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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스트의 괴롭힘 파악하기

나르시시스트가 기분 나쁜 얘기를 하면서 웃는 것은 악의를 숨기기 위함이다

A는 B와 사적 모임에서 친분 있는 사이었다.  

A는 B와 쿵작이 잘 맞는다고 느꼈다.  

A가 힘들었던 일을 말하면 B가 비슷한 일을 겪었다고 속마음을 털어놨다. 

이해받는 기분이었다.  


어느 날, A는 B와 만나기로 약속을 어겼다.    

그날따라 유난히 피곤해서 소파에 잠깐 누웠는데 그대로 잠들었던 것이다.

약속 시간이 다가오자 B에게 연락이 왔다.

A는 몸이 안 좋으니까 다음에 만나자고 말했다.


결과론적인 말이지만 약속을 취소하려면 상대가 전화하기 전에 연락해 사과하면서 다음에 보자고 해야 적절했다.   

아니면 늦게라도 만나러 나가든가.  

A의 불찰이었다.


알았어.

B는 짤막하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예기치 않게 약속이 미뤄지면 감정이 상한다.

B도 언짢아했다.


며칠 뒤 A는 지인들과 함께 B의 집에 놀러 갔다.  

그런데 A를 대하는 B의 태도가 어딘가 이상했다.  


우와, 이 음식 뭐예요?

A가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던 B에게 말을 걸었을 때였다.


방금 전까지 B는 환하게 웃으면서 사람들을 맞이했다.

하지만 A의 인기척을 느끼자 곧바로 안색을 굳혔다. 

그리고 쳐다보지도 않은 채 톡 쏘아붙였다.  

뭐긴 뭐야, 립이잖아.


B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A는 살짝 당황했다.


질문의 내용이 심기에 거슬렸나?

음식 이름을 물어봤다고 기분 나빠할 사람은 없다.       


질문한 주체가 싫어서 핀잔을 줬나?  

A의 입장에서는 B와 사이가 틀어질 만한 에피소드가 없었다.


이후에도 B의 해괴한 공격은 계속됐다.

식사를 마치고 다 같이 거실에 둘러앉아 과일을 먹고 있었다.


B는 자신의 반려견 이야기로 운을 띄웠다.

겨울에 추워서 반려견을 자주 껴안는다는 우스갯소리였다.

재밌지 멘트는 아니었지만 A는 일단 분위기를 맞추려고 웃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B가 대화의 물줄기를 확 꺾었다. 

그리고 A를 험담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인 A가 장로교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을 걸고 넘어졌던 것이다.


개신교는 여러 종파로 갈린다.

특히 장로교는 보수적인 성격의 교파다.         

참고로 B는 침례교 교회에 다닌다.  


장로교 사람들은 되게 경건하게 기도해.

A가 이렇게 기도하잖아.

거~~~ 룩 하게 하옵소서, 하옵소서.

으하하.


B는 기도하는 흉내를 내려고 어설프게 한쪽 팔을 휘적거렸다. 

'거~~~룩하게 하옵소서' 라는 말을 할 때는 연극톤의 말투를 구사했다. 

과장이 심했떤 것이다.  

물론 장로교인은 연극배우가 대사를 읊조리듯이 기도하지 않는다.   

팔로 공중에 동그라미를 그리지도 않는다.  

B가 정성스럽게 오버액션했던 것뿐이었다. 

그는 상대를 우스꽝스럽다고 말하고 싶어 했다. 


앞선 대화의 주제는 각자의 평범한 일상이었다.

아주 소소하고 발랄한 얘기가 오가고 있었다.


그런데 B가 꺼낸 말은 재미없을 뿐더러 주제 자체가 너무 엉뚱했다.

앞서 대화한 흐름과 무관한 내용이 돌부리처럼 튀어나왔기에 리액션이 애매했다.


적막한 공기가 어색한지 B는 혼자 게걸스럽게 웃었다.

A는 어이가 없는지 그를 유심히 쳐다봤다.  


B의 눈 주변 근육은 딱딱하게 굳었고 입모양은 뒤집어진 세모꼴이었다.

부자연스러운 표정이었다. 

결코 그가 재밌어서 웃는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B는 A를 놀리면서 당사자가에게 한 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험담의 주인공을 외면하다니. 

A를 의식하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B는 사회생활에서 배운 야비한 잔기술로 A를 모욕했다.

사실 A는 B의 집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싸한 기류를 감지했다.

처음에는 착각했거나 오해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B가 나를 편하게 여긴 나머지 짓궂게 장난친다고 믿으려 했다.   


하지만 A의 무의식은 이미 알고 있었다.

B가 얄팍한 수를 쓰면서 요리조리 공격하고 있다는 것을.


30분 전만 해도 B는 A한테 불퉁거렸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들 앞에서 A에 대해 논한다?

그것도 웃으면서?

부자연스러웠다.

A에 대한 호의가 출발선이 된 행동은 아니었다.


B는 핀잔과 농담을 방패 삼아 상대를 조롱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A가 반격할까 봐 걱정했는지 어설픈 웃음으로 방어벽을 만들었다.

악의를 희석하려고 나름대로 안간힘을 썼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직관은 칼끝처럼 날카롭다.

B가 숨기면 숨길수록 악의가 더 선명하게 보인달까.

A는 침묵을 선택했지만 B를 보면서 정색했다.


며칠 전 A가 약속을 미뤘을 때, B는 무미건조하게 반응했지만 속으로 무척 분노했다.

A가 먼저 만나자고 해놓고, 먼저 약속을 취소했다.


B는 의도치 않게 아쉬운 입장이 된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다.

아무렇지 않다고 스스로 세뇌했지만 불쾌감이 밀려들어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A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해맑게 다가오니 더 얄미웠다.


