로하다는 표현은 육체적 과로나 정신적 스트레스로 어느 정도 정의가 가능할 것 같다. 


그러나 ‘피로감’이라는 느낌은 어떤 심리적 상태에 더 무게가 가는듯하여 피로감의 원인을 추적하는 것도, 피로감을 해소하는 것도 역시 쉽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다시 피로감이 몰려온다. 역시 무엇이든 복잡해지는 것에 우린 피로감을 느끼게 되는가 보다. 그렇더라도 이미 피로감 사회에서 살고 있고 피로감을 평생 안고 살아야 한다면 한번쯤은 그 복잡함을 해부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피로감을 유발하는 세부 원인들은 다양하지만, 부조리(不條理)함이 일상화된 사회로부터 느끼는 피로감은 표현이 주는 느낌 자체로도 피하고 싶은 그 무엇으로 다가온다.



01 피로감 현상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그렇다면 피로(감) 현상은 왜 나타나는 것일까?  또한 우리의 정신과 육체를 지치고 힘들게 하는 (피로감)이란 대체 무엇일까? 


우리 인간이 사회를 존속해 올 수 있었던 것은 예측 가능한 사회 시스템과 이를 운영해갈 조직 특유의 공유 가치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예측 가능했던 보편적 가치가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지게 된다면 우리는 어떤 심리상태를 경험하게 될까? 최근 하루가 멀다 하고 보도되는 직계 존속/비속 살인사건 등 이른바 비인간적인 사건이라고 여기는 사건들을 대할 때처럼.


더구나 이런 사건들이 일상에서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음에도 사회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비정상적 상황을 막아내지 못한다고 생각해 보자. 


개인들은 연이은 충격(여기까지는 그저 스트레스로 보아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이 어찌할 수 없음을 인식하게 되면서 다시 평정을 회복하지도 못한 채 포기상태에 이른다. 이처럼 인간이 당연시 생각하던 가치의 영역에서 보편가치를 넘는 상황들이 빈번하게 발생하게 되면 보통은 비정상 사회로부터 자신을 분리(객관화)하는 방식으로 기존 수준으로의 시스템 정상화 의지를 포기하게 된다.(그러나 개인을 사회로부터 분리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만일 분리했다고 생각한다면 개인이 사회 시스템에서 공유되는 부분을 포기한 상태를 이를 것임) 이런 행태는 개인들이 처한 능력과 상황에 맞추어 선택한 나름의 생존방식일 것이다.


비상식적 직계 존비속살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분노하며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생명이라는 가치 자체가 원초적인 것이면서 인간이면 누구나 공유하는 양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기본 양식에 반하는 행동을 볼 때 자연히 충격을 받게 되고 그 감정 상태를 공유하게 되지만, 막상 문제발생의 근원을 찾아 해결하는 단계에 오면 회피하는 경향을 보이곤 한다. 비상식적 행위들이 나타나게 된 원인을 이해하고 치유해가는 과정은 사건이 발생했을 때의 반응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이러한 현상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지속적으로 반복되어도 우리는 비정하다고 느꼈던 감정과는 다른 흐름의 행동양식을 보이곤 했다. 자신의 능력 밖 것이라며 그냥 눈감고 무디어짐을 택하게 된다. 이처럼 피로감이란 스스로가 상식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비상식의 잦은 출몰과 같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사회를 감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오는 심리적 상태, 즉 스스로 선택했지만 명쾌하지 않은 불편한 감정 상태에서 오는 현상이 아닐까.



02 감정 흐름의 단절에서 경험하게 되는 피로감


성수대교 붕괴, 지하철 가스폭발, 삼품백화점 붕괴, 훼리호 침몰 등에서부터 세월호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을 반복하고 있는 후진국형 인재를 경험할 때마다 우린 이러한 심리상태를 반복하며 경험했을 것이다. 반복된 경험은 이것만이 아니다. 사건현장에서 멀어짐과 동시에 어느덧 잊혀져갔고 더 이상 문제해결의 과정에서도 멀어져 갔던 경험,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지겹다는 말까지 서슴지 않았던 것까지 말이다. 온 국민이 그토록 오래 아프고 슬퍼했던 행위 자체는 대체 무엇이었던가에 대해 스스로에게 되물을 사이도 없이 어느새 피해자는 피로감을 느끼는 대중을 향한 새로운 가해자가 된 듯이.


이러한 비논리적 심리 현상에서 드러나는 감정, 우리가 항상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채 맞이하게 되는 그 포기의 감정을 추적하다 보면 다름 아닌 사유(思惟)의 부재(不在) 상태를 확인하게 된다. 앞서의 비인간적 사건들에 모두는 충격(슬픔이 지나쳐 나타나는 감정 상태)이라는 형태의 공감을 했지만, 뒤이어 다가온 재발방지 문제 등을 풀어가는 과정에 이르러서는 막상 방법과 과정이 복잡해지니까 스스로의 감정을 그쯤에서 단절(포기)시키고 만다. 이러한 단절 현상의 원인은 구체적인 변화와 치유의 시스템을 모색해가는 능력인 사유의 힘을 잃었기 때문이 아닐까.







