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스트는 인간을 적으로만 인지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인간을 적으로만 인지한다.
적은 공격적이다. 남의 땅을 차지하려고 경계선을 넘어온다. 유리한 정보를 빼내려고 상대를 고문한다. 죽인다. 그래서 적은 두려움의 대상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인간을 두려워한다.
두려움의 근원은 사람에 대한 왜곡된 인지다.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을 독립된 인격체로 인식하지 못하고, 전투력이 탑재된 AI로 인식한다.
그에게 삶은 게임에서 반대편 캐릭터와 싸우는 상태와 같다. 그 안에서는 최선의 공격이 곧 방어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는 속마음을 감춘다. 수박 겉핡기 식으로 처세술을 부린다. 통제한다. 학대한다. 어떤 상대에게는 복종한다. 그게 나르시시스트의 생존술이다.
나르시시스트에게 세상은 무채색이다. 그는 상대의 희로애락과 생각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이는 공감성의 결여로 이어진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는 모욕감을 주는 것에 거부감이 없다. 오히려 그런 순간을 계획하거나 기다린다. 타인이 괴로워할수록 그는 뿌듯해한다.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줄 때 그는 스스로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고 자화자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는 착취적인 관계를 맺는다. 원래 악인은 악행을 좋아한다. 그 행동을 자주 하는 것은 그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의 정서적 학대는 폭언으로 발현될 때가 많다. 그는 상대의 외모나 지적 능력 등을 지적하거나 조롱한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자신을 끼워 넣어 비교한다.
대상에게 진짜 문제가 있어서 지적하는 게 아니다. 문제가 있어야만 하기에 억지를 쓰는 것이다. 사실 심각한 문제를 앓고 있는 사람은 나르시시스트인데 말이다.
나르시시스트 보편적인 관점에서 괴롭힘이라고 부를 수 있는 행동을 해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의 관점에서 게임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반대편 캐릭터를 이기려고 여러 가지 잔기술을 썼을 뿐이다. 그래서 타인을 배려할 이유가 없다. 역지사지할 필요가 없다. 이기면 그만이다.
미란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이렇게 규정했다.
나는 상대의 고칠 점만 봐.
듣기 난처한 이 말을 뒤집어 보자. 인간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영역에서 가장 크게 자존심을 다친다. 미란은 '비판'이란 개념에 큰 가치를 부여한다. 결국 그는 판받을 때 가장 크게 상처받는다.
사실 미란의 아킬레스건은 ‘비판‘이었다.
어린 시절 미란은 부모에게 무수한 지적을 받으며 자랐다. 대개 사소하고 자잘한 것들이었다. 어린아이라면 실수할 수도 있는 것들도 부모는 용납하지 못했다. 그가 잘하려고 애써도 부정적인 반응은 한결같았다.
왜 그것밖에 못하니.
커서 뭐가 될래.
아까 말했는데 또 이해를 못 했어?
으이그 정말 한심하네.
그걸 지금 잘했다고 나한테 말하는 거야?
이런 레퍼토리를 들을 때마다 미란은 쓸모없는 사람으로 전락한 것 같았다. 칭찬받으려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하지만 부모는 그의 성적에 만족스러워하지 못했다. 그는 지방의 모 대학에 들어갔다. 결국 공부로는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뭘 해도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기분이었다. 미란은 서서히 무기력해졌다.
세월이 흘렀다. 미란도 나이를 먹었다. 이제 그는 과도한 잔소리에 스스로를 자책하던 어린아이가 아니다. 사회적 지위도 생겼다. 허물없는 동기들과 순한 후배들도 만났다. 그는 평범한 성인처럼 보였다.
하지만 미란의 내면은 어렸을 적 미란과 달라진 게 없었다. 여전히 그는 불안했다. 사랑에 배고팠다. 여태껏 부모에게 나를 알아달라고 끊임없이 요청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그에게 사랑은 곧 상처였다.
그래서 미란은 스스로를 냉소적인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사람이 다 그렇고 그런 존재이니 나는 결코 기대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세상 물정을 잘 아니까 흔들릴 것 없다는 과장된 제스처였다.
하지만 이는 미란의 불완전한 거짓말이었다. 본인을 냉소적이라 해석한 것은 과거의 상처가 만들어 낸 방어기제였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자주 공격받았지만 그는 어렸기에 방어할 힘이 없었다. 신랄한 비난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힘들었다. 마음이 상처투성이었지만 결코 위로받지 못했다. 사랑을 구했었지만 처절하게 거절당했다.
미란은 과거의 자신을 수치스러워했다. 매번 볼품없는 인간임을 입증받는 게 힘들었다. 거절당하는 게 지겨웠다. 솔직히 무서웠다. 만약 또 거절당한다면 자존감이 땅바닥까지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사람을 대할 때면 늘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사랑받길 기대하면서도 거절당하는 것을 먼저 떠올렸다. 사랑보다 거절을 먼저 배웠다. 학습된 무기력이 그를 침체시켰다. 그래서 사람을 미리 미워했다. 그래야 살 것 같았다. 그는 저 사람과 멀어지더라도 아쉬울 것 없다는 마음가짐을 가지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했던 것이다. 거절을 당하려면 미리 대비해야 덜 다칠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양가감정 속에서 미란은 허우적거렸다.