A는 B의 무례함에 혼란스러웠다.

아까 음식 이름 따위를 말할 때도 짜증이 묻어나더니.

방금 또 괴랄한 농담을 던지며 작은 악마새끼처럼 굴고 있다.

뭐지, 이 사람?

하지만 B가 실실거리면서 농담이라는 제스처를 취하니 화내기도 애매모호했다.


만약 누군가가 농담이 과하다고 지적했다면 B는 목소리 톤을 높여 항변했을 것이다.

어머, 그랬구나.

편해서 그런 건데.

기분 나빠할 줄 몰랐어.

진담처럼 ‘들렸다면’ 미안해.


A는 B가 작정하고 삐뚤어지는 게 영 꺼림칙했다.

인사할 때도 내 눈을 보지 않았다, 그는.

A는 본인의 촉이 맞는지 재차 확인하려고 일부러 주방으로 가 B에게 말을 걸었다.

A의 테스트(?)에 화답이라도 하듯 B는 감정을 여과없이 드러냈다.


불친절한 상대에게 친절하게 반응하면 공격할 빌미를 제공하는 격이다.

만약 처음부터 A가 혹시 서운한 게 있어서 그러냐고 물었다면 B가 더 이상 도발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A는 상대의 마음을 알아도 모른 척했다.

B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서운함을 꽈배기처럼 비꼬아서 전달했다.


오히려 기도할 때는 B가 살짝 이상했다.

B는 A가 기도를 먼저 시작하고 나서야 기도의 운을 띄웠다.   

대화할 때 어쩌다 서로 아무 말도 안 하는 순간이 생겨도 마찬가지였다.

네가 말할 때까지 나는 계속 기다릴 거라고 시위하는 것처럼 그는 가만히 있었다.


A는 B가 말할 때까지 기다릴 이유도 없고, 할 말이 다시 생각났다.

그러니 차가운 공기를 깨뜨리는 사람은 늘 정해져 있었다.

A가 발랄하게 대화의 서두를 열 때 B는 시치미를 뚝 떼고 얘기를 시작했다.


자잘한 순간에 기싸움을 거는 이유가 뭘까.

중립적인 침묵의 순간에 불필요한 경쟁의식이 발동했던 걸까.

먼저 목소리를 내면 타인에게 조종당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상대방이 먼저 말하도록 '유도'하는 쪽은 B였다.


B는 모른 사람들에게 비슷하게 반응했을 것이다.

A처럼 다른 이들도 B의 기싸움을 시덥지 않은 것으로 치부했을까.

아니면 괘씸해서 기싸움을 받아줬을까.


대립보다 평화가 낫다고 여긴다면 아예 B를 요주의 인물로 찍고 의식적으로 피했을지 모른다.

내가 잘 지내고 싶어하는 누군가가 적개심을 드러낼 때 자존심이 팍 상하면서 손을 놓게 된다.

나를 경계한다는 뜻이니 마음을 거두게 되는 것이다.


결국 B의 기싸움도 경계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상대를 편안하게 여긴다면 굳이 소소한 일에 조종하려고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좌우지간 B는 A를 은근슬쩍 조리돌림했다.

문제가 없는데 문제가 있다고 우겼다.

이게 바로 가스라이팅이다.

가스라이팅은 누군가가 사인펜으로 사진에 먹칠하는 것과 흡사하다.  

사진에 심술을 부린 범인이 되려 사진이 이상하다고 주장한다면?

사진사가 풍경을 잘못 찍었다고 불평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상황인가.


사진은 멀쩡하다.

먹칠한 사람이 이상한 것이다.  


A는 B와 견고한 신뢰관계를 형성했다고 생각했다.

설령 서운할 일이 생겨도 가감 없이 얘기할 수 있는 사이라고 믿었다.


무엇보다 약속을 일부러 어긴 게 아니었다. 그날의 일을 해프닝으로 여겼다.  

B가 마음에 담아둘 줄 몰랐다.


지금 B는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가시를 세운 채 돌격하고 있었다.        

A는 B의 이상야릇한 태도를 감지했지만 동시에 판단력의 스위치를 자체적으로 꺼버렸다.

B의 악의를 인정하면 그동안 쌓아 온 신뢰까지 부정해야 할 것 같았다.  


서운한 일을 직접적으로 얘기하지 못하고 엉뚱한 걸로 꼬투리 잡는 것은 평범한 에피소드다.

서운하다는 속마음을 말하기보다 괜히 엄한 일을 핑계 삼아 성질낸 적 있지 않는가.

그리고 친한 사람끼리도 때로 마음이 어긋나 갈등한다.

정말 어디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게다가 A와 B는 나이 차이도 꽤 난다.

평소에 B는 본인이 나이가 많다고 은근히 강조했다.

나이가 많아서 어떤 일이 닥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고 자부했다.

물론 사실은 아니었다.

하여튼 그가 어른 대접을 요구했던 마당에 A의 난데없는(?) 거절은 상처가 될 법했다.

하지만 그동안 봐온 B의 행동을 감안하면 단순히 이 사건 하나로만 그런다고 단정 짓기 힘들었다.

언젠가부터 B가 태도를 서서히 바꿨기 때문이다.


초반에 B가 A에게 우호적이었다.

A의 얘기에 공감하면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알렸다.

심지어 그 자신도 눈물을 글썽거리며 힘든 일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런데 몇 개월 전부터 B가 마음에 걸렸다.   

B가 예기지 못한 포인트에서 A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분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막역한 사이라면 자기 검열이 느슨해져서 날 것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상대가 편해져서 본심을 꾸미지 않고 드러내는 것과 B가 인상을 찡그리는 것은 양상이 좀 달랐다.


