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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설 May 18. 2023

되찾은 봄이 계속 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사북항쟁, 전두환 정권 간 간첩조작사건

1980.5.18. 광주 민주화 운동.


민주화를 위해 전두환과 신군부에 저항한 시민들의 항쟁이었습니다.     


<사진 1.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전남도청 앞 분수대 주위에 모인 시민들(출처 : 경향신문)>



12.12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전두환과 신군부는 보다 확실히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5.17 내란을 일으켰고, 이에 대한 저항을 막기 위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폭력과 학살로 짓밟았습니다. 전두환과 신군부는 부족한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 끊임없이 안보 위협과 불안, 공포를 조장 및 강조해야 했습니다. 정권의 유지와 합리화를 위해 서슴없이 무고한 국민을 적으로 규정, 고문, 학살, 간첩조작 등 국가폭력을 자행했습니다. 5.18뿐만이 아니라, 1980년 4월 사북항쟁과, 전두환과 신군부 집권 간 만들어진 무수한 간첩조작 사건들이 그랬습니다.     


‘10.26 사태‘12.12 군사반란’, 권력의 공백과 신군부의 등장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피격, 사망했습니다. 27일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김재규를 체포했습니다.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고, 계엄사령부는 계엄 공고 제5호를 발표, 계엄사령부 내 합동수사본부를 설치, 지방계엄사무소에 합동수사단을 두었습니다. 10.26 사태 이후 오랜 독재가 끝나자 시민들은 민주화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음지에서는 전두환과 하나회를 필두로 한 신군부의 쿠데타가 모의되고 있었습니다. 암약하며 기회를 노리던 전두환과 하나회 인사들은 1979년 12월 12일 군사반란을 일으켜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강제 연행했습니다. 신군부는 권력을 장악하였고 이에 가담한 인원들은 요직을 차지했습니다. 1980년 4월 14일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임명, 보안사령부와 중앙정보부의 막강한 권한을 독차지합니다.


<사진 2. 12.12. 쿠데타 이후 서울 보안사령부에서 기념 촬영하는 신군부 세력(출처 : 연합뉴스)>



서울의 봄‘5.18 광주 민주화 운동’, 폭력으로 짓밟힌 봄     

1980년 3월 이후, 대학생들은 학내 유신 잔재 청산운동을 전개하였고, 5월 13일 거리로 나와 유신청산과 민주화를 요구했습니다. 5월 15일 학생들은 서울역에서 대규모 민주항쟁 시위를 벌였으나, 군부의 개입을 막기 위해 회군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광주에서 학생들과 시민들의 시위는 계속됐습니다.      

5월 17일 밤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는 18일부로 비상계엄의 전국적 확대를 발표, 야권인사, 학생운동 지도부들을 연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북한 위협과 국가안보를 명분 삼았으나, 투입된 계엄군 병력의 93%가 대학에 배치됐습니다. 5월 18일, 계엄군은 전남대 정문에 모여든 학생들을 구타 해산시켰습니다.     

학생들은 금남로로 나아가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와 김대중 연행 등을 알리며 시위를 계속하였습니다. 시민들이 동참하며 5월 19일부터 시위를 주도해 나갔습니다. 계엄군의 폭력과 과잉 진압에 조직된 시민군은 저항 끝에 21일 계엄군을 후퇴시켰습니다.


5월 27일 새벽 2만 5000명에 달하는 계엄군은 시위대가 점령하고 있던 전남도청에 진입해 총공세를 가했습니다. 계엄군의 무력진압으로 많은 시민군들이 사망했으며, 살아남은 이들은 폭도로 취급되어 끌려갔습니다. 계엄군의 작전 개시 약 1시간 30분 만에 항쟁이 진압되었으며, 이로써 열흘에 걸친 5.18 민주화 운동은 끝을 맞고 말았습니다.     


<사진 3. 5.18 민주화 운동 당시 광주 제일은행 앞에서 최루탄이 터진 상황(출처 : 오마이뉴스)



사북항쟁’, 광부도 사람이다. 인간답게 살아보자.     