결국 초라함에서 벗어나려고 미란은 자신을 ‘냉소적인 사람’이라고 정체성을 규정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랑받고 싶은 욕구를 외면하고, 사랑에 처절하게 거절당했던 자기 자신을 부정했다.
솔직하게 행동하면 다친다. 미란이 이해한 세상은 그랬다. 어느 정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어두운 면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다. 밝고 따뜻한 면이 분명히 존재한다. 빛을 가릴 때 어둠이 생겨난다. 그러니 빛이 먼저다. 빛을 자주 떠올리고, 어둠을 가끔 떠올리면 된다.
하지만 미란의 사고체계는 부정적인 쪽으로만 흘러갔다. 어릴 때부터 부정적인 반응에 반복적으로 시달렸다. 그는 과거의 그림자를 아직 극복하지 못했다.
미란은 자주 화가 났다. 스스로를 다혈질이라고 홍보했고 그런 성격을 인정받길 바랐다.
사실 미란은 상대에게 기대가 높았다. 존중을 넘어 존경을 받고 싶어 했다. 비현실적인 발상이었다. 기대치가 높으니 빠르게 실망하고, 크게 분노했다. 안 좋은 평가에 기분이 깊게 상했고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피해의식이 생겼다.
어느 날 미란은 직장에서 경기도 쪽으로 발령이 났다. 그런데 입사 후 사람들에게 안 좋은 평가를 받았다. 나이가 적은 몇몇의 사람들이 직설적으로 불만을 제기했던 것이다.
미란은 그때 받은 충격을 잊지 못한다. 모두에게 미움받는 것 같았다. 많이 당황했고 많이 울었다. 나중에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마음 한편에 흉터가 자리 잡았다.
이전 직장에서 미란은 꽤 좋은 대우를 받았다. 물론 그의 성격상 과거가 미화됐을 수는 있지만 말이다. 이곳은 너무 차가웠다. 적어도 미란에게는 말이다. 그는 존재감이 지워지는 게 속상했다. 그래서 사람들을 본격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너는 기분 나쁠 때 티가 나.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좀 그렇잖아.
너는 이해력이...
처음에 사람들은 당황했다. 할 말이 있는데 단념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상대가 찡그릴 때마다 미란은 기분이 좋아졌다. 찌그러진 깡통 같던 자존감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미란의 부모는 미란에게 엄격했다. 좋게 말해 엄격한 거지 터놓고 말하면 그건 정서적 괴롭힘에 가까웠다.
스무스하게 넘어가는 날이 없었다. 사소한 일에 크게 혼났고,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야단맞기도 했다. 미란은 억울했다. 부모는 그의 말에 공감하지 않았다. 웃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명령할 뿐이었다. 대화다운 대화가 힘들었다.
부모를 원망하던 미란은 부모의 행동을 그대로 답습했다. 그의 입장에서 부모는 강자였고, 미란은 약자였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당하기만 하는 아이가아니라는 걸 보여줘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부모의 태도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강자가 되고 싶을 때 가장 실천하기 쉬운 방법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강자를 모방하는 것이다.
미란도 마찬가지였다. 상대가 자신의 말에 상처를 받을 때마다 미란은 승자가 된듯했다. 여태까지 그는 패자였다. 늘 비난받았고 그때마다 주눅 들었다. 스스로 초라함을 느꼈지만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 이만 바득바득 갈았다.
미란은 그들을 보면서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들과 지금의 자기 자신을 비교했다. 구박덩어리 신데렐라가 공주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과거의 부모가 된 것만 같았다. 나는 이제 강자가 됐다고 스스로에게 도취해 속삭였다. 악마처럼.
특히 미란은 잘 웃는 사람들에게 반감을 가졌다. 나는 자꾸 신경질이 나는데 쟤들은 뭐가 그리 행복하지 싶었던 것이다.
미란은 심각한 생각에 젖어들 때가 많았다. 해맑게 사는 듯한 그들을 미란은 질투했다. 그런 사람들은 현실이 무겁게 받아들이는 미란을 우스꽝스러운 사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밝은 사람들을 은근히 무시하면서도 묘하게 그들을 닮고 싶어 했다.
미란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저들이 순수하다고 결론지었다. 미란은 저 사람들보다 내가 더 고생했기에 뭘 좀 안다고 경솔하게 판단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미움이 살짝 사그라들었다. 즐겁게 웃는 사람들이 우습게 느껴졌다.
미란은 마음에 안 드는 대상에게 곧잘 폭언을 했다. 초등학생 같다느니 이해력이 딸린다느니 수준이 낮다느니 하는 말을 거침없이 토해냈다. 길거리에 침을 뱉는 듯한 태도였다.
사람들은 당황했지만 그에게 특별히 충고하진 않았다. 대신 말없이 떠나가거나 크게 화를 내고 손절했다.
미란은 버림받는 것 같았지만 곧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다. 나는 할 말을 했을 뿐이다.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가 미란을 불렀다. 평소 정색하지 않던 그였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미란에게 막말하지 말라고 크게 화를 냈다.