B는 대본 속 캐릭터를 구현하는 연기자처럼 굴었다.

콩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비난하는 팥쥐나 뺑덕어멈처럼 갑자기 뾰족하게 돌변할 때가 많아졌다.


B는 A를 포함해 다른 사람들과 실컷 놀고 나서 그와 개인적으로 대화할 때는 정색하기도 했다.

너는 왜 그 사람하고만 놀아?

특정인하고만 많이 대화한 게 문제였다는 것이다.

B는 정말 너무하다며 A를 원망했다.


그날 만났던 이들 중에서 그나마 A와 비슷한 또래는 한 명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사람과 마주 보고 앉아서 이야기할 기회가 더 많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원래 다들 친밀하게 느끼는 대상과 더 많이 대화하지 않나?

보통 자연스럽게 여기는 현상도 B는 무겁고 심각한 관점으로만 해석했다.


그때마다 A는 표현하지 않았을 뿐 난감했다.

그렇다고 B가 매번 그런 것은 아니었다.

간간이 예전처럼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까칠해졌다.

온탕과 냉탕을 오가듯이 낄낄대며 웃다가도 순식간에 울상을 짓고 찡그렸다.


처음 알게 된 사람에게 나르시시스트는 온유하고 관대하다.

하지만 그들은 본심을 반대로 표현할 때가 종종 있다.  

겉으로 웃으면서 속으로 딴생각하는 족속이 바로 나르시시스트다.


아직 상대를 경계할 때 그들은 착하게 군다.

하지만 둥글둥글하고 인내심 많은 사람으로 판단하면 그제야 본색을 드러낸다.

이런저런 이유를 명분 삼아 타인을 하대하기 시작한다.


그런 와중에도 틈틈이 자신이 대단하다고 자랑한다.

남을 무시하는 주제에 본인은 존중받기를 바란다.

아니 존경과 굴복에 가까운 반응을 이끌어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만약 상대가 나르시시스트의 바람대로 따라주지 않으면?

상대는 곧바로 나르시시스트의 적으로 호명될 것이다.


그런데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대개 사람들은 화를 낸다.

나르시시스트의 손가락질을 받아 줄 사람은 많지 않다.

내가 만난 나르시시스트들은 항상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었다.

그들은 적을 골탕 먹이려고 소소한 작전을 짜고 실행하면서 악마의 웃음을 질질 쌌다.


심지어 타인을 괴롭히는 걸 자랑스럽고 대견하게 여겼다.

본인이 어떤 방식으로 남을 괴롭혔는지 자세하게 설명하는 인간도 있었다.


그들은 불타오르는 증오를 연료 삼아 복수의 철길을 쉴 새 없이 달렸다.

남을 혐오하는 것도 나름대로 시간과 정성을 쏟아야 한다.

남에게 못되게 굴어서 타격을 주려면 어떻게 행동할지 연구해야 한다.

그러니까 제대로 미워하면 미워하는 당사자부터 힘들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는 본인이 품은 증오에 베이고 찢겨도 별 감흥이 없는 듯했다.

그들은 진흙 속에서 뒹구는 데 익숙해진 것 같았다.


꼭 모든 상황에서 온몸을 진흙으로 범벅하고, 그 진흙을 남에게 처바르려고 난리 칠 필요 없다.

반드시 타인을 공격하고 내 입장을 고수하며 울부짖어야만 싸움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다.

나르시시스트는 그걸 모른다.


나르시시스트의 말만 들으면 세상은 온통 자신을 하대하고 오해하는 인간들 뿐이다.

타인을 적극적으로 무시하는 대표주자가 바로 나르시시스트 자신인데 말이다.  

의존적인 나르시시스트는 다른 사람의 반응을 통해 자신의 규정한다.

그가 스스로 자존감을 높이는 단계를 밟을 때면 사람들 앞에서 의도적으로 호통을 친다.

자신의 건방짐을 남들이 받아주길 기대한다.


다른 사람이 나르시시스트의 패악을 받아준다면?

그럼 나르시시스트는 본인을 대단한 인물로 칭송하라고 기세등등하게 요구한다.  

비현실적인 기대의 결과는 파국인데 말이다.     


언젠가 B는 A에게 왜 아르바이트를 안 하냐고 따지면서 짜증 낸 적이 있다.

아르바이트를 하든 하지 않든 A가 자유롭게 선택할 사안이었다.

B는 거들먹거리면서 덧붙였다.


예전에 내가 말했잖아.

네가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따라서 내가 할 말이 달라진다고.

내가 볼 때는 네가 아르바이트를 할 마음이 없어 보여서 말하는 거야.


A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은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은데 못 하는 건지, 아르바이트를 할 생각이 없는 건지 B가 무슨 수로 알겠는가.

아르바이트를 할지 말지에 대한 얘기를 꺼낸 적도 없다.  


무엇보다 B가 A의 사적인 영역을 간섭할 어떠한 자격도 없었다.

제3자의 입장에서 B가 자신이 뭐라도 된다는 듯이 호통치는 것 자체가 너무 웃기는 일이다.

다만 A는 그것조차도 B의 인간적인 관심으로 생각했기에 묵인했을지 모른다.


나르시시스트는 의식적으로 선 넘는 충고와 비난을 일삼는다.

그가 타깃에게 가장 먼저 시도하는 행위가 바로 지적이다.

가장 쉽고 빠르게 타인을 옥죄는 수단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에게 정말 잘못된 사람이라는 메시지를 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본인의 단점을 마치 남의 단점처럼 읊조릴 뿐이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인격적 결함을 지닌 사람은 나르시시스트다.


