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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os 지니 Apr 20. 2016

[1] 스스로를 소비하다 :

과잉생산 과잉소비 시대



오늘도 우리는 배부르게 먹고 과하게 먹은 만큼 열량을 소모시키기 위한 다양한 운동 프로그램을 기획한다. 또한 눈 뜨면 내가 원하지 않아도 전달되는 각종 전자기기들 속의 수많은 정보들을 행여나 놓칠세라 훑어보고, 주변을 점령하고 있는 필요 이상의 과다한 물품과 기기들을 핸들링 하는데 역시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 



01   과잉소비는 과잉생산이 유도한다


그야말로 과잉소비시대에 살고 있다. 과잉소비를 위해서는 그 만큼의 과잉생산 능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즉 과잉소비의 경향이 과잉 생산을 유발하는 구조에서는 문제의 근원 파악이 쉬울 수 있다. 문제는 과잉생산이 과잉소비를 선도하고 있는 복잡한 구조의 경우다. 필요 이상 먹게 하고 필요 이상 감각하게 하는 과잉생산 구조에서는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가 주체가 되어 소비를 좌우한다.


그렇다면 왜 생산주체들은 끝없이 과잉소비를 유도하고 있는 것일까? 부의 축적에 대한 그들의 끝없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함이다.  새로운 색의 옷으로 갈아입었을 뿐인 같거나 유사한 기능의 제품들을 앞세우며 마치 Blue Ocean이라도 개발한 듯이 그럴듯한 이름으로 말초적인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02  과잉소비는 어떤 방식으로 유도되는가


일반적으로 소비행위에는 항상 그 필요성이 따르게 마련이다. 따라서 필요이상의 소비를 유도하기 위한 그들의 과잉생산 방식에는 눈속임이 있을 수밖에 없다. 즉, 인간이 소비할 수 있는 적정 수준을 넘어 소비하도록 촉진하려면 그 필요이상의 소비에 대한 당위성이 필요하고 소비자에게 그 당위성을 부여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불필요한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그 필요성이 착각될만한 교묘한 가짓수 늘리기와 유사한 종류들의 무한 파생의 형태로 다가와 필요한 소비재인양 소비자를 현혹시키기가 동원된다. 우리는 이렇게 재탄생된 생산품들을 소비하기 위해 항상 분주하다. 


과잉소비가 유도되는 또 다른 방식의 유형이 있다. 우리는 하루 중 많은 시간을 소비하게 되는 인터넷, 영상물 등을 통해 강제로 밀고 들어오는 수많은 광고물들로 짜증날 정도의 답답한 경험을 하곤 한다. 그래도 당장의 대가 지불 없이 인터넷, 영상물 등을 무한정 이용하고 있다는 착각으로 기꺼이 인내한다. 그러나 실상은 귀찮을 정도의 광고물로 시간을 허비하게 되는 방식으로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소비 형태인 것이고, 우리가 소비한 시간만큼의 광고 효과는 고스란히 자본의 이윤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과잉소비의 영역은 어디까지 확장되고 있을까?  SNS, 인터넷 등을 통한 헤아릴 수 없는 정보의 소비(수용)에서부터 수많은 공산품들은 물론 음악, 미술, 영화, 각종 공연 등과 같은 문화의 소비와 오락, 심지어 휴식의 개념에까지 우리 생활의 전 영역으로 확대된다.  더구나 공연, 전시, 영화 등 문화의 영역처럼 창조적 행위에 대한 소비(화폐를 지불하거나 시간을 소비하며 향유하는 모든 행위를 그렇게 부르기로 함.)는 그야말로 감상과 함께 오래도록 여운을 즐기는 개념의 소비인데 이 역시도 다다익선인 듯이 빠르게 많은 작품을 스쳐가는 방식으로 소비하게 한다.



03  우리 삶의 영역은 어떻게 과잉소비로 대체되는가


자본이 만들어낸 소비패턴은 크게 두 가지 지향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그들의 생산 공정 속도에 맞추어 소비를 강요하는 것이고, 둘째는 소비재의 내용을 그들의 의도대로 마치 패션을 선도하듯이 이끌어 가는 것이다.  이런 지향점들이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 문화의 소비에 대한 구체적인 예를 통해 들여다보자.  


먼저 생산 공정 속도에 맞추어 소비가 강요되는 첫 번째 지향점은 어떻게 구현되고 있을까?  영화나 공연물과 같은 문화 체험은 체험 이후 자연스레 다가오는 정신적 활동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정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감상과 생각을 할 겨를과 여운이 과연 우리에게 허용되고 있는가?  사고하고 판단할 겨를 없이 앞서의 문화 체험은 시간에 묻혀버리고 바로 다음 공연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조급함의 경험들.  벨트가 지나가는 어느 과정도 놓칠 수 없는 공산품을 찍어내는 컨베이어 시스템처럼 어느새 소비 주체인 나의 페이스는 무시되고 공급자(또는 사회분위기) 페이스에 자신을 맞추며 따라가기 바쁘다. 