미란은 충격을 받았다. 그래도 사과하는 게 싫었다. 지는 것 같았다. 자신이 애써 구축한 서열이 무너질 것 같아 두려웠다.
그래서 미란은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고 버티면서 사과하길 거부했다. 그건 미란의 생존법이었다. 불타는 복수심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못되게 굴면서도 그들이 좋은 사람이라고 봐주길 원했다. 끝내 미란은 솔직한 감정을 말하지 않았다. 그저 도망갈 뿐이었다.
그래도 몇몇 사람들은 미란을 아꼈다. 미란은 곁에 남은 사람들이 좋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들이 싫어했다. 미란은 타인의 언행을 편집증적으로 집착했다. 그러다 보니 점차 불만이 생겼던 것이다.
한편으론 불안했다. 초창기에 겪은 일들일 반복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들에게 마음을 여는 자신이 미울 때도 있었다. 어차피 저 사람들도 언젠가 자신을 버리고 떠날 거라는 의심이 들었다.
미란은 어린 시절 겪은 절망감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가장 상처를 준 부모의 행동을 그대로 답습했다.
그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나는 상대의 고칠 점만 봐.
무수하게 비판하던 부모님이 미웠지만 한편으로는 좋아했다. 부모는 부모니까 말이다. 마음이 안 좋아도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가끔씩 김치도 해오시는 부모님께 연민도 느껴졌다.
미란은 자신에게 가장 상처를 깊게 준 방식인 ‘비판’을 매개로 타인과 관계를 이어나갔다. 처음에 친근하게 굴었지만 속으로는 부정적인 마음을 쌓아갔다. 종교심으로 참아보고,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결국 미란은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터뜨리는 식으로 행동했다. 짜증을 내고, 핀잔을 주길 반복됐다. 공격을 받은 사람들은 떠나갔다. 하지만 미란은 자신의 탓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미란은 자신만의 스토리를 만들어 갔다. 나는 원래 성격이 비판할 점만 본다. 이게 결론이었다. 성격은 중립의 개념이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미란의 말에 화가 나더라도 그건 미란의 잘못이 아니다. 미란의 성격이 원래 그러니까 남들이 받아줘야 한다는 우격다짐이었다.
미란은 타인이 나를 어떻게 대우하냐에 따라서 자신의 가치를 가늠했다. 그래서 상대의 말투 하나 단어 하나에도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다 보니 갈등이 일어날 때가 종종 있었다.
나는 상대의 고칠 점만 봐.
이 주장의 맹점은 미란의 판단력을 입증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주관적인 생각에 불과하다. 그가 착각할 수도 있고, 오해할 수도 있다. 배경지식이 없어서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해 오판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나르시시스트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별로 의심하지 않는다.
고칠 점만 본다는 미란에게 누군가는 충고했다. 그건 미란의 주관적인 생각일 뿐이라고 말이다. 그 말은 객관적이라는 말을 좋아하는 미란에게 상처가 됐다. 미란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애쓰며 말했다.
(조금 망설이다가) 맞아. 나의 주관적인 생각... 뭐 그런 거지.
그럼 왜 그동안 객관적이라고 했어?
상대가 어이없어하며 물었다. 망설이다가 미란은 이렇게 해명했다.
그건 네가 생각하는 의미랑 좀 다른 거야. 나는 정보를 근거로 판단해서 그런 말을 한 거야.
이 주장과 비슷한 주장을 들어보자.
저는 걸을 때 오른쪽 다리를 먼저 내딛고, 왼쪽 다리를 먼저 내딛죠.
두 다리를 번걸아가면서 내딛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이다. 미란의 주장은 일 더하기 일은 이라고 진지하게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누구나 객관적인 증거 즉 정보를 기반으로 상황을 판단한다. 그는 당연시되는 통념을 새로운 발견이나 특별한 현상처럼 과장해서 설명했다.
처음엔 미란도 친절 헸다. 하지만 그의 성격상 작은 일에도 크게 반감이 생기고, 안 좋은 감정이 잘 지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정도 친밀해지면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아주 작게 말이다.
말투가 따지는 것 같아.
너 좀 살찐 것 같아.
옷을 왜 그렇게 입었어?
왜 저런 립스틱 색깔을 발라?
그러다가 상대의 내면을 무시하는 반응을 보였다.
너는 생각하는 수준이 왜 그래?
너는 이해력이...(한심하다는 듯이 말꼬리를 흐린다)
너는 왜 생각을 안 해?
너는 생각이 너무 많은 게 문제야.
너는 생각하는 게 주관적이야. 나는 객관적인데.
하하, 너는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것 같지만 사실 걔가 싫어서 일부러 나쁘게 말하는 거지?
흰 천에 잉크가 물드는 것처럼 가스라이팅의 범위는 점점 넓어지고 진해진다. 독소가 몸 안에 서서히 퍼져가는 형상과 같다.