나르시시스트가 입에 거품을 물면서 비난하는 것은 남을 통제하기 위해서다.

상대의 반응을 살피고 앞으로 어떻게 대할지 가늠하기 위해서다.   


만약 우리가 그의 선 넘는 행동을 허용한다면?

나르시시스트는 고삐 풀린 말처럼 더욱더 무례하게 나온다.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성향을 지닌 B는 부정적인 감정에 자주 매몰됐다.

불평과 불만이 마음에서 끊임없이 올라왔고, 결국 입 밖으로 그것들을 내어야 직성이 풀렸다.


한 마디로 B는 까칠했다.

모임에 사람들이 참석하도록 독려하는 역할을 맡고 있기에 섣불리 본색을 드러내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B는 거절감에 취약했다.


모임에 나오라는 요청에 상대가 아무런 반응이 없을 때.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반박하거나 지적하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이런 순간이 그가 유난히 힘들어하는 상황이었다.  

A가 엉겁결에 약속을 깬 것은 B의 약한 부분을 건드린 셈이었다.


그동안 A는 B의 말에 동조할 때가 많았다.

B가 마음을 다치거나 서운해할 일이 별로 없었다.


타고난 성정이 생선의 가시처럼 뾰족한 사람은 본성을 참는데 한계가 있다.   

B도 본인의 예민한 성품을 의식해서인지 자신을 이렇게 표현하곤 했다.  


나는 비판할 것만 봐.

나는 의심이 많아.


A는 B가 자진 납세하듯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 구구절절 설명하는 걸 이상하게 생각했다.

나보고 어쩌라는 건가 싶었다.

괜히 민망해서 웃음이 나기도 했다.

나르시시스트는 본인을 마케팅하려고 노력한다.  

나는 최고라고 대놓고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B처럼 은근히 돌려서 나는 특별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나르시시스트는 의식적으로 이상적인 자아를 흉내 내며 타인의 칭찬을 과도하게 구걸한다.

상품을 마케팅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보편적인 의미의 마케팅과 차이점이 있다.

나르시시스트의 광고는 허위라는 점이다.


상당수의 나르시시스트들은 자신의 지적 능력을 과신한다.  

백발 양보해서 정말 개중에 뛰어난 인물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 나르시시스트들의 지성의 깊이는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뛰어난 사람들이 아니라 뛰어난 사람들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부류였다.

심지어 가르치는 것을 자신의 숙명이라고 여기는 나르시시스트도 있었다.


어떤 나르시시스트는 큰소리쳤다.

나는 가르치는 거 좋아해.

나는 좋아하는 사람한테 마구 조언하거든.


그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나는 남들보다 아는 게 많다는 거였다.

납득하기 힘든 주장이었다.


서로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끼리 모인 자리였다.

당연히 사람들은 나르시시스트가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다.

아무도 그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았다.


가르친다는 건 뭘 알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뭘 아는지 나르시시스트 자신도 모른다.  


비판은 ‘내 잘 알아. 그래서 알려주는 건데 너 그러면 안 돼.’라는 뉘앙스를 내포한다.

B는 타인을 비난한다면 똑똑해 보일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한 적이 있다고 자랑스럽게 늘어놨다.

그런데 그가 남의 의견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진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사람에게 지나치게 두려워해서 공격받기 전에 공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확실하게 보여줘야 남들이 건드리지 못할 거라고 믿었다.


미리 자기 영역을 확보하려고 '지적'이라는 도구를 썼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르시시스트에게는 자신의 타박을 받아 줄 희생양이 필요하다.


B는 남들이 조금만 서운하게 대해도 일방적으로 당했다고 인지했다.

사람들이 자신 앞에서 눈치도 보고 쭈뼛대면서 비위 맞추는 말도 해주길 바랐다.


상대가 호의를 보이면서 꼬박꼬박 존댓말을 써도 B는 반말 쓰지 말라고 선을 긋는 걸 봤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나한테 반말을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반말 쓰면 좀 그렇다고 진지하게 말했더니 나를 '어려워하더라고'.

그는 불필요한 예시를 소상하게 설명하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아마 상대편은 B가 너무 방어적이라서 친해지기 힘든 사람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나는 권위적인 사람이야,  

B가 스스로를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감정 없이 자신의 특색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권위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은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누구나 인정받길 원하지만 나르시시스트의 인정 욕구는 과하고 비정상적이다.


권위적인 사람은 타인의 굴욕적인 복종으로 자존감을 얻는다.

남의 자존심을 야금야금 까먹다가 상대가 자존심을 되찾으려 공격하면 달아나버린다.

재밌는 건 나르시시스트가 다른 사람의 권위적인 행동은 몹시 싫어한다는 사실이다.

나르시시스트는 ‘거꾸로 사고력’을 지녔다.

마음이 건강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일상을 누리다가 비판할 점을 발견한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는 비판하거나 지적하는 역할을 도맡고 싶어서 억지로 그런 점을 찾아낸다.

이게 바로 ‘거꾸로 사고력’이다.


그가 격분하면서 비난하는 말은 이상하게 앞뒤가 안 맞거나 궤변인 경우가 많다.

나르시시스트는 멋있어 보이려고 타인의 흠을 억지로 찾아내 확대해석한 다음 과하게 비난한다.   


상대가 이상하다는 결론을 미리 내리고, 그 결론을 정당화할 명분을 찾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르시시스트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나르시시스트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확인하려 든다.    

특히 성격이 유순하고 호응을 잘해주는 사람 앞에서 그는 물 만난 고기처럼 눌러왔던 인정욕구를 폭발시킨다.  


웃어주는 사람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비하하는 것도 나르시시즘적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서다.

