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_남자는 갈 수 없는 여행

by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겐 사촌 '친구'가 있다. 내가 두 달이나 늦게 태어난 탓에 사촌‘언니’로 불러야 할 뻔도 했지만, 어린 시절 같은 동네에서 같은 유치원, 같은 초등학교, 같은 반까지 했으니 우린 그냥 쿨하게 ‘친구’가 되기로 했다. 우린 2017년 단둘이 제주도여행을 함께 했고, 그때 “엄마들만 모시고 여행을 하면 어떨까?”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때가 서로 결혼한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았으니, 아이러니하게도 결혼을 하고서 시작된 ‘효녀코스프레’였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결혼을 해보고 나서야 비로소 여자들끼리 떠난 여행이 주는 홀가분함에 눈을 떴고, 이 기분을 엄마와 이모에게도 선물하고 싶었으리라.

평생 무면허 유씨자매들은 남편 없이 어딘가 떠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 같다. 이번에 우리가 그들의 발이 되어 주기로 했다. 고로 남자는 필요 없음. 연장자부터 이모부 탈락, 나와 상지의 남편 모두 탈락, 당연히 나의 아들도 탈락.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들 낳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던 순간이었지 아마도. 이렇게 나와 상지, 우리 엄마, 상지의 엄마, 그리고 자녀가 없으신 큰 이모까지 자동차 한 대 딱 맞춘 5인의 구성원이 결정되었다.


우리 둘은 그동안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여행계를 들고 있었기에 여행 경비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유씨자매들에게 경비에 대한 부담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고, 다시 말하면 여행에 대한 결정권도 우리가 가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나와 상지가 30년 이상 겪어 온 ‘유씨자매들’은 호불호가 확실하고 고분고분하지 않으며 매사 소극적이고 의심이 많기에, 경비 이외의 모든 점이 걱정되었다. 그런 유씨자매들과 함께 할 여행은 내가 직전에 친구들과 다녀왔던 남해와 여수였고,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2박 3일간의 여행으로 결정되었다. 시간 단축을 위해 엄마와 나는 인천에서 비행기를 타고 내려가고, 김천팀은 KTX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사천공항과 진주역이 나름 적당한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2018년 9월 어느 금요일 저녁에 진주에서 ‘합체’하게 됐다.

진주로 가는 기차가 자주 있지 않아서 오전 11시쯤 기차를 타고 일찍 진주로 넘어온 김천팀은 저녁 8시가 넘어야 도착하는 우리를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일정이었던 것. 계획으로는 진주성, 촉석루, 근처 시장 등을 구경하며 여유를 만끽하는 아름다운 일정이었지만 현실적으론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받은 상지의 메시지 내용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비가 부슬부슬, 후덥지근, 춥기도 하고 이상하다.’ ‘여기 세 명이 있는데 나 빼고 자꾸 어디 다녀오시는 듯, 같은 말을 여러 번 하게 한다.’ ‘경로 우대 안 끊었다가 큰 이모한테 쥐 잡듯 잡힘’ ‘10시 출발인데, 7시 기상’ ‘버스정류장에서 버스 40분 기다림, 미친 시골’ ‘택시도 안 잡히고 1시간 걷고, 기다리면서 영화 보자 했다가 거절당함.’ 비행기 착륙 직전 받은 마지막 메시지는 ‘여하튼 이미 3일 때 얼굴을 하고 계신다’였다. 두렵고 긴장이 되더라.

마치 버스터미널같이 작은 규모의 사천공항에 7시가 넘어 내렸으니, 렌터카를 들고 냅다 진주 시내로 달렸다. 30분쯤 달려 진주 시내 갓길에서 김천팀과 상봉했고, 우린 비로소 ‘원팀’이 되었다. 저녁 식사가 급해 근처 식당을 아무 곳이나 들어가기로 했다. 생선구이를 파는 한식당이었는데 모두의 만족도가 높았다. 허기짐과 설렘이 적절히 섞인 탓이었으리라. 식사 후 사천에 잡아둔 숙소로 이동했다. 방은 3인실, 2인실 2개를 예약했고, 유씨자매와 유씨자매 2세가 각각의 방에서 잠이 들었다.

사천에서 남해로 넘어가기 전, 꼭 들러보기로 찜 해놓은 곳이 있었다. 그곳은 바로 삼천포. 한국인의 밥상이었던가 한국기행이었던가, 보는 내내 마음을 설레게 했던 쥐포를 사겠다고 네비에 ‘삼천포시장’을 찍고 출발했다.