그러다가 종국에 나르시시스트는 인격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자아정체성을 해체하려고 달려들기 시작한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다. 우리는 먹고 마시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목적을 위해 태어났다. 성취감을 중요하시는 것도 결국 특정한 목적을 이루고 싶다는 의미다. 나만이 이룩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의미 있고 유익한 목적은 삶을 풍요롭고 윤택하게 만든다.
그런데 스스로에게 부여한 과업을 수행하기 이전에 반드시 선행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다.
나의 영원한 단짝은 자기 자신이다. 유일무이하고 특별하며 소중한 나를 잘 정의 내릴 수 있어야 인생에 자부심도 가지게 된다. 나를 아는 지식이 충만해야 나를 잃지 않는다.
요즘은 나답게 사는 걸 강조한다. 그런데 나답게 사는 것도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가능한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나답게 살겠는가.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면 타인의 인생을 빌려 사는 느낌이 든다. 그런 이들은 겉으로 보이는 상황에 큰 문제가 없어도 만성적인 공허감에 시달린다.
마음을 달래려고 유튜브를 보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친구들과 놀러 다니고, 결혼하고 심지어 이혼도 한다. 그래도 여전히 허전함은 채워지지 않는다.
인간은 이 지점부터 본격적으로 번뇌하기 시작한다. 이 상황은 사막 한복판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이 갈증으로 목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는 것과 같다.
더 괴로운 것은 존재론적인 고통을 어느 누구와도 긴밀하고 구체적으로 나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의 얘기를 진지하게 들을 사람이 주변에 없다. 설령 있더라도 선뜻 입이 안 떨어진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고민을 말로 설명하는 게 막막하다. 그리고 진심으로 이해할 사람도 없어 보인다.
마음에 맺힌 괴로움을 해소하고 싶지만 뚜렷한 해결책이 안 보인다. 그리고 그 마음을 안은 채로 바쁜 일상 속에 파묻혀 하루하루 살아간다.
내가 누구인지 모를 때 이런 심적 변화를 겪을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평생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해 방황하다가 저녁에 지는 해처럼 인생을 마치기도 한다.
그런데 나르시시스트는 우리의 자아 정체성을 흔적도 없이 해체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가 애용하는 방법은 통제다.
인간은 주체적이다. 세상에 수동적인 사람은 없다. 수동적인 것처럼 규정되는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자유의지가 부여된 인간은 자발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결정한다.
그런데 나르시시스트는 인간의 고유한 영역을 함부로 침범한다.
영수는 고민 해결사를 자처하며 이렇게 실언했다.
너는 아직 객관적인 판단을 할 능력이 부족하니까 뭘 결정할 때 나한테 물어봐.
이 말은 상대의 생각과 감정을 통제하고 싶다는 뜻이다. 그는 상대의 사고를 좌지우지하면서 지배력을 경험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상대가 뜻대로 따라주지 않고 반대의견까지 내자 저런 말을 한 것이다.
정훈은 모 출판사의 이사다. 얼마 전 그는 신입사원이 보낸 이메일을 받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어떤 주제로 책을 만들면 좋을지 아이템을 보내보라고 했었다. 그래서 사원은 여러 개의 아이템을 정리했고 표를 만들었다. 주제를 정리한 설명 옆에 인터넷 주소를 기입했다. 클릭하면 해당 주제의 유튜브 영상을 볼 수 있다.
영상은 전달력이 빠르다. 글을 읽기 번거 거울 때 혹은 아이템을 추가적으로 파악할 때 도움이 된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정훈은 상처를 받았다.
그는 분노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사원을 빈 회의실로 조용히 불렀다.
정훈은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이성을 잃은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어른스럽게 행동할 작정이었다. 튀어나오는 감정을 애써 억제하며 물었지만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기 힘들었다.
지금 나 보고 저 인터넷 주소 클릭해서 들어가 보라는 거야, 일일이?
사원은 상대가 도통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갑자기 무슨 말이지. 대낮에 길을 가다가 바케스에 가득 찬 물을 맞은 느낌이었다. 그의 질문이 뜬금없다고 생각했다.
이전에 정훈은 이 회사에서 아이템을 발제하는 방식을 자세하게 설명한 적이 있다. 그는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하고, 단순한 말도 길게 늘이는 습관이 있었다.
그때 정훈은 아이템을 잘 알 수 있게 URL을 첨부하라고 두세 차례 말했다. 그래서 사원은 그 말을 그대로 지켰다. 보통 특정 내용을 반복한다는 것은 강조다. 그 내용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런데 지금 정훈은 본인이 말한 부분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사원은 정훈의 반응이 이상해서 상황을 짚었다.
아, 그런데 그때 이사님이 아이템 적을 때 URL을 같이 기입하라고 해서요.
이에 이사는 억울해하며 항변했다.
그건 내가 필요할 때 그 주소로 들어가 보겠다는 거야.
이 대화의 흐름에서 정훈의 답변은 핀트가 묘하게 어긋났다. 대화의 흐름을 다시 짚어보자.
정훈 : 왜 URL을 적었어?
사원 : 이사님이 적으라고 했습니다.
정훈 : 내가 필요할 때 보려고 URL을 적으라고 한 거야.
