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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수필 Oct 10. 2021

그리스로 대리만족 좀 하자

어쩌다 랜선투어 가이드



지난 여름,

SNS에 올린 게시물에 줄줄이 댓글이 달렸다.  


"뭐? 어딜 간다고? 그리스??"

"내가 죽기 전에 꼭 가고 싶은 곳이 거긴데~”

"사진 많이 올려 줘! 대리만족 좀 하자”


체코에서 보내는 첫 여름.

고심 끝에 선택한 휴가지가 그리스였다.

'그리스... 글쎄... 그리스라...'

이제껏 물망에 오른 여행지 중에 이토록 현실감 없는 후보지도 없었다. 너무나도 요원한 이름이라 한 번도 욕심낸 적 없던 곳인데... 여름이 무르익던 7월의 어느 날, 그리스가 내게로 왔다.



코시국인데
비행기를 탄다고?


'여행'이란 두 글자는 그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설렘을 가져다준다. 하물며 그리스라니. 생애 한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에 심장이 요동쳤다. 출국일이 가까워올수록 누구에게라도 알리고 싶어 손가락이 근질거렸다. 그렇게 어린애처럼 마냥 들떴다가도 '아니지. 이 시국에 여행 다니는 게 무슨 자랑이라고... 혹시 취소될지도 모르니 조용히 있자' 싶었다. 불쑥불쑥 조심스러운 마음이 들 때마다 나도 모르게 의기소침해졌다.

설렘과 걱정을 오가는 사이, 대망의 출국일이 밝았다. 부연 설명을 하자면, 이곳 체코 오스트라바 공항에는 항공편이 많지가 않다. 하는 수 없이 1시간 거리에 있는 이웃나라 폴란드로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폴란드 카토비체 공항에는 그리스 크레타섬으로 가는 항공기가 있었다.


두근두근. 비행시간까지 약 30분을 남겨두고 한껏 고조된 기분으로 지인들이 보는 SNS 계정에 "꺄~ 내 생애 그리스를~ 잘 다녀올게요, 총총" 대략 이런 내용을 덧붙여 사진 몇 장을 올렸다. 반응은 뜨거웠다. 순식 간에 여러 댓글이 달렸고, 대부분이 "사진 많이 올려 줘~ 대리만족이라도 좀 하자" 였다.


하아.. 대리만족이라.. 그때부터 다시 생각이 많아졌다. 한국에 있는 내 가족, 내 친구들은 여전히 마스크 감옥에서 괴로워하고 있는데 이렇게 생각 없이 쏘다녀도 되는 걸까. 물론, 유럽인들도 마스크를 착용하긴 한다. 단, 실내에서만! 규제가 없는 야외에서는 노마스크가 태반이다.


아무튼 그때부터 '대리만족'이란 네 글자가 뇌리에 콕콕 박혀버렸다. 한국의 분위기를 고려하면 더 이상의 사진은 삼가는 게 옳았다. 그렇지만 내게 SNS는 기록의 의미이기도 한데.. 어쩌지? 언제 어디에서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나의 일상을 남기고 추억하는 공간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생각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사진 예쁘게 찍어서 대리만족에 부응하는 랜선투어 가이드가 되어볼까?!







산토리니 말고요
‘크레타섬’을 아시나요?



"크레타? 그런 섬이 있다고?”

내가 얼마나 그리스에 대해 무지했는지, 남편과 나눈 대화 속에서 여실히 깨달았다. 그리스에 가기만 하면 산토리니가 눈앞에 펼쳐지는 줄 알았고, 그리스에 가기만 하면 그 유명한 [맘마미아]가 현실이 되는 줄로만 알았다. 만약 신혼 때였다면 그 비슷한 경험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에겐 어린 아들이 있지 않은가. 세 살 아이와 함께할 수 있는 여행은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이 넓디넓은 유럽에서 그리스를 선택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동이 많은 관광지보다는 한 곳에 머무를 수 있는 휴양지가 필요했다. 비행시간도 관건이다. 폴란드 카토비체 공항에서 크레타섬이 있는 헤라클리온 공항까지 약 3시간 30분이면 닿을 수 있기에. 여러모로 그리스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안녕, 크레타!


세상에~ 내가 지중해도 아닌 에게해까지 오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에게해 남부에 있는 이 섬은 그리스에 있는 섬 중에서도 가장 크고 인구도 제일 많다. 착륙하기 전에 창 너머로 슬쩍 내려다보니, 해변가에 리조트가 끝도 없이 들어서 있었다. 그중에서도 우리가 3박 4일 간 머물렀던 숙소는 올 인클루시브(all-inclusive)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리조트였다.


와~ 말로만 듣던

'올 인클루시브'가 이런 거구나


밥때 맞춰서 식당에 가기만 하면 뷔페식으로 차려진 음식을 배불리 먹을  있다. 어디 그뿐인가. 물놀이를 즐기다가도 크레페 같은 핑거푸드에 커피와 칵테일까지! 지천에 먹을  널려있다.  손으로 밥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 가만히 앉아있기만 해도 식구들이 끼니를 해결할  있다는 . 그게 얼마나 감사한 자유인지 주부가 되어보지 않으면 절대로 모른다.



  



날씨 요정이 사는
여름 섬, Creta


올해도 여름의 기세는 가히 대단했다. 체코의 더위도 한국 못지않게 기승을 부렸다. 그런데 그리스의 여름은 , 아니 ~~ 달랐다. 난생처음 경험하는 기이한 날씨였다. 해는 뜨거운데  덥지가 않지? 태양이 나를 삼킬 듯이 이글거리는데 땀이 맺히지도 않았다. 차이는 바람에 있었다. 에게해의 해풍이 묘한 재주를 부렸다. 어떻게 이런 날씨가 있지? 바닷바람이지만 끈적이지도 않았다. 이래서 다들 그리스의 여름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한국과 생이별, 체코에서 새 출발


인생의 격동기를 지나고 있어서 몰랐는데 나에게도 ‘쉼’이 절실했나 보다. 코로나 시대에 해외살이를 준비하며 몸도 마음도 극심한 몸살을 앓았다. 지칠 대로 지쳐있던 내게 그곳에서의 며칠은 그냥 여행이 아니었다. 세상 그 어떤 약보다 효능이 좋았다.

느지막이 일어나 조식을 먹고, 물놀이나 조금 하다가, 시간이 맞으면 요가 수업에도 들어갔다. 그렇게 며칠을 보냈더니 푸석했던 얼굴에 차츰 생기가 도는 게 느껴졌다. 비록 산토리니는 근처에도 못 가봤고, 영화 <맘마미아>의 촬영지는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지만 그 어떤 여행보다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아울러, 나에게 대리만족을 말했던 한국에 있는 내 지인들도 랜선으로나마 그리스에 다녀갔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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