 

여기서 나는 문화를 즐기고 사고하는 주체가 아니라 컨베이어 벨트 위의 물건처럼 강요된 소비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많은 문화공연을 보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 취급을 받는다는 강박 관념까지.


과연 우리가 영화나 공연물 등을 관람하는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시각을 자극하는 화려한 무대장치나 배경을 감상하는 것이 본래 목적은 아닐 것이다.(물론 그런 목적의 공연물들도 많기는 하지만) 인간의 삶이 작품으로 재조명되는 종합예술을 보면서 우리는 공감 영역을 터치하지도 못하고 그럴 사이도 없이 이끌려 다니는듯한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심지어 작품에 대한 후기와 느낌마저도 누군가 장황하게 결론 내주기까지 하니 이보다 친절하고 편리한 소비가 어디 있을까? 


문화공연을 보고 뒤이어 경험하게 되는 많은 생각의 영역은 누구에게나 일률적이지도 표면적인 것이지도 아닐 텐데 말이다. 인간으로서 비슷하게 공유되는 부분도 틀림없이 있을 테지만, 개인사가 모두 다른데서 오는 다양한 감정(낭만, 고뇌, 외로움, 기분 등) 상태는 어디가고 이처럼 강제로 공유된 듯한 감정만 남게 된 것일까. 다름은 자연스레 다양한 생각의 논쟁으로 이어지곤 하는데 이런 다름이 허용되지 않으니 이후의 논쟁도 점점 축소되어 갈 수 밖에 없다. 


이런 피상적인 소비행태의 이면에도 역시 자본논리의 두 번째 지향점인 강요된 소비패턴이 자리하고 있다. 세간에 자주 문제가 되곤 했던 영화산업의 예를 들어 보자.  다양한 소재로 새로운 영역을 끊임없이 시도하는 독립영화가 아무리 훌륭한 작품으로 개봉하려 해도 자본은 배급사 등을 원천봉쇄하는 방식으로 독립영화의 소비자를 향한 접근성 자체를 차단해 낸다. 그리고 그들이 보여주고 싶은 영화만을 보급하면서 마치 영화도 하나의 패션인양 소비자의 다양한 기호성향을 애써 무시한 채 소비패턴을 주도해 나간다. 종합예술을 경험하는 묘미는 작품 속으로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간접 체험하는 데 있을 것인데,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 배포된 작품들을 그저 눈으로 구경만 하고 지나가게 된다.



04  과잉소비 안에 갇힌 우리의 삶


하루 소화해야할 많은 시간대별 과외 수업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이러한 현상은 줄곧 비판받고 있는 주입식 교육의 문제만이 아니다.  결국 주체로서의 삶이 줄어드는 만큼 사고능력은 퇴화하고 인간은 점점 규격화된 인격체로 가고 있는 느낌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규격화된 상품들의 과잉생산과 맞물려 있다. 기계화된 소비패턴의 무의식적 강요로 넓은 사고의 영역이 잠식당하고 있음은 물론 인류가 풍요로워지기 위해 확장된 모든 분야(사회, 문화, 교육 등)까지도 본래 목적과 달리 자본논리에 의한 소비패턴으로 대체되면서 인간 스스로 주체가 아닌 수동적 객체로 전락하게 되었고 우리는 그러한 소비패턴에 갇히고 말았다.


이런 구조는 휴식의 개념에서도 나타난다. 휴식이야말로 지극히 개인적이고 고유한 영역인데 이 영역에서도 역시 자본이 만들어낸 다양한 휴식 프로그램에 이리저리 휘둘리며 이끌려 다닌다. 이런 형태의 확장성과 함께 반비례하여 축소되어가는 인간 의식의 수준으로 우리가 그토록 불안해하면서 맞이하게 될 AI로봇 시대에 주체로서의 역할을 감당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은 기우일까.


소비란 돈이나 물자, 시간, 노력 따위를 들이거나 씀으로써 인간에게 생존과 함께 일종의 만족감을 주는 행위이다. 그러나 과잉소비는 이러한 경향을 거스른다. 즉, 소비한 만큼 인간에게 만족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잉 소비하는 만큼(시간, 돈, 여유, 사고 등) 내 영역이 잠식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문득 옛 성현들이 물질적 풍요를 거부하고 청빈하고 단출한 삶을 살았던 이유를 돌아보게 된다.  과잉소비의 문제는 쓰레기 양산이라는 물리적인 문제보다 지구가 쓰레기로 잠식당하듯 인간의식도 잠식당하게 된다는 심각성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소비를 하지만 소비가 과해지면 반대로 정신적, 육체적으로 많은 것을 잃게 되는 경험을 하곤 한다. 그럼에도 이처럼 소비를 자제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앞서 말했듯이 자본주의의 극대화로 인해 모든 사회시스템이 자본의 논리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초기 산업사회에서 자본논리의 영역은 살아가기 위한 기본 소비재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 범위는 무한히 확대되면서 인간의 생존과 밀접한 관련성으로 그 사회가 직접 통제해왔던 분야인 의료 등 복지는 물론 교육 분야,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인 가정과 문화 예술 분야까지 뻗쳐가고 있다. 