상대는 URL을 적은 게 문제라고 했다. 사원은 그런 지시를 내린 게 이사였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이사는 변화구를 던졌다. URL을 적으라고 한 이유를 말했던 것이다.
아이템 목록 중 좀 더 알아보고 싶다면 영상을 보겠다고 말한 게 맞다. 사원은 이사가 URL이 같이 있으면 좋다고 언급한 걸 기억했다. 그래서 이사의 바람대로 URL 첨부했다. 그럼 이사가 문제 삼은 상황은 사실 문제될 게 없다.
혹시 본인이 했던 말을 까먹었나 생각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방금 정훈이 내가 주소를 같이 보내달라고 한 게 맞다고 간접적으로 시인했기 때문이다. 주소를 적으라고 한 이유를 말했으니까 말이다. 그의 말을 종합하면 이렇다.
나는 URL을 넣으라고 말한 적이 없어. 그런데 URL을 넣으라고 말한 건 맞다. 내가 관심이 있으면 그 영상을 보려고 주소를 넣으라고 했었어. 하지만 네가 URL을 넣은 건 잘못된 거야.
이게 무슨 말인지 듣는 사람은 모른다. 말하는 사람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
본인이 URL을 넣으라고 말해놓고, 막상 URL을 넣은 문서를 보더니 불평을 한다. 그럼 정훈은 왜 상처를 받았을까. 그의 머릿속에 도대체 무엇이 떠오른 것일까.
그는 ‘감히’ 사원이 이사인 정훈에게 URL을 클릭하도록 ‘조종’하려 했다고 인식했다. 만약 내가 이 아이템에 관심이 있어서 URL을 클릭하면 나보다 직급이 낮은 사람의 ‘명령’을 듣는 게 된다. 정훈은 그게 싫었던 것이다.
정훈은 보편타당하지 않은 이유로 광분했다. 사원은 어떤 답변을 해야 할지 애매해서 난처해했다. 오히려 정훈의 심각한 얼굴을 보니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이 사람 도대체 뭐지?
나르시시스트는 앞뒤의 맥락에 맞춰서 논리적으로 생각하지 못한다. 그는 논리적으로 따지며 살지 않았다. 나르시시스트는 지적인 부분에 가짜 우월감과 진짜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
막상 실전에서 누군가와 말싸움을 하게 되면 궤변을 늘어놓는다. 인터넷 주소를 넣으라고 한 적이 없는데 인터넷 주소를 넣으라고 한 것 맞다. 이런 궤변을 늘어놓듯이 말이다.
나르시시스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과 타인의 대인관계에서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느냐다. 사원이 나에게 URL을 보내서 해당 영상을 보는 행동을 하도록 명령했다. 물론 이것이 정훈의 편집증적인 사고방식이었다. 그래서 정훈은 상처를 받았던 것이다.
나르시시스트의 인식체계에서는 그가 어느 누구에게 공격당해도 이상하지 않다. 적은 그저 적의 역할을 충실히 행했을 뿐이다. 방심하다 당하면 나만 손해인 거다. 이런 의식이 나르시시스트를 더욱 병들게 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적진의 한복판에서 적의 계략에 말려들지 않도록 사방을 경계한다. 수풀의 움직임에도 혹시 누가 있는지 총을 겨누고 위협해보아야 한다. 살아남으려면 적의 목을 선제적으로 쳐야 한다. 잔인하지만 생존의 문제다. 전쟁의 법칙이 그러하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는 방어적이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다. 그는 자신을 보호하려고 남을 공격한다. 나르시시스트는 매 순간 긴장하고, 때로 공포감에 압도된다. 그 압박감을 해소하는 창구로 그는 희생양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괴롭힌다.
영은은 방송작가다. 어제부터 사무실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이전에 그는 탐사보도 프로그램을 많이 다뤄보지 않았다. 아직 모든 게 어색하고 서툴다. 이런 현상은 자연스럽다. 공부를 많이 해야 하기에 부담감이 크게 생겼을 것이다. 모든 영역이 그러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영은에게 그보다 더 마음의 짐이 되는 게 있다. 바로 사무실 사람들이 영은의 위축된 모습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는 본인이 유약한 존재로 각인될까 봐 벌써부터 기분이 언짢다. 그래서 막내작가에게 엄포를 놓는다.
인터넷에 나온 신문 기사 좀 다 뽑아 줘. 양이 많아도 상관없어. 난 그런 거 안 무서워해.
영은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맨 뒤에 있다. 아무도 무섭냐고 묻지 않았다. 영은이 자발적으로 꺼낸 화두다.
넓고도 복잡한 탐사보도 분야를 심도 있게 취재해 글로 풀어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영은은 내가 잘 해낼 수 있을지, 과연 내 원고가 좋은 평가를 받을 것인지 등 여러 가지 걱정으로 심란했다.
지금 영은은 다른 이들의 시선을 과도하게 의식하고 있다. 그래서 실체 없는 대중을 만들어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의 삶에 별로 관심이 없다. 인상을 찡그린 그들이 타인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평가하는 것은 진지한 관심이라기보다 일회성 호기심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아니면 단편적인 정보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우를 범하고 있거나 말이다.