5.18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부터 약 한 달 전인 1980년 4월 21일, 강원도 정선 사북 동원탄좌 사북영업소에서 광산노동자와 가족 6,000여 명은 사측과 어용노조의 횡포에 항의하며 생존권과 노동 인권 개선을 위한 항쟁을 벌였습니다. 이에 계엄사령부는 공수부대 투입을 고려했으나, 24일 노사정 간 합의가 원만히 이루어지며 상황은 일단락된 듯했습니다. 그러나 27일 계엄사령부는 정선경찰서에 합동수사단 현지수사반을 설치했습니다. 30일 계엄사령부는 전군지휘관 회의를 열고 학원 시위와 사북항쟁 등 일련의 사태와 관련, 국가안보 차원에서의 단호한 조처를 결의했습니다. 항쟁의 배후세력을 찾는다는 구실로 5월 6일부터 광부와 가족들을 대대적으로 연행해 고문과 폭력을 가했고 간첩으로 몰았습니다. 전두환과 신군부는 사북항쟁을 전면적 사회 개입의 단초로 삼았습니다. 사북항쟁은 광주 학살의 전주곡이었습니다.     


<사진 4. 탄광노동자들과 가족들이 1980년 4월 강원 정선군 사북탄광 주변에 모여 있다.(경향신문)



간첩조작’, 학살과 다르지 않은, 국가폭력의 또 다른 형태    

 

군사반란과 광주학살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집권동안 정권의 합리화와 안정을 위해, 시민에게 공포를 불어넣고 저항을 꺾고자 했습니다. 이들이 부재한 정당성을 대체하기 위한 방법은 무구한 국민들을 대상으로 무수한 국가폭력이었습니다.  

   

전두환과 신군부의 등장으로 위세를 등에 업은 보안사는 전두환 정권의 전위로서, 야당탄압, 언론통폐합 등 신군부의 권력 장악을 위한 공작에 나섰었습니다. 또한 학생운동 관련자들을 강제징집해 사상을 바꾸기 위한 녹화사업을 실시했습니다. 이들은 나아가 숱한 간첩조작사건을 만들어내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에서 간첩조작은 승진과 포상의 기회였습니다. 보안사뿐만 아니라 안기부, 치안본부의 수사관들은 독재정권에 부응하여 부귀와 영화를 누리기 위해, 서슴지 않고 무고한 국민을 적으로 규정해 간첩으로 만들었습니다.     


수사 간 불법 연행, 구금, 고문이 이루어졌고 짜 맞춰진 각본 속에 검찰 조사와 재판은 요식 행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언론은 권력에 통제되어 단지 침묵할 뿐이었습니다. 일가족, 납북어부, 유학생, 재일동포, 제주도민, 생계를 위해 일본에 갔던 이들, 무고한 국민들 모두가 고문 끝에 간첩으로 둔갑되었습니다.     


마침내 찾아온 봄과, 민주화로의 항구한 여정을 위하여     


전두환 정권은 불법 연행, 구금, 고문, 조작 등 국가폭력으로 거듭되는 시민들의 저항과 민주화의 열망을 억눌렀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의 민주화와 인권 회복에 대한 의지와 열망은 더욱더 커져 나갔습니다. 수많은 민주화, 노동, 인권 운동으로 나타났습니다. 마침내 봄이 찾아왔습니다.     


<사진 5. 1987년 6월 26일, 부산 문현교차로 '아!, 나의 조국'(출처  중앙일보)>


국가폭력은 시민들에게 잊히지 않고 기록되고 기억되었습니다. 시민들은 국가폭력의 진상을 외면하지 않고 왜곡하지 않고 마주 보았습니다. 사북항쟁은 폭도들의 소요사태가 아니며, 광주 민주화 운동은 폭동과 내란이 아니며, 조작간첩은 말 그대로 간첩이 아니었습니다.     


피해자들의 삶은 개인의 고통 어린 단면이 아닌, 민주화와 인권 증진을 위한 희생과 헌신의 면면이었습니다. 오늘날 이들의 희생과 헌신의 교훈과 유산은 민주화와 인권 증진을 위한 항구한 여정의 밑거름과 뿌리가 되었습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을 맞아 전두환과 신군부가 집권해 가한 국가폭력의 모든 피해자들을 추념하며, 그분들의 희생과 헌신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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