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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한결 Oct 02. 2024

프랑수아 트뤼포에 대한 주절거림

너무나도 애정하지만 그가 '좋아하는 감독'은 될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

내가 영화를 좋아하는걸 사람들이 알게 되거나 대화를 하는 상대방도 영화를 좋아할 경우 "어떤 감독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이 종종 나온다. 보통 자동응답기처럼 나오는 대답은 "알프레드 히치콕, 버스터 키튼, 그리고 우디 알렌 좋아해요"다. 사실 이 3명의 감독의 이름을 아예 모르는 분들도 많기 때문에 이마저도 잘 말을 안하거나 눈치보면서 이야기하는 편이다. 근데 분명 너무 애정하는 감독인데 '좋아하는 감독'을 물었을때 대답으로 나오지 않는 감독이 한 명 있는데 바로 프랑스 감독 프랑수아 트뤼포다. 그리고 이 감독이 '좋아하는 감독'에 속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그를 너무나도 애정하는 이유와 이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똑같겠지만 내가 처음 본 프랑수아 트뤼포 영화는 <400번의 구타>(1959)였다. 항상 그렇듯 영화에 대한 큰 정보 없이 영화를 보러 들어갔는데 몸 안에 있는 모든 수분이 다 빠져나간 기분이 들 정도로 울다가 나왔다. 영화가 엄청난 비극적인 이야기라서 운게 아니라 '나와 비슷한 사람이 세상 어딘가에 또 있었구나'라는 일종의 안도감과 비록 나와 동시대를 사는 사람은 아니지만 누군가에게 이해받았다는 기분이 들게 하는 영화였기 때문이었다. 


<400번의 구타>(1959)가 위대한 이유는 평론가 혹은 학자마다 다를수 있겠지만 나에게 있어서 위대한 이유는 트뤼포가 아이를 '어른들이 생각하는 아이의 모습'으로 보여주는것이 아니라 온전히 '한 인간'으로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내 이전 뉴스레터에서도 잠깐 썼지만 영화/드라마/뉴스 등 여러 매체가 보여주는 아이 혹은 미성년의 경우 단편적이고 납작한 묘사가 많다. 아주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가진 유년시절을 보내왔던 나로서는 많은 영화와 드라마들을 접하면서 항상 이 부분이 어린 시절의 나 자체를 부정당하는 기분에 뭔가 거슬리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나만 이랬던건가?'라는 물음을 계속 가지고 살게 만들었다. 그런데 트뤼포가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 <400번의 구타>(1959)를 통해 너만 그랬던게 아니었다고 했기에 나는 (이 표현이 클리셰적이라 싫어하지만) 내 어린시절을 보상받고 구원받은 기분이 들었다.


<400번의 구타>(1959)를 보고 트뤼포는 내 안에서 너무 애정하는 감독이 되었기에 그의 다른 영화들도 이것저것 시도하였다. 내 기억에 한 3편 정도 봤는데 모두 보다가 잤다 하핫. 취미는 영화고 특기는 영화보다가 숙면하기입니다. <쥘 앤 짐>(1962), <초록 방>(1978), <피아니스트를 쏴라>(1960). 이렇게 3편 봤던것 같다. 생각해보니 그나마 보고 안 잤던건 이후 봤던 <아메리카의 밤>(1973)인데 이것도 보면서 딱히 그 정도로 좋은건 모르겠는데....?라는 생각을 했다. 뭔가 이것저것 봤는데도 딱히 팍 꽂히는 영화가 없는 것 같아서 트뤼포 영화는 한동안 보지 않았다. 어차피 세상은 넓고 볼 영화는 항상 쌓여만 있으니깐. 그렇게 트뤼포는 너무 고맙고 애정하지만 <400번의 구타>(1959)외에는 잘 모르겠는 감독 정도로 내 마음속에서 자리 잡아가던 때, 작년 3월 어느 극장에서 <부부의 거처>(1970)를 상영해줬고 <400번의 구타>(1959)의 주인공 앙트완 드와넬이 나오는 영화인만큼 전부터 언젠가 한번은 봐야지 했던 영화라서 보러갔다. <부부의 거처>(1970)는 앙트완이 어느 정도 크고나서 결혼도 하게 되고 신혼부부로 사는 시기를 보여주는 영화였다. 그리고 나는 이 영화를 보고 트뤼포한테 또 한번 반해버렸다.


<부부의 거처>(1970)에 나오는 앙트완은 <400번의 구타>(1959)에 나오는 앙트완과 매우 매우 다르다. <400번의 구타>(1959)를 봤을때 매우 특별한 어른으로 자랄것 같았던 앙트완은 꽤나 평범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어른으로 자랐다. 어떤 사람은 이런 점 때문에 <부부의 거처>(1970)에 매우 실망했을수도 있지만 나에겐 이런 점이 바로 트뤼포를 너무나도 사랑하게 만드는 지점이다. <400번의 구타>(1959)를 보면 매우 대단한 위인의 시작이자 유년시절로 느껴진다. 그는 다른 또래들에 비해 훨씬 섬세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지만 주변의 어른들에게 그 누구한테도 이해받지 못하고 외면당하며 방치된다. 이랬던 앙트완이 <부부의 거처>(1970)에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신혼부부로 살고 있으며 평범한 직업을 가지고 엄청난 고뇌없이 지내는듯한 모습을 보면 김이 빠지는(anticlimactic) 느낌도 든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앙트완은 어린시절 자기 자신의 복잡한 감정들과 생각들을 감당할수 없어 너무 힘들었지만 나이를 먹으며 자기 자신과 사는 법을 어느정도 터득한 어른이 된것이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앙트완은 충분하다고 트뤼포는 말하는 듯 하다. 인생은 5막 구조인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을 따라가는 틀에 갇힌 이야기가 아니고 트뤼포는 앙트완을 그저 단순히 영화속 캐릭터로만 대하는 대신 정말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가는 한 인물로 그려내고 있다. 물론 앙트완이 자신의 자전적인 부분을 담은 캐릭터이기에 더 그렇겠지만 트뤼포의 이런 시선이 나는 정말 좋다. 


<부부의 거처>(1970)를 보고 나는 내가 감독으로서의 트뤼포를 좋아하는것이 아니라 (만나본적도 없지만) 인간으로서의 트뤼포를 좋아하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기에 나는 트뤼포를 '좋아하는 감독' 리스트에 결코 끼워넣을수 없는것 같다. 하지만 트뤼포는 정확히 그 부분때문에 그 어느 감독보다도 나에게 특별하다.....라는 위로를 트뤼포에게 바쳐본다 껄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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