그리고 이 상황이 정말 두렵지 않다면 말로 드러낼 필요 없다. 스무스하게 넘기면 그만이다.
이 분야를 잘 모르니까 자료조사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러니 정보를 잘 파악하도록 기사를 많이 뽑아달라고 담백하게 전달하면 된다. 그런데 영은은 구태여 사족을 붙였다. 무섭지 않다고.
진짜 담대한 사람이라면 낯선 환경이 힘들고,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과도하게 부정하지 않는다.
익숙하지 않아서 자신감이 없는 것도 나보다 능숙해 보이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게 되는 것도 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 분야가 생소한 자신의 입장이 때론 난처하고 어색한 것도 다 그럴 수 있는 거다. 겸언쩍은 수는 있어도 부끄러운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영은은 이런 상황에 흔들리는 자신이 수치스러웠다. 그래서 감추고 싶었다. 진심을 들킨다면 약자로 전락할 것 같았다. 그래서 영은은 남이 볼세라 표정 관리를 한다. 당황스러운 순간에 오히려 목소리를 높이거나 화를 낸다.
그는 자신의 입지를 두고 사람들이 왈가불가하면서 무시할까 봐 겁부터 났다. 그래서 진짜 심리를 반대로 표현했다. 아무리 많은 양의 기사를 읽어도 무섭지 않다고 떵떵거렸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자기 자신을 만족스러워했다.
영은은 최대한 빠르게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무실에서 경력도 많고 나이도 많은 작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미 인정받은 사람들로 보였다. 그리고 팀끼리 견제하거나 경쟁하는 분위기도 잔존했다. 나도 한몫을 단단히 해내야 했다. 저들 못지않게 말이다.
그리고 영은이 오기 전에 다른 방송작가는 교체가 됐었다. 타의인지 자의인지 불분명했다. 어느 쪽이 됐든 앞선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질 높은 원고를 만들어야 하는 압박을 받았다.
또 어린 막내작가에게 일로써 본을 보여야 했다. 영은은 자신의 허술함과 무지함을 막내작가가 알면 선배로도 안 볼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어린 막내작가에게 배척당하는 장면을 상상하게 됐다. 현실에서 일어난 일도 아닌데 본인에게 서글서글하게 웃는 막내작가가 미워 보인다. 막내작가는 어처구니가 없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막내작가는 영은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는 존재다. 그는 막내작가가 자신의 치부를 발견하고 뒤에서 또 다른 막내 작가들에게 불리한 얘기를 퍼트릴까 봐 초조해졌다. 그래서 그를 통제하고 싶었다. 무섭지 않다는 말은 상대를 향한 기선제압이기도 했다.
영은은 이런 복합적인 심정을 그저 ‘나는 기사 양 많은 거 안 무서워해’로 일축했던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예민하다. 그는 타인의 언행에 자신을 향한 안 좋은 의도가 숨어 있을까 봐 불안해한다. 그래서 우리의 언행을 편집증적인 시각으로 관찰한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을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는 모든 사람에게 벽을 쌓는 악수를 둔다. 매사에 날카롭게 반응한다. 먼저 적개심을 내비치니 호의로 다가온 사람도 흠칫 놀라며 물러나게 된다. 나르시시스트가 자발적으로 적을 만드는 셈이다.
그는 상대에게 의도적으로 시비를 건다. 그리고 반응을 지켜보고 덜 센 적과 더 센 적으로 나눈다. 그런 다음 각 사람에게 맞춤형 싸움을 건다. 그다음 싸움에서 지게 되면 또 다른 희생양을 찾아 나선다.
나르시시스트에게 일방적으로 져줘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목적은 우리와 잘 지내는 게 아니다. 그는 화목함과 평안을 바라지 않는다. 다만 서열을 가리고 싶어 한다. 서열의 꼭대기에 있고 싶으니까 싸움을 거는 것이다.
희생양으로 선정된 그를 나르시시스트는 비열하고 잔인하게 괴롭힌다. 그 괴롭힘을 멈추게 하려고 부드럽고 유하게 설득한다면 나르시시스트는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저항할 것이다. 희생양이 나르시시스트의 이면을 해석하고 죄라고 정의하는 것 자체를 비웃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나르시시스트를 완벽하게 무시하거나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줘야 한다.
우리를 공격하거나 괴롭히는 존재는 분명히 있다. 언제 어디에서 그런 유형의 인물을 만날지 예측하기 힘들지만 나를 배척하는 사람은 언젠가 나타난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세상은 오로지 적으로만 구성되지는 않았다. 운이 좋게도 우리는 종종 좋은 사람들을 만난다. 세상에 꼭 나쁜 사람만 있지 않다. 따뜻한 마음으로 진심을 다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인생은 좋은 면과 나쁜 면이 공존한다. 또 전화위복이라고 나에게 안 좋은 일 같았지만 좋게 작용하는 순간도 있다. 때로 좋은 일도 나에게 안 좋은 영향을 줄 때도 있다. 알다가도 모르는 게 인생이라 딱히 나쁘다 좋다로 판가름하기 어려운 일들도 있다.