              -  사유함으로써 가능한 피로감 극복  -




11  사유(思惟)를 방해하는 것들..


고대 철학자들이나 물리학자, 수학자들이 이룬 상상하기 어려운 업적들의 근간에는 사유라는 사고의 활동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들이 이룬 업적이 단순히 경험이나 정보의 수집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면 그런 놀랄만한 성과로 기억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사유의 세계는 새로운 가설을 만들고 경험의 세계에서 발견할 수 없는 것들을 추론케 하는 창조적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유라는 정신 활동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임에도 언제부터인가 왜 우린 스스로 사유를 계속할 수 없게 된 것일까?


우리는 아침에 눈뜨면서부터 잠들기까지 사유를 가로막는 장애물들과 끊임없이 만난다. TV, 휴대폰, 컴퓨터, 각종 서류들, 신문, 우리의 생활을 편리하게 유지해주는 각종 전자기기들까지 끊임없이 사유를 방해하는 장애물들과 마주하면서 다양한 상상이나 논리적 사고들이 차단된다. 


이전에는 개인들의 사적 영역(정신적이든 물리적이든)으로 치부되었던 사소한 부분들까지 SNS 등을 통해 모두 드러내면서 그야말로 정보의 홍수상태를 만들었고 스스로 만들어낸 홍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어떠한 거름 장치나 선별 과정도 없이 그저 노출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먹고 감각해 왔던 우리 모두는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뿐 이러한 홍수를 무차별적으로 확대재생산하는 공범자였다. 이러한 시스템을 양산해 낸 거대 자본의 개입문제는 논외로 하더라도 말이다. 날마다 많은 시간을 퍼부어야 하고 나를 불편하게 할 정도로 많은 이 정보들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이제 되돌아볼 때가 아닐까. 만일 현재와 같은 무차별적인 수용만 계속해야 한다면 인간인 우리가 결국 기계와 무엇이 다를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함께 말이다.


위 존속비속 살인 문제에서처럼, 문제임을 알면서도 문제의 해결로 가는 접근을 할 수 없었던 것이 이처럼 이해되지 않은 채 무차별적으로 밀고 들어오는 정보의 홍수로 인해 사유의 세계가 점령당해서가 아닐까.



12  사유(思惟)의 힘!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가


중국인들이 그렇게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유명한 역사가인 사마천은 사기를 완성해내기 위해,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공자 등 철학자들도 세상을 읽기 위해 전국을 떠돌며 많은 경험의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사마천이나 공자가 역사서 소재나 사상체계의 발전을 위해 인간사를 살폈던 중요한 경험은 사유의 세계가 아닌 정보의 수집 행위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경험한 정보들을 소재로 완성한 방대하고 심오한 결과들이 어떠한 사유의 과정 없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사유의 과정 없이는 그저 경험한 정보들을 기술하는 이야기 수준이 되었을 것이다.


장자크 루소가 ‘대의 민주주의에서 사람들이 자유로운 것은 선거기간 동안뿐이고 그 뒤로는 오로지 노예일 뿐이다.’라고 말했다던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중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선거라는 의사표시를 통해 우린 더 나은 사회를 기대하곤 한다. 그러나 사회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고 오히려 점점 더 힘들어지는 경험을 해 왔다.


이처럼 사회가 나의 의사표시로써 바뀔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기대와 다른 결과로 나타났다면 결과에 실망하기 전에 스스로의 판단 과정부터 따라가 보는 것은 어떨까?


옛 철학자들이나 물리학자들이 우주를 들여다보지 않고도 새로운 가설이나 학설을 만들어내고 학문을 발전시켜 왔듯이 우리에게도 사유의 힘이 작동했다면 드러나 보이지 않았더라도 숨은 의도와 이면을 간파하려 노력했을 것이다. 물론 사유의 힘을 빌었음에도 잘못된 판단을 할 수는 있지만(충분히 그럴 수도 있기 때문에) 이는 수정할 수 있는 정도이거나 사유의 능력을 확충해가는 과정으로서 또 다른 의미가 되었을 것이다.



13  사유(思惟)의 영역! 어떻게 늘려갈 것인가


우리는 가까운 사물(휴대폰, 컴퓨터 등)을 밀착해서 오래 들여다보다가 질리기도 하고 바로 피곤함을 느끼는 경험을 하곤 한다.  이러한 피로감은 전체가 아닌 부분만을 보는데서 오는 답답함(부분만으로는 의미 전체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반면 먼 곳을 지그시 바라보는 행위는 우리에게 오래 감상할 수 있는 여유감을 준다. 그 원인은 먼 곳을 넓게 보면서 전체 흐름을 느낄 수 있고 그 흐름 속에서 창조의 영역인 사유의 행위까지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가까움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사람을 지치게 하면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광고 문구까지 등장 했겠는가? 떨어져 있어야 심리적으로 안정되고 새로운 인생을 그려볼 수 있는 여유도 가능해진다는 의미가 아닐른지.


