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발레 공연

스타니슬랍스키-네미로비치 단첸코 기념음악극장에서

by 차티 Chati

모스크한때 혁명의 전위이자 문화예술의 도시다. 이곳에는 박물관, 미술관, 극장이 셀 수 없이 많다. 이를 다 둘러보려면 몇 년이 걸릴까? 매년 새로운 프로그램이 진행될 테니 아마도 몇 백 개나 되는 박물관, 미술관, 극장에 한 번씩 간다 해도 꽤 오랜 시간이 들 거다. 모스크바에 여행 오는 이들은 볼쇼이극장에서 발레 공연을 보기 위해 암표를 불사하고 극장 앞에 서성인다. 표값이 비싸도, 언제 여길 다시 오냐 싶은 마음에 무리를 해서라도 볼쇼이극장에서 발레를 보려 한다. 볼쇼이극장 좋다. 무대도 고풍스럽고 실력도 최고다.

지난봄 <지젤> 공연을 거기서 보고 거의 울 뻔했다. 손동작 하나에도 여운이 남는 공연이었으니. 호짱과 나는 암표상에게서 한국돈으로 치면 무려 4만 원에 가까운 표를 샀는데도 무대가 안 보여서 서서 보아야 했다. 서서 보아야 무대가 다 보이는 자리. 서서 보아도 감동은 여전하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1막 공연 끝나고 쉬는 시간에 나갈 힘도 없어 사람들이 나간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학생증이 있으면 맨 위층 입석에서 볼 수 있다는데, 거기가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비싼 돈 주고 앞줄이 아닌 줄에 앉으면 영락없이 무대 전체를 보는 건 포기해야 한다. 물론 더 비싼 표들이 있다. 그 자리는 일치감치 예매되거나 있어도 몇십 만원의 거금을 주어야 하니 맘먹기가 쉽지 않다.

그러던 차에 지난 9월 28일 스타니슬랍스키-네미로비치 단첸코 기념 음악극장Музыкальный театр им. Станиславского и Немировича-Данченко에 갔다. 지난봄 초연된 <안나 카레니나Анна Каренина> 발레 공연을 다시 한다기에 한 달 전부터 예매. 개인적으로 볼쇼이극장보다 단첸코 극장을 더 추천한다! 아담해서 어느 좌석에서도 무대가 잘 보이고 음악과 공연 수준도 높다. 표를 구입하고 무대가 과연 잘 보이는 자리일지 안절부절 할 도 없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공연 시간 전까지 카페에서 초스피드로 숙제를 끝내고 극장 앞에 왔다. 1시간 전에 도착했는데 몸이 으슬으슬 추워서 극장 앞에 있는 아시안 푸드 식당 Менза에 들어갔다. 여기는 아시안푸드 이것저것 다 파는 곳이라 생각하면 된다. 단첸코 극장이 위치한 발샤야 드미트로브카 거리에서 북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맞은편에 있다. 항상 여기서 먹는 아시안 푸드는 짜고 양이 적지만 홍차를 마시니 몸이 조금 녹는 것 같다. 가게를 나서니 벌써 어두워졌다.


극장 앞 밤 풍경이 아름답다. 중심가에는 밤마다 화려한 장식의 조명 빛이 가득하다. 오늘 조명은 미러볼이 가득한 실내 파티장 같다. 하늘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짙은 파란빛을 띤다. 거리만 걸어도 마음이 붕 뜬다. 미러볼을 향해 팔짝 뛸 것 같은 마음. 조금 추운 날씨라 몸은 으슬으슬 감기 기운이 올 것 같은데, 마음은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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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입구. 관람객들로 붐빈다.


붕 떠 있는 마음으로 극장 입구에 섰으나, 입장 거부! 프린트된 표를 달란다. 아차차. 표를 프린트하지 않았다. 매표소로 가서 인터넷으로 예매한 내역을 보여주었으나 인쇄된 표가 없으면 안 된다는 말만 되풀이해서 들었다. 말도 잘 통하지 않아 몸짓으로 애걸복걸하니 임시표를 준다. 다행이다. 모스크바에서는 인터넷으로 예매를 해도 꼭 표는 인쇄해서 가져가야 한다. 잠시 잊었다. 가끔 인터넷 예매처에서 표가 첨부된 예매 확인 메일을 보내주지 않을 때도 있다. 지난번 크레믈린대회궁전에서 열린 아카펠라 공연은 예매하고도 예매 확인 메일을 못 받아 못 들어갔었다. 심지어 전화도 안되고 항의 메일에는 답변도 없다. 온라인 시스템에 문제가 많아 직접 공연하는 극장에 가서 사거나 길거리 곳곳에 있는 공연 판매 부스를 이용하는 게 더 편할 때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줄을 서서 예매하는 모습을 보면 괜히 기분이 좋다. 공연을 보고자 곳곳에 있는 예매처에 서성이는 풍경이라니.

이 나라의 속살을 속속들이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주중에도 수많은 공연이 열리고 기꺼이 공연장을 찾아와 가슴 졸이며 보는 관객들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오늘 본 발레 <안나 카레니나>는 톨스토이 소설보다, 그 어떤 영화보다 멋지고 아름다웠다. 잠시 세상과 내 작은 마음이 구원받는 느낌. 무대, 음악, 의상, 안무가 완벽한 합을 이뤄 눈물이 날만큼 감동적이다. 발레복을 입지 않은 발레리나 공연은 처음이지만, 기교보다는 극적 분위기를 전달하는 연기와 제스처가 더 와 닿는 공연이었다. 특히 레빈이 자신의 시골 농장에서 농부들과 함께 벼를 베는 장면 연출은 힘 있고 절제력 넘치는 동작과 음악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기차역과 시골 장면 등에서 연극과 영화를 결합한 키노드라마 기법을 선보여 더욱 극적인 구성을 더했다.

위 사진 출처: 공식 홈페이지 공연 사진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하리라. 그리 믿고 싶은 밤! 여기도 푸틴 세상이지만 예술이 있어 한 줌 희망 있으리.

극장 실내. 2층인데도 한 눈에 무대가 잘 보인다. 오케스트라도 일품.
공연이 끝나고 커튼콜. 사진은 이때 찍을 수 있다.



모스크바에는 볼쇼이극장 아니더라도 규모가 작아도 유서 깊은 극장들이 많다. 단첸코극장은 발레와 오페라를 보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추천할만하다. 이 극장은 극장의 풀 네임처럼 스타니슬랍스키와 네미로비치 단첸코가 설립한 곳이다.

1919년에 발족한 스타니슬랍스키의 오페라 연구극장과 네미로비치의 음악연구극장이 1941년에 합동한 것이다. 음악극장에는 단순한 가수나 무용가가 아니라, 악보가 명하는 그대로 인물의 심리·성격·환경 등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연기자가 있어야 한다는 두 창설자의 이상(理想)의 실현을 지향하고 있다. 상연목록은 오페라, 뮤지컬, 발레 등 음악극의 모든 장르를 망라하고 있으며, 러시아 오페라의 실험실이라는 말 그대로 현대 러시아 작곡가의 작품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 위키백과 발췌

공연 쉬는 시간에는 극장 내에 있는 극장 박물관을 구경할 수 있다. 박물관에는 극장의 연혁과 공연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의 역사를 알면 더 재미있을 전시라 놓치지 않고 꼭 보면 좋을 것 같다.


단첸코 극장의 위치: ul. Bolshaya Dmitrovka, 17, Moskva

극장 홈페이지 http://stanmus.r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