나르시시스트는 남을 무시하는 주제에 자신을 존중해 달라고 심지어 존경해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하는 셈이다.  


그러니까 나르시시스트의 무관심을 보이거나 덤덤하게 응답하라.

당신의 교만하고 허황된 말을 들어줄 여력이 없다고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의 시선을 과도하게 의식하기에 본인의 이미지를 설정하는 데 공을 들인다.

그러다 보니 얘기의 초점을 ‘자기 어필’에 맞추게 된다.


특히 나르시시스트는 본인의 지적 능력을 과신한다.   

그래서 타인의 의견이나 생각을 깔아뭉개거나 무시하는 말을 습관적으로 내뱉는다.  


나르시시스트 성향을 지닌 C는 장래희망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생각하는 수준이 그 정도라서 그래.


C는 손바닥을 밑으로 내리는 시늉을 했다.

그런데 C의 의기양양한 표정이 재밌었다.

마치 자신은 대단할 걸(?) 깨달아서 다 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떤 직업을 가질지 고민하는 건데 ‘수준’이라는 개념을 떠올린 C의 수준은 무엇인가.  

나르시시스트가 정의하는 ‘수준 높은 생각’은 과연 무엇일까.

그가 남을 비하하는 내용은 대체로 모호하며 추상적이기에 실체가 없다.

혼자만의 세상에서 통하는 언어일 뿐이다.


나르시시스트가 나의 행동을 지적할 때 근거가 얼마나 탄탄한지 점검하자.  

내가 만난 나르시시스트들은 설명을 뭉뚱그려하거나 추상적인 관념만 나열하면서 열변을 토했다.  


내가 구체적으로 정확한 설명을 요구했을 때, 그들은 비논리적으로 항변하거나 버벅대면서 회피했다.

어떤 이는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겠다며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왜 놀래?).  


B도 나르시시즘적인 면모를 보이곤 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걸 본인이 객관적으로 판단해서 지적한다고 떵떵거렸다.   


그럴 때마다 A는 B가 다른 사람보다 내가 낫다고 과시하는 것 같아 불쾌했다.

또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가르친다 어쩐다 호방한 척 자신을 과시하는 B가 우스워보이기까지 했다.


나르시시스트는 자기 안의 두려움을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내가 착해 보이니?

(나는 못돼서 남들이 나한테 함부로 못해)


이 말은 나르시시스트가 상처받을까 봐 두렵다는 뜻을 내포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스스로 강해 보여야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는다고 믿는다.

그의 이분법적인 세계관에서는 착한 사람은 약하고 못된 사람은 세다.


착해 보이냐고 되묻는 것은 답을 정해둔 질문이다.  

결국 타인에게 나를 못된 사람처럼 봐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사실 나르시시스트는 무의식적으로 본인이 유약하다는 사실을 안다.

희생양을 부하직원 대하듯이 구박하는 것도 자기 보호본능이 발동해서다.   


그들은 만만한 대상에게 마구잡이로 스트레스를 풀면서 원하는 이미지를 연출한다.

또 미리 방어막을 쳐야 남이 공격하지 못할 거라고 여긴다.   

직장에서 나르시시스트 상사를 만난다면 피곤한 일을 겪게 된다.

그는 본인을 증명하려고 시시콜콜한 이유를 들이대며 신입사원을 괴롭힐 것이다.

입만 열면 수도꼭지에서 물이 흘러나오듯 불평과 불만을 쏟아낼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누가 언제 나를 해칠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비정상적인 경계심을 느낀다.

그에게 세상은 적이 가득한 곳이다.

최선의 방어는 최선의 공격이라고 믿기에 나르시시스트는 의도적으로 화를 내고 칭찬을 하고 또 화를 낸다.    


물론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한다.

인간의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누구도 겉만 보고는 장담할 수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로 약간의 경계심과 적절한 거리감으로 관계를 설정하고 살아간다.

타인에게 기본적인 신뢰감은 있지만 ‘선’을 지키는 것이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는 인간을 철저하게 불신한다.  

그는 타인을 적, 경쟁자 혹은 복종할 대상으로만 본다.   


그래서 사람과 소통할 때도 지배하거나 지배당하거나 두 가지 노선 중 하나를 탄다.   

남을 통제한다면 비정상적으로 의기양양해지고, 남에게 통제당하면 순한 양처럼 비굴하게 고개를 숙인다.


나르시시스트는 단순하고 원시적인 시선으로 사람을 바라본다.

성별, 나이, 지위 등 몇 가지 표면적인 조건으로 전체를 판단하는 것이다.

입체적인 인격체를 평면도로 받아들이니 사람에 대해 피상적으로만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동물적인 본능 즉 강약약강의 태도로만 살아가는 것이다.

강약약강의 태도가 나르시시스트에게는 정의다.


나르시시스트가 불안감을 쉽게 느낀다.

적진 한복판에서 적이 공격할까 봐 노심초사하는데 평안하고 안정적인 마음을 가지는 건 무리일 것이다.

힘의 논리에 쉽게 굴복하는 그들은 불이익을 안 줄 것 같은 상대에게 스트레스를 푼다.

머리끝까지 화가 나면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을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가.

그렇게 감정적으로 고조되는 상태가 바로 나르시시스트의 컨디션이다.

매일 누군가에게 분노를 쏟아내지 않으면 그는 바늘에 찔린 풍선처럼 팡하고 터져버릴 것이다.


B는 비판받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누군가로부터 끊임없이 비난을 받으며 자라왔다.


무수하게 쏟아지는 지적에 B는 많은 상처를 받았다.

그는 마음을 다치고 싶지 않아서 무엇이든 완벽하게 해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용을 써도 날카로운 비판은 쏟아졌다.

