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emie Mar 12. 2019

미국 병원에서, 길고 길었던 37시간의 출산 후기

미국 예비맘의 출산 이야기_01


나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출산을 위해 병원을 찾게 될까. 온갖 상상을 다 하며 진통 주기 어플까지 미리 다운을 받아두고 사용 방법도 숙지해 두었었는데, 실제는 아주 다른 모습이었다.


출산 예정일 전 주 일요일 저녁, 가족들과 아드리아나에서 맛있는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와서 과일을 조금 먹었던가, 씻고는 10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다. 침대에 옆으로 누으려는 순간, 다리 아래로 뜨거운 물이 흐르는 느낌이 드는 거다. 순식간에 화장실로 튀어가 상황을 살폈는데 그 사이 입고 있던 바지가 다 축축하게 젖을 정도였다. 양수가 터진 것이다. 피가 섞인 투명한 액체가 연신 흘러나와서, 당황한 마음에 얼른 병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흐르는 양수의 양이 어느 정도인지 피가 섞여 나오는지 등을 묻더니 얼른 출산을 위한 병원으로 가라는 안내를 받고 남편과 서둘러 집을 나섰다. 사실은 출산 가방도 미처 싸 두지 못했었는데 되는 대로 대강 이것저것을 집어넣고 출발한 것. 양수가 터진 상황이기는 했지만 진통 같은 것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때만 해도 집에 계실 어머님께 웃으며 인사를 하고 나올 정도로 여유가 있었던 것 같다.


병원에 도착해서 차는 발레 파킹으로 맡기고 Triage Room과 분만실이 위치한 병원 4층으로 안내를 받아 이동했다. 화장실엘 한번 들르고 Triage Room 하나를 배정받아 들어가 지시에 따라 누웠을 때는 밤 10시가 막 지난 시각이었다.


양수는 터졌지만 나는 전혀 배의 수축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배 수축을 모니터 하는 밴드를 배에 차고 지시에 따라 의자에 앉아 있었더니 한참 후에 젊은 의사 한 명이 들어왔다. 지금 흐르는 것이 양수가 맞는지, 그리고 그 양이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하고 또 자궁 문이 얼마나 열렸는지 내진을 통해 확인한 후 (여전히 전혀 열리지 않았다) 당직 교수인지 아무튼 다른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어떻게 진행될지를 알려준단다. 


그리고 또 한참 후, 그 당직 교수가 나를 입원시키라는 지시를 했던 모양으로 그 젊은 의사가 다시 들어와서 나는 곧 분만실로 옮길 거고, 자궁문이 하나도 열리지 않았지만 수축이 강하지는 않아도 조금씩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레 주기적인 수축으로 변하는지를 조금 기다려보다가 너무 진행이 느릴 경우 유도분만제를 투여할 예정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리고는, 당신은 아이와 함께가 아니고서는 이 병원을 떠날 일이 없을 거예요,라고 말하며 웃었다.


아, 정말 그렇겠구나. 이제 정말 아가와의 오랜 뱃속의 동거가 끝이 나고, 아이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볼 수 있게 되겠구나. 병원에서 나갈 땐, 우리가 정말 셋이 되어있겠구나. 하는 생각들에 조금 흥분이 됐다.


분만실로 옮겨질 거라는 얘기를 듣고 나서도 Triage Room에 상당히 오래 앉아있었다. 그동안에 앞으로 주사를 많이 맞을 예정이기 때문에 왼쪽 손에 IV 주사를 맞을 라인도 잡고, Lactate를 IV로 계속 투여받기 시작했다 (이 주사는 일요일 밤 Triage Room에서부터 내가 출산을 하였던 화요일 오후 1시경까지 끊임없이 계속 투여받았다). 아마도 흐르는 양수의 양이 너무 많아서 탈수를 방지하기 위함이 아닌지 혼자 그냥 생각해 본다.


Triage Room에서 간호사의 도움으로 환자복으로 모두 환복을 한 다음 분만실로 이동을 한 것은 새벽 2시가 넘어서였다. 양수가 흐르는 상태에서 4시간여를 Triage Room에서 가만히 앉아 기다렸던 것. 사실 이 시간도 꽤나 힘들었다.


이쯤 되니 배에서 가끔씩 수축이 느껴지고 조금씩 아프기도 했지만 아직은 전혀 아무렇지 않아 여유 있게 분만실 사진도 찍어댔었지.



내가 출산 때까지 머물렀던 분만실의 사진. 지금 다시 보니 감회가 아주 새롭다. 내 침대 맞은편에는 아이가 태어나면 바로 옮겨질 검사대가 있고 그 옆으로는 남편이 쉴 수 있는, 나중에는 침대로 변신할 수 있는 소파가 놓여있었다. 그 옆으로는 널찍한 화장실과 샤워공간 역시 준비되어 있었다.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리클라인이 되는 의자도 두 개가 놓여있었는데, 이런 의자나 출산의 진행을 빠르게 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짐볼, 침대에 누워 자세를 잡을 수 있는 도구들, 통증이 너무 심할 때 사용할 수 있는 핫팩 등등 필요한 게 있을 때 언제든 말만 하면 간호사들이 다 가져다주었다. 나는 출산 때까지 물 종류 밖에는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는데, 물, 주스, 아이스 등도 내가 말하지 않아도 수시로 간호사들이 들어와 필요하지 않냐며 물어보며 가져다주었다.