이러한 확대현상은 우리 일상을 되짚어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아침에 눈 뜨면서부터 시작되는 우리의 행동반경에서 우리가 스스로 주체로서 리드하고 있는 부분이 어느 정도일까?


많은 사람들이 인스턴트 식품으로 끼니를 때우고(음식물 소비), TV, 컴퓨터를 통한 기사 검색(정보의 소비), 직장에서 회사의 지시에 따른 업무 수행, 식사, 문화생활, 운동에 이르기까지 주로 이 사회가 자본의 논리로 만든 소비시스템 내에서 움직인다. 심지어는 일종의 여가시간이라 할 영화나 TV 드라마를 볼 때조차도 각종 PPL(Product Placement)로 무의식 세계가 침범당하고 노골적인 PPL은 스트레스가 될 정도로 생활을 방해하고 있다.



05  가장된 편리함 대신 어떤 댓가를 치르게 되는가


게다가 우린 이런 과잉소비를 하기 위해(구매력인 화폐 취득을 위해) 끝없는 경쟁체제로 내몰리고 있다. 우리 생활에서 어느 것 하나 화폐 없이 해결되는 부분이 있을까? 노동시간은 증가하고(물론 노동 접근이 아예 거절되는 경우가 급증하는 상황임) 수면시간은 갈수록 줄어들며 의식, 무의식 세계는 대부분 자본이 만든 시스템 안으로 편입된다. 결국은 사람이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겪게 되는 모든 과정에서 주체로서의 지위가 심하게 축소되어 갔다. 


살면서 다가오는 많은 것(생사고락)을 스스로 경험하고 이해해 나가는 과정을 겪어내야 온전한 나의 인생이라 할 것인데, 그런 나의 체험중 상당한 과정이 상업화된 상품으로 대체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죽음의 과정이나 각종 오물(실제 오물인지 모르겠지만 오늘날 우리가 그렇게 규정한 것들) 등의 경우 역시 인간과 완전히 분리하여 이를 상업화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인간은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것들과 멀어지는 대신 이에 대한 새로운 공포감(죽음의 과정이 삶에서 떨어지게 되면서 오히려 죽음을 자연스레 받아들이지 못하고 공포감이 극심하게 되었다고 함)을 갖게 되거나 지독한 증상들(면역력 결핍, 아토피, 각종 질환들)에 시달리게 되었다. 즉, 자연스런 삶의 일부였던 부분들이 우리로부터 멀어짐으로써 이를 대하는 우리의 자연스런 감정이 전혀 새로운 감정으로(대체로는 부정적인 것) 대체되었고 인간 스스로 판단하고 겪어오던 영역은 줄어들었다.  점차 내게 떠먹여줄 양식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말이다.



06  시스템 그물망에 갇혀 선택을 강요당하는 폭력


이러한 수동적 인간으로의 삶 뒷면에는 다름 아닌 자본이 만든 거대한 소비시스템이라는 그물망이 있고 우린 그 안에 갇혀있음을 느낀다. 개인은 그로부터 스스로 컨트롤 할 수 있을 정도의 자유조차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은 무서운 구조다. 생산에서 소비에 이르는 촘촘한 컨베이어 시스템 안에서 인간은 마치 그 많은 소비재를(필요성과 가치도 모른 채) 먹어치우는 임무를 부여받은 것 같다.

 

인간이 이 세상에 온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를 곰곰이 생각해 볼 때 당면한 현실은 두려움 그 자체다. 무지막지하게 밀려드는 소비재들을 소비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온 것은 아닐 것이다.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의 섭리를 즐기고 함께하면서 살다 가기 위해 온 우리가 아닌가?  다른 모든 생존체들이 그러한 것처럼.


언제부턴가 TV에서는 다큐나 교양 프로그램을 찾아볼 수조차 없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며 불필요한 소비만을 끝없이 자극하고 순간의 재미만을 구하는 프로그램들로 넘쳐난다. 어느새 나는 보고 싶은 프로그램을 찾는 대신 넘쳐나는 이런 프로그램을 시청하는데 동참하고 만다.  


TV는 이 사회를 살아가는 대부분 사람들이 거의 선택의 여지없이 소비하고 있는 큰 의미의 소비재다.(자본의 힘이 이미 그러한 시스템을 실현해 왔음) 그런 소비재가 다양성 대신 돈이 되는 내용으로만 채워져 생산되고 방영된다면 이는 강요된 소비요 폭력일 것이다.


쓰레기 수준의 프로그램들에 온갖 사람들이 나와서 하나마나한 말들을 쓸데없이 반복하면서 권태로움을 양산하고 우린 이 권태로움을 잊기 위해 또 다른 것(소비재)을 찾고 있다.



『과잉생산 과잉소비 시대』의 두 번째 논고는 “ [2] 생산으로부터 소외되는 노동력 ” 에서...



- 지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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