만약 검찰에서 누군가를 범인으로 만들기로 정해두고, 요식행위로 수사한다면 결과는 뻔하지 않겠는가.


비판의 그물에서 B가 스스로 벗어나기는 힘들었다.

그는 반복되는 절망 속에서 자존감이 훼손됐다.

그래서 아픔을 극복하는 차선책으로 ‘비판하는 사람’이라는 제2의 정체성을 만들어냈다.


어른이 돼서도 B는 여전히 남들에게 책잡힐까 봐 늘 주변을 살피고 경계했다.

서운한 일이 생기면 상대에게 이를 갈고 보복해야 직성이 풀렸다.

자신을 치기 전에 내가 비난하고 지적해서 주도권을 잡으려고 애썼다.


그래서 B는 대인관계가 늘 어려웠다.

그에게 대화란 자신이 이겨야 하는 주도권 쟁탈전이었다.

전쟁이자 싸움이었다.

남들과 대립해서 이겨야만 불안감이 가셨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남의 이야기를 듣다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생기면 공격적으로 반박하는 일이 많았다.  

B는 사람들과 선이 확실한 상하관계를 맺어야만 안심했다.

과도하게 예의를 갖추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해야 만족스러웠다.  


상대가 자주 웃거나 질문을 하면 나를 만만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불쾌해졌다.

무시당하는 것 같아서 자존감이 내려갔다.

기분이 나쁜 원인을 다른 사람 탓으로 돌렸다.


그럴 때마다 B는 무인도에서 살아남으려고 홀로 고군분투하는 심정이었다.  

B는 타인의 반응에 일일이 신경 쓰며 힘겨루기를 했다.

일부러 다른 사람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네가 상상력이 풍부해서 잘못 생각했나 봐.

네가 이해를 잘 못하는 것 같은데?


평가하는 것 같지만 실상 상대를 깎아내리면서 말을 했던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당사자가 난처해하거나 얼굴이 벌게지며 B는 어깨가 으쓱해졌다.

과거에 지적을 받으며 기죽었던 초라한 자아가 고개를 드는 느낌이랄까.  


그는 겉으로는 웃으며 지내더라도 단점을 지적받을 수 있다는 공포감에 휩싸였다.

물론 뚜렷한 근거가 있는 상황은 없었지만 의심이 스멀스멀 올라왔던 것이다.   


마음에서 두려움이 올라올 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비판할 것만 봐.


그는 이런 뜻을 전달한 셈이다.


나는 비판받는 게 두려워.

다른 사람에게 지적을 받으면 내 자존감이 확 떨어져.

네가 나를 비판하면 나는 크게 상처받을 거야.

그러니까 나를 봐줘.  


B는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했던 경험을 무용담처럼 말하는 것을 즐거워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무언가 많이 안다는 느낌을 받아서였다.

그리고 남들에게 도움을 주는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비판은 B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자 본인을 방어하는 무기였던 것이다.

그런데 A가 본의 아니게 B의 발작버튼을 건드렸다.


B는 남보다 우위에 있어야 안심했다.

그는 자존감이 낮았다.

그래서 타인의 반응이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남들이 자신을 꼬박꼬박 선배라고 부르면서 충고를 새겨듣는 모습을 보면 뿌듯했다.

자신을 과도하게 존중하는 사람들을 통해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확립해 갔다.

하지만 A의 거절로 인해 B는 이 관계에서 스스로 낮은 위치가 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A는 B가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안정적이라고 믿었던 친구관계가 사실 불완전하고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는 걸 알게 될 때가 있다.

이런 사고회로는 일이 잘 안 되면 남의 탓을 하기보다 자신을 탓하는 사람의 특성이다.


괜히 친구의 진심은 그게 아닐 거라고 변호해 보고, 상대를 의심하는 자기 자신을 질책해 본다.

그럼에도 타인의 이면을 본 듯한 찜찜함이 가시지 않는다면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사람을 향한 믿음이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낸 허상을 바라본 것에 불과하다면?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거나 험담하면 무조건 내가 잘못했다고 해석한다.

상대가 성질을 내는 내막을 면밀히 살피기보다 내가 누군가의 감정을 건드렸다는 현상에만 주목한다.  

그래서 나를 하대하고 구박하는 타인의 태도를 지적하기보다 그들을 기분 좋게 해 주기 위해 노력한다.


지금 B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와 A를 대하는 태도가 확연히 달랐다.

A도 B의 변화를 직감했다.  


그렇다면 A가 할 일은 평소처럼 웃으며 B를 대하는 게 아니다.

B가 안면을 바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차라리 왜 그러는지 물어보는 게 꼬인 관계를 푸는 데 더 효과적이다.  

모든 상황에서 도덕적 잣대를 최우선 순위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못되게 구는 사람을 쉽게 미워하지 못한다.

사실 솔직한 감정이 올라와도 꾹 누른다.

오히려 그들이 얼마나 상처받았으면 나에게 독침을 쏘겠나 싶어서 불필요한 연민까지 느낀다.


각자의 삶은 저마다 고충이 있다.

그러니 서로 불쌍히 여기고 타인의 모난 부분을 감춰주는 것은 좋은 태도다.   

하지만 내 마음을 돌보지 못하고 이타심만 적극적으로 발휘한다면 상대의 악의를 잘못 해석하거나 현실을 미화시켜 바라보게 된다.  


A는 매사에 낙천적으로 반응하는 편이다.   

그래서 표면적인 관계에 불과했을 때 B가 불만사항을 말한 걸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관심으로 오해했다.

상대가 솔직하게 말하는 걸 보니 친해질 수 있겠다고 해석했다.


낙천적인 성격은 큰 장점이다.