세계의 일부에서는 여전히 무력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멘탈 전쟁을 겪는다. 이는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지만 실존하는 싸움이다.
멘탈 전쟁에서 가장 극단적인 고통을 선사하는 것은 자기 자신과의 전쟁이다.
인간의 머릿속은 각양각색의 상념으로 빼곡하다.
과거의 기억과 트라우마, 미래에 대한 예측과 소망으로 가득 차 있다. 기존의 신념과 새로운 신념이 충돌한다. 과거에 들었던 제삼자의 비난과 평가가 수납장에서 질서 없이 뒹구는 물건들처럼 뒤얽혀 있다. 자기 자신을 자책하고, 실수와 잘못을 번복해 괴로워하던 나날들이 오래된 편지처럼 쌓여 있다. 언제든지 펼쳐 볼 수 있지만 선뜻 봉투를 열기가 망설여진다.
생각이 끝도 없이 밀려들어와 괴로울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생각 위의 생각이 겹쳐진다. 접히고 구겨진 생각들을 분류하다가 다시 섞어버린다. 과거의 기억, 미래의 불확실성에 고통을 받다가 아침의 해처럼 떠오르는 희망에 따뜻함을 느낀다.
평생 인간은 실존하는 자아와 대화하고, 싸우고, 반목하고, 화해한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색깔을 지닌 독립적 자아를 구축해 간다.
그러니까 전쟁은 뼈와 살처럼 삶에 밀착해 있다.
역사는 전쟁과 전쟁으로 탄생한 가계도와 같다. 잔혹한 투쟁을 거쳐 기어코 영토를 되찾은 이들의 생생한 증언을 들어보자. 전쟁이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 말이다. 얼마나 큰 상흔을 남기는지 말이다.
삶의 도처에서 발발하는 전투는 언제 시작될지 모른다. 끝나는 시점도 모른다. 영영 안 끝날 수도 있다.
이런 현실이 힘들어 매번 도망가면 회피형 인간이 되는 것이요, 이 사실을 인정하고 삶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하려 적극적으로 현실에 뛰어들면 돌진형 인간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직장도 난투극의 극한 현장이다.
화살을 쏘듯 말로 쏘아붙이는 직장 내 그 무리를 떠올려 보자.
그들은 나를 판단할 때 뚜렷한 기준은 없다. 내가 열심히 일하면 애사심이 투철하다고 빈정댄다. 아파서 결근하면 다른 동료에게 피해 준다고 병원이나 가라며 구박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휴가를 가야 한다는 이유로 지방 출장도 나에게 미룬다. 집에 놀러 온 친구랑 아침에 같이 출근하고 싶다며 이른 아침에 잡힌 공적 일정을 바꿔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한다.
자기들끼리 매일 아침마다 일층 카페로 쪼르르 달려가 커피를 마신다. 다들 일하느라 바쁜데 일이 없는 건지 일이 있는데 미루는 건지 모르겠다.
누군가는 표정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에어드롭처럼 전송한다. 나는 업무적인 내용을 전달할 뿐인데 그의 표정에 적개심이 묻어난다. 그래도 그가 복도에서 인사는 한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눈만 웃고 있다. 그의 눈 주변 근육이 얼마나 굳어 있는지 손거울을 비춰주고 싶을 정도다.
그들은 대개 집단을 이룬다. 그 안에서 암묵적으로 우두머리가 생긴다. 나머지는 그의 지휘 아래에서 특정인을 험담한다. 작은 북한 같다. 특정인을 향한 생각이 어쩜 그렇게 동일할까. 그들은 타인을 배척하고 모독하는 행위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경박하게 즐거워한다.
묘한 기쁨의 근원은 소속감이다. 타인을 배척하고 손가락질하면서 그들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나는 적어도 저 사람처럼 혼자가 아니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는 섣부르고 단편적인 판단이다.
그들 안에서도 그들의 생각에 동조하지 않는 누군가는 어차피 제외될 것이다. 플라스틱 우정에 금이라도 갈까 싶어 그들은 노심초사한다.
세밀하게 보면 그들끼리도 분열의 조짐이 있다. 일부는 뒤에서 또 다른 일부를 욕한다. 그러면서도 앞에서는 네 말이 맞다고 맞장구친다. 겉과 속이 다른 것이다. 그런데 그걸 대놓고 발설하는 사람은 없다.
사회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공동체에서 소외된다는 것에 어느 정도 비참함을 느낀다. 그래서 그들은 혼자가 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똘똘 뭉친다. 그것이 그들의 어리석음이다.
언제 어디에서 적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아군인지 적군인지 판가름하기 아리송한 유형도 있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요, 오늘의 적이 내일의 친구로 둔갑하기도 한다. 앞에서 헤헤 웃고, 뒤에서 딴 말을 할지 누구도 확신하기 힘들다. 확신해서는 안 된다. 타인을 마음 놓고 한없이 믿었다간 내 뒤통수가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맞다. 세상은 전쟁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이 현실을 관찰하자. 냉혹한 현실에 적응하자. 달려 나가자. 깨부수자. 나 홀로 척박한 현장에서 살아남으리라.