좁고 어수선한 삼천포시장은 인천을 친근하게 여기는 우리 일행들에겐 그다지 낯설지 않은 느낌이었다. 낯선 것이라면 '쥐포'라고만 알고 있던 납작하게 말려진 수없이 다양한 '-포'들의 종류와 쥐포의 가격이었다. 예상보다 가격이 비싸게 느껴졌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 '값을 하는' 품질과 맛이었다. 먹어보고선 아니 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쥐치포, 아귀포, 알포 마구 샀더랬다. 명품쥐포에 홀려 '탕진잼'을 누렸다.


다음 목적지는 '남해 독일마을'이었다. 그곳에서 '원예예술촌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입장권을 사서 들어가는 곳이었고, 이번엔 '절대로' 경로 우대를 잊지 않았다. 상지는 배워서 남 주지 않는다. 예쁜 정원이 다양한 스타일로 꾸며져 있었고, 걷기 좋아하는 어른들 취향에 딱 들어맞았다. 멋들어진 담쟁이덩굴이 어우러진 담장을 프레임 삼아 찍어드린 사진은 오랫동안 이모들의 프로필 사진이 되었다. 아이처럼 두 손 모아 꽃받침을 한 채 웃고 있는 큰 이모의 얼굴은 꽃보다 화사했다. 지금도 그날의 감정을 살려내 마음을 흔드는 그 사진을 보고 있자면, ‘사진을 찍는다’는 행위에 대한 애정이 더욱 커진다. 몽돌해변에서 발도 좀 담그고, 다랭이마을도 구경하고, 그곳에 있는 박원숙카페에서 더위를 달랠 시원한 커피도 한 잔씩 마셨다. 어른들은 카페 구석구석 전시된 사진과 포스터를 보면서 그 시절 추억도 함께 마시지 않으셨을까?


이날 밤은 여수 호텔에서 묵기로 되어 있었다. 남해 해변도로를 따라 드라이브를 하며 기분도 실컷 내고, 여수로 넘어가는 길. 여수 산단을 지날 때, '와~ 여기! 책에서만 봤는데! 우와!' 흥분해서 떠들었다. 대꾸하는 이는 없었다. 모두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잠을 자고 있었으니까. 여행 중 차에서 자는 그 꿀맛 나는 잠.

여수 앞바다와 오동도가 보이는 호텔이 밤이라 더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여수 밤바다를 구경하겠다고 야심 차게 차를 끌고 포차거리로 나섰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온 뒤였다. 주변을 몇 바퀴를 돌아도 주차할 곳이 여의치 않았다. 거기보다 여기가 더 좋다며 근처 광장과 엑스포 공원까지 한 바퀴 밤 산책을 했다. 그날 밤엔 유 씨 자매방에 모여 낮에 산 쥐포에 시원한 맥주 한잔을 했다. 어른들에겐 생전 처음 보는 맥주 브랜드도 재밌고, 쥐포 맛도 좋고, 입에 대지도 않던 과자를 종류별로 맛보니 술에 취하고 과자에도 취해 모든 게 다 우스운 밤이었다. 상지와 나는 우리 방에 돌아와서도 아주 아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그중 대부분이 남편들 흉이었음은 말할 수 없는 비밀. 우리만 그랬을까? 유씨자매들도 마지막 밤을 하얗게 불태우지 않았을까?


내가 꼽는 이 여행의 가장 하이라이트는 ‘만족도 조사’였다. 가이드 ‘김양’이 손수 제작하여 배부했고 익명으로 받았다. 만족도는 거의 만점에 가깝지만, 사천식당에 유일하게 별점 3개를 준 유씨자매님 1인. 역시 까탈스럽긴. 하고 싶은 말을 적은 칸에는 이미 ‘다음’이 기약되어 있었고, 어디든 순순히 따르겠다는 각오를 정성껏 어필하시기도 했다. 이렇게 우리의 첫 여행이 나름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고, 이후로 두 번의 자매여행이 더 성사되었다. 여전히 상지와 나는 매달 모임통장에 저금을 한다. 그 통장의 이름은 바로 ‘시스터클럽’이다.

앞장서 “떠나자” 해주셨을 때, 우리가 설렜던 것처럼. 당신들께도 이 떠남이 설렘이 되어 부디 기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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