역경에 부딪힐 때 특유의 긍정성은 큰 힘을 발휘한다.  


그들은 과거의 절망에 잠식되기보다 미래의 소망에 초점을 맞춘다.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해서 스스로 성장하는 길을 택한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불길함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는 경향이 있다.    

B가 노골적으로 신경질을 낸 것은 수동적인 공격이었다.  


사실 B는 A를 공격한다는 것을 들키면 본인의 평판이 떨어질 것도 염려했다.


사회성 있는 사람이라면 남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지 의식하며 행동한다.

남들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고 강조하는 사람일수록 좋은 이미지를 구축하려고 애쓴다.


그 모임의 리더 격인 B는 사람들을 통솔해야 했다.

B는 자신이 사람들을 도와주거나 이끄는 포지션이기에 늘 바른 모습을 유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 B는 A가 미워서 보복하고 있다.

물론 누군가를 악의적으로 놀리는 게 잘못됐다는 건 알았지만 자꾸 그 일이 신경 쓰이고 기분이 나빴다.  

B는 성인군자의 이미지를 챙기면서도 동시에 본인이 받은 상처를 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 두 가지 욕구를 충족시키는 가장 쉬운 방법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B는 상대를 비하하면서 농담이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나에 대한 조롱을 섞어 농담하면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덧붙이는 얄미운 십년지기 친구.  

지인들에게 내 험담을 잔뜩 해놓고, 내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고 변명했던 이중인격자 직장 동료.

일을 가르친다는 명분을 방패 삼아 신입사원을 괴롭히는 철딱서니 없는 사장.


그들은 어디에서 배웠는지 진짜 의도를 감추고 자신을 방어하는 수법이 다 비슷하다.

입 발린 말로 깨끗하지 못한 본심을 감추면 남이 속는 줄 안다, 순진하게.


B는 장로교의 문화를 화두로 던지면서 A의 행동이 우습다는 조롱으로 말을 맺었다.   

A를 무시하고 싶다는 욕구를 감추려고 기독교 문화를 평가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A는 B가 머리를 굴려가며 유치한 농담을 하는 게 황당했다.

B가 생각 없이 저급하게 말한다는 생각이 들어 화가 났다.  

사실 그 모습이 B의 실체에 더 가까운데 말이다.  


A는 누군가에게 노골적으로 미움받은 적이 별로 없었다.   

둥글둥글한 대인관계를 추구하기에 누군가와 대립한다는 것 자체가 낯설었다.

그는 B의 뾰족함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난감해할 뿐이었다.     

세상에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다.

좋은 일도 일어나지만 나쁜 일도 일어난다.

나를 선의로 대하는 사람도 있지만 악의로 대하는 사람도 있다.   


마음의 저울대에서 양쪽에 긍정과 부정을 균등하게 올려둬야 한다.

그래야 교묘하게 덫을 놓는 상대의 저의를 빠르고 정확하게 알아내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다.

우리는 누군가를 의심하거나 미워하는 일은 힘드니까 억지로 행복회로를 돌리기도 한다.


저 사람은 나쁜 의도로 말한 게 아닐 거야.

원래 저 사람이 본심은 착한데 어쩌다 보니까 실수한 거겠지.


누구든지 완벽하지 못하니까 내가 이해해야지.

어쩌면 나도 저 사람과 똑같이 행동한 적이 있었을지 몰라.


그들은 상대방이 노골적으로 못되게 말해도 화내기보다 일단 한 발 뒤로 물러선다.

당신의 불쾌한 태도가 잘못됐다고 말하기 전에 자신이 분노할 자격이 있는지부터 되묻는다.


오히려 나야말로 이들처럼 무례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하기까지 한다.  

좋은 태도지만 매사에 나에게만 화살을 돌려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책만 한다면 자기 자신을 잃게 된다.


착하고 이해심 많은 사람이 되겠다고 선을 넘는 무법자들마저 포용한다면 내가 존중받을 권리마저 뺏기게 된다.


상대방은 배려하는 나에게 고마워하기는커녕 노골적으로 무시하기 시작할 것이다.

양심이 무뎌져 죄짓기를 즐길지 모른다.


나답게 살기 위해서 나의 권리를 지켜야 한다.

죽었다 깨어나도 나는 나로서 살 수밖에 없다.

절대 잃어버릴 수 없는 유일한 가치는 자기 자신이다.


내가 존재해야 세상도 존재하는 법이다.

만약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세상이 그대로일지라도 의미가 없다.

하대를 하대로 호명하자.

차별을 차별로 호명하자.

텃세를 텃세로 호명하자.

무시를 무시로 호명하자.


타인이 나를 의도적으로 공격하는 상황을 간결한 문장으로 정리해야 판단이 수월해진다.


저 사람이 아까 일부러 나를 지목해서 안 좋은 말을 하는구나.

잘 지내다가 갑자기 안면을 바꾼 걸 보니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나 보다.

저 사람이 나한테는 단답만 하는데, 다른 사람들하고는 전화통화도 길게 하는 걸 보니 나랑 친해질 마음이 없구나.   

해설위원이 축구경기를 중계하듯이 실시간으로 상황을 분석하자.  

그래서 상대와 나의 관계를 점검하고 향후 어떻게 대처할지 선택하자.    

손절할지, 대화를 신청하고 사과를 할지 아니면 사과를 받을지, 괴롭힘 당한 걸 공론화할지, 한번 참고 넘길지 말이다.   


타인의 언행에 무반응으로 일관하는 게 때로는 덕이 된다.

하지만 상대가 사소한 일에 지속적으로 시비를 걸고 나를 넘어뜨리려는 술책을 모색한다면 가만히 있는 태도는 독이 된다.   