어차피 인생은 혼자다. 긴밀하게 연결된 타자도 있지만 결론적으로 타자는 내가 아니다. 나도 타자가 아니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든지 혼자다. 그러니까 혼자서 싸우면 된다. 폐허 속에서 한 줄기의 꽃처럼 존재하면 되는 것이다. 고독이란 쓴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시면서 단 한 명뿐인 나 자신과 전우애를 나누면 된다.
그런데 이토록 모진 전쟁의 사이클에 유난히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나르시시스트다.
은석은 교회 청년부 소속의 임원이다. 임원 모임에서 언젠가 자신의 성격적 특징을 설명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는 말했다.
저의 특징은 냉정함이에요.
저는 누가 한 번 저에게 잘못하면 끝이에요.
은석의 얼굴에서 신경질적인 표정이 묻어 나왔다. 평소에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심지어 다른 사람이 쌓인 눈을 피해 걷는 그 걸음걸이를 지적할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은석은 대인관계를 맺는 게 어려웠다. 사람들이 자신을 피하는데 원인을 몰랐다. 그의 특징은 냉정함이 아니었다. 그는 작은 일에도 부정적인 생각에 몰두했다.
예를 들면 단체문자에 답장이 없을 수 있다. 그런데 은석은 이런 걸 납득하지 못하고, 앙심을 품었다. 왜 답장을 하지 않냐고 묻는 게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 날이었다. 은석은 일부러 아몬드 초콜릿을 사서 모임에 나갔다. 그걸 유일하게 답장한 이에게 건네줬다. 다른 사람들이 다 볼 때 하사(?)하듯이 말이다.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은석의 샐쭉한 표정이 가관이었다. 평균 나이가 이십 대 중후반인 사람들이 그런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겠는가.
그런데 남들에게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만큼 은석은 자기 자신에게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내가 그렇지 뭐. 은석이 언젠가 한 말이다. 자신감이 없으니 오히려 남들에게 까탈스러웠던 것이다.
긍정형 인간이 되기란 생각보다 힘들다.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그대로 흡수하면 부정적 파도를 맞이할 확률이 크다. 그래서 생각을 관리해야 하는 것이다. 정원에서 잡초를 뽑듯이 새록새록 솟아나는 비관의 목소리를 정기적으로 다듬고 제거해야 한다. 그래야 마음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종교인들은 어떤 상황이든지 감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떠다니는 생각을 분별없이 받아들이다 보면 결국 부정적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의지적으로 긍정의 마음을 붙들어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전쟁 속에서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면서 최선의 길을 찾아야 한다. 최종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하지만 이런 전쟁을 유난히 힘들어하는 부류가 있다. 바로 나르시시스트다.
나르시시스트는 전쟁의 DNA가 없다. 전쟁을 일상으로 여기지 못하면 전쟁이 벌어졌다는 현실 자체에 함몰된다. 그래서 적을 찾아내고 공격하는 것에만 치중한다. 그게 삶이 된다. 정작 중요한 일은 나의 삶 자체를 잘 꾸려가는 것이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는 거대한 목표를 바라보기보다 사람 간의 자잘한 경쟁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싸움의 고수는 섣불리 찡그리지 않는다. 갈등과 다툼은 삶의 부분일 뿐이다. 그래서 일상을 살듯이 갈등의 파도에 자연스럽게 몸을 싣고 잘 해결하면 된다. 만약 사사로운 모든 자극에 일일이 반응한다면 정신적 에너지가 남아나지 않을 것이기에 큰 것 위주로만 해결한다. 나머지는 좋은 게 좋은 거다 라고 넘길 때도 많다, 솔직히.
하지만 나르시시스트는 선천적으로 그게 잘 안 된다. 그래서 그토록 희생양을 괴롭히는 것이다. 인생에서 받는 온갖 스트레스를 타인에게 투사해서 간신히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를 불쌍하게 생각해도 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악랄한 면이 있다.
설령 나르시시스트가 더 높은 성취에 골몰하고 더 높은 지위에 집착한다면 이 또한 적뿐인 세상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함이 주된 목적이다. 그는 끊임없이 비교의식에 시달린다. 경쟁자보다 우위를 점해야 하고, 또 잠재적 경쟁자들과도 대립해서 침범당하지 말아야 한다. 상대와의 서열을 구축하려고 갈등을 일으켜 정서적인 착취로 에너지를 얻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의 의식구조에 이렇게 짜여져 있다. 자기가 살려고 말이다.
다음은 전쟁을 두려워하는 나르시시스트가 실전 싸움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알아보겠다. 나르시시스트는 논쟁에 약하다. 그는 이성적인 판단을 주고받는 대화를 하지 못한다. 그럼 무엇을 무기로 싸울까?
나르시시스트는 무작정 우기기 화법을 시전 한다. 녹음기능이 탑재된 인형에게 NO라는 단어를 녹음한다. 그럼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하든지 인형은 NO라고 말할 것이다.
나르시시스트의 화법은 이와 비슷하다. 상대가 논리 정연하게 주장을 펼쳐도 인형은 큰 상관없다. 그저 녹음된 대로 인형은 아무 생각 없이 NO는 말만 반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