그러나 우리 일상의 생활패턴들은 멀리 조감하거나 관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고 개인들은 각각 고립화되어가고 있으며, 넘쳐나는 사건, 정보 등의 홍수는 도움은커녕 내 자신을 감싸면서 나를 더욱 압박하고 있다. 이 시간 우리는 이런 압박감에 무기력하게 굴복하는 대신 스스로 자유의 공간으로 나가는 시도를 하는 것은 어떨까? 그래야 피로감에 압도되지 않고 비정상적 사건들에 대한 제대로의 문제의식을 작동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넘쳐나는 정보들, 그렇다면 무엇을 택하고 버릴 것인가, 그리고 선택의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할까 고민이 아닐 수 없다. 다시 피로감이 나를 괴롭히는 순간이지만 이 모든 선택의 주체가 되기 위해 이겨내야 할 부분이다. 우선 공공의 것이면서 나의 것이기도 한 의미 있는 부분을 취사선택하는 연습부터 시작하는 건 어떨까. 공공의 것은 지금 당장 내 것이거나 내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언젠가 내게 영향을 미치거나 내게도 다가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14  사유(思惟)로의 여행을 위한 여백


수많은 생명을 빼앗아간 무서운 사건들은 바라다보는 내게 직접적이지 않다. 그러나 사고를 당한 사람들에게는 당면한 문제가 되는 것처럼 공적 시스템 부재는 언젠가 개인들에게 구체적 결과로 다가오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사고의 빈도는 결국 내게도 다가올 사고의 확률과 비례한다는 의미와 함께.


그렇게 취사선택으로 새로이 정렬된 내 생활의 영역에 사유의 여백을 항상 남겨두자. 빽빽이 채워진 공간은 상태 그대로를 유지할 수 있을 뿐이지만, 여백이 있는 공간에서는 많은 경우의 수만큼 새로운 모습을 그려낼 수 있다. 복잡하고 삭막한 현실이 내게 주는 공간이 따로 없지만 스스로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자유(사유의 방법으로)의 공간, 사유의 여백을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이러한 여백은 세상이 이해되지 않거나 문제해결이 되지 않는다고 느껴지는데서 오는 피로감의 원인을 들여다보게 하고 피로감을 해소해가는 에너지가 될 것이다.


수천 년을 지나도 여전히 그 가치를 발하는 눈부신 업적의 기초가 되었던 수많은 명제와 가설들의 출발에는 항시 사고(思考), 사유(思惟)라는 영역이 함께 했듯이 말이다. 그것도 아주 오랜 시간.


사유할 공간을 남겨두어야 문제의식의 공감과 함께 이를 극복해가는 사회적 과정을 이해하고 행동으로 이어갈 마음의 여력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정보의 홍수 속에 갇혀버린 상황에서는 충격적인 사건들도 그저 하나의 정보로서 다가와 감정을 자극하고 스쳐지나갈 뿐 더 이상의 사고의 전개를 방해한다. 



15  사유(思惟)의 시간을 갖는 연습을 하자


70, 80년대 청소년기를 지난 나와 같은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 시대만 해도 우리의 일상은 늘 상상의 세계를 동반하곤 했었는데, 요즘은 상상의 레이더를 가동할라치면 전파를 방해하는 알 수 없는 무수한 방해물들을 먼저 경험하곤 한다. 무언지 모를 사고의 항해를 방해하는 요인들(전자기기들, 인터넷 홍수, 스치고 지나가는 쓰레기 수준의 정보들..)


소크라테스는 당시 그리스의 젊은이들이 환호했다는 신기술인 글쓰기가 영혼에 건망증을 만들고 사람들이 기억력을 사용하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걱정했다고 한다.(15.5.5 한겨레 ‘분산기억 시대에 사람에게 필요한 능력은?’ 인용) 글쓰기가 개인의 표현 능력, 논리적 사고를 향상시킨다며 오히려 적극 장려하는 요즘의 추세와 대비되면서 고대의 철학자는 그러한 글쓰기마저도 인간의 제대로 된 사유를 방해하는 요인이라고 보았다는 것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오면서 한편으론 사유 자체의 중요성을 다시금 생각케 한다.


얼핏 보기에 추상적이고 비현실 세계인 듯이 보이지만, 사유의 세계는 인간이 작은 세계에 갇혀 있지 않도록 더 넓고 깊은 영역으로의 여행을 가능하게 한다. 물 흐르듯이 문제의 해결 방향으로 향하도록 인도하면서 부조리함에서 오는 피로감이 끼어들 여지를 차단하는 기반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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