인간은 더 큰 자극을 쫓아 움직인다.

작은 괴롭힘은 심각한 괴롭힘으로 변질되기 마련이다.


잡초가 조금 자랐을 때 잡초의 뿌리까지 뽑아내야 정원을 제대로 관리할 수 있다.

애초에 은근히 삐딱선을 타고 어깃장을 놓는 사람을 오래 알고 지내봤자 나에게 유익이 없다.


그러니까 모든 상황에서 상대의 행동을 정확하게 판단하기를 미루지 말자.  

상대가 나를 대하는 태도를 분석해 구체적이고 명시적으로 이름을 붙이자.

내가 처한 상황을 더 잘 파악하는 지표가 될 것이다.


사실 인간은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누구나 바람에 쉽게 흔들리고 벽에 살짝 부딪혀도 부스러지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나를 미워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나도 구체적인 이유로 상대에게 거리감을 느끼거나 타인을 미워할 때가 있으니까 말이다.

착하다는 프레임에 스스로 갇혀 자기 자신을 갉아먹지 말자.

때로는 손발을 걷어붙이고 자존감 도둑의 얍삽한 행동을 꾸짖어야 한다.  

남이 조심성 없이 내뿜는 어둠의 기운을 직시하자.

그가 웃으며 말할지라도 내가 기분이 나쁘다면 문제가 생긴 상황일 가능성이 크다.


인간관계는 겉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누구든지 타인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전부 말하지 않는다.

적당히 마음을 감추며 살아간다.

남이 싫을수록 반대급부로 좋아하는 척 연기를 하기도 한다.  


게다가 감정이 상했다고 얘기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상대는 나를 이해를 못 할 수 있다.

남은 내가 아니니까 말이다.


듣는 사람은 오히려 별 것 아닌 일로 치부하면서 비난할 수 있다.  

그럼 속마음을 힘들게 말한 당사자는 2차 타격을 받는 셈이다.


어쩌면 B도 약속이 어그러져 기분 나빠하는 자신의 입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을지 모른다.

속 좁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들을까 봐 미리 수치심을 느꼈을 수도 있다.   


인간은 한 마디의 말에 한 스푼의 진짜 감정을 끼얹는다.

순간적인 제스처에 고이 숨겨 둔 부정적인 심리를 흘려보낸다.

그들의 말은 모스부호 같다.

분명 구체적인 메시지가 있는데 바로 알아차리기는 힘들다.


혼자 있을 때 상대의 저의를 자꾸 곱씹게 되고 불쾌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언행을 하나하나 복기해서 살펴야 한다.    


대화의 맥락이나 단어 속에 본심은 얼굴만 살짝 내민 채 숨어 있다.

퍼즐조각 모으듯이 상대의 말들을 수집해 서로 맞춰보면 내밀한 얘기를 발견할 수도 있다.

그런 과정을 반복하면 사람에 대한 의미 있는 데이터를 얻는다.

그런 데이터를 축적하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유익한 통찰력이 길러진다.  


B는 A에게 서운할 수는 있다.  

그렇다고 B가 보란 듯이 A를 희화화한 행동을 잘했다고 두둔할 수는 없다.   


B가 서운함과 보복감을 똘똘 뭉쳐 말에 얹혔다.  

A는 B의 행동에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긍정파워로만 가득 찬 사람은 상황을 세세하게 살피기보다 좋은 감정에만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불쑥 튀어나오는 도적에게 칼을 겨누려면 그에 걸맞은 준비운동을 해야 한다.


그러니까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촉’에 진지한 관심을 가져라.      

느낌일 뿐이라며 불길함을 외면하기보다 낯선 감정이 올라오는 원인을 감별해야 한다.


다음 날 B는 A에게 전화를 걸어 틱틱거렸던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과했다.


사실 어제 A가 떠난 뒤 B는 불안해졌다.

같은 모임에 계속 나오는 이상 A의 얼굴을 봐야 한다.

다시 만났을 때 A가 어떻게 나올지 그는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B가 성심성의껏 A를 공격했는데 정작 당사자는 반응이 없었다.  

A의 안색이 변했다면 차라리 B가 통쾌했을 것이다.   

하지만 A는 그의 행동을 빤히 보기 한 할 뿐 거기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내 심정을 눈치 못 채서 가만히 있는 걸까?

기분이 나쁜데 티가 안 나는 걸까?

B는 A의 진짜 속내가 헷갈렸다.

A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전화통화해 보니 A도 B가 이상해진 걸 알고 있었다.  

A가 속상했다고 말하자 B는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어제 A가 반응이 없어서 약이 올랐다.

그런데 자신이 공격했다는 걸 감지했다니 살짝 기뻤다.


너 때문에 내가 기분이 상했으니 나처럼 비참한 기분을 느끼게 해 줄 거야.

이런 비장한 결심에 걸맞게 행동하려고 노력한 결실을 보는 것 같았다.  


B는 A와의 관계에서 우위에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상대가 약속을 지키지 않자 스스로 약자가 된 것 같아 자존감이 낮아졌다.   

B가 여러 사람 앞에서 A를 험담한 것도 무너진 자존심을 세우는 과정이었다.

A를 공개적으로 놀려서 강자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어쨌든 A와 B는 화해했다.

통화 이후 다시 A가 B의 집에서 갔을 때, B는 A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친숙한 사이임을 과시하는 몸짓에 A는 불쾌감을 느꼈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의 본능은 언젠가 다시 발현되기 마련이다.

그의 사과는 그저 상대와 인연을 이어가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거기에 진심은 없다.


어제의 나르시시스트는 오늘의 나르시시스트이며 내일의 나르시시스트다.

B는 반성하는 척했지만 이후 A를 더 미워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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