분만실에서의 초기 시간들은 사실 아주 힘들지는 않았다. 진통도 그리 심하지 않았고 간호사들은 너무 친절해서 내가 원하는 건 뭐든 들어주었기 때문에. 그런데 계속해서 연결된 IV 주사선도 문제였지만, 배에는 자궁의 수축을 감지하는 밴드 하나와, 아이의 심박수를 체크하는 밴드 하나 이렇게 두 개를 감고 있었고, 이 밴드의 선이 기계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매번 화장실을 가기가 몹시 힘들었다. 간호사가 어떻게 하고 화장실을 가면 되는지를 알려주긴 했지만 그렇게 다녀오기만 하면 배에 감았던 밴드 위치들이 다 흔들려서 아이 심박수나 내 진통이 감지되던 것이 멈춰버렸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나 싶어 달려온 간호사가 내가 화장실 갔다가 나오는 문 앞에 기다리고 있다가 다시 밴드 위치를 잡아주곤 했다. 이런 것도 한두 번이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고, 나중에 진통이 점점 심해지면서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을 때는 이 화장실을 다녀오는 일이 더욱더 힘들어졌다.


나는 이 분만실에서 약 33시간을 머물렀던 셈인데, 그 시간 동안의 진행상황은 되도록 간단하게 풀어보려고 한다.


분만실로 막 이동했을 때 (새벽 2시경)에는 진통도 불규칙적이고 자궁 문도 전혀 열려있지 않았는데 자연스레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살펴보자며 조금 대기를 하다가 약 2시간 이후부터 유도분만제를 투여받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진통이 거의 없었는데 유도분만제를 투여받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진통의 강도가 심해지기 시작했다.


아침 7시와 저녁 7시, 밤 11시 이렇게 3번 간호사와 의사가 교대를 하는데 첫 번째 교대 직전인 이튿날 오전 7시경 (병원 도착 후 9시간 경과)에 다시 내진을 해본 결과 자궁문은 1센티가 열렸다고 했다. 아직 진통제를 사용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무통 주사는 자궁문이 4센티 열렸을 때부터 맞을 수 있다고 하는데 나는 양수가 터진 상황이라 감염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내진을 너무 자주 할 수가 없어서 내가 너무 아파할 때마다 겨우 한 번씩 내진을 해 주었다.


오후 1시쯤 (병원 도착 후 15시간 경과)되었을 때는 또 너무 아파서 내진을 해달라고 했는데 충격적 이게도 이 때도 자궁문은 여전히 1센티만 열려 있었다. 그런데 그 주변이 더 얇아진 것으로 보아 진행은 제대로 되고 있는 거라며 그냥 더 기다리자는 말뿐.


두 번째 만났던 의사가 퇴근하기 직전인 이튿날 오후 7시경 (병원 도착 후 21시간 경과)에 다시 내진을 하였을 때는 자궁문이 겨우 2센티 열렸다고 했다. 사실 이때만 해도 진통이 상당했기 때문에 정말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는데 7시에 교대를 하고 온 간호사가 지금 무통 주사는 맞을 수 없지만 다른 종류의 일반적 진통제를 맞을 수는 있다고, 그걸 원하면 말하라고 해서 무조건 원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진통제와 함께 수면을 유도하는 약을 같이 줘서 이 시각 이후부터는 비몽사몽 해졌다. 진통이 올 때만 살짝 깼다가 잠이 들고, 진통이 오면 또 깼다가 다시 잠이 드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밤 11시쯤 (병원 도착 후 25시간 경과)이 되니 그 진통제 약발도 다 되었는지 다시 너무 아파져서 또 내진을 했다. 정말 죽을 만큼 아프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또 겨우 3센티가 열렸다고 한다. 이때까지 진통의 강도를 1에서 10까지 중에 고르자면 어느 정도냐고 계속 물었는데 이때 나는 8에서 9라고 얘기했던 것 같다. 밤 11시 내진을 하고 당직이던 의사는 제왕절개 수술을 들어가야 한다고 하며 급하게 나갔고, 이 시각 이후부터 나는 정말 지옥을 경험했다.


아까 받았던 약을 다시 투여받기 시작했는데도 이제는 진통이 너무 강해서 약발은 전혀 없었고 그냥 잠만 왔다. 진통의 간격도 3분 정도로 줄어들었기 때문에 2분 정도 자다가 너무 심한 진통에 잠에서 깨고 죽도록 아파하고, 다시 또 약기운에 잠이 들고, 또 엄청난 진통으로 잠에서 깨는 것을 몇 시간을 반복한 거다. 남편은 이때를 기억하며 나를 지켜보기에 가장 괴로웠던 때라고 말했다. 정작 나는 기억이 거의 없는데 내가 울면서 이제 못하겠다고 제발 집에 가자고 남편에게 애원했다고 한다. 이때는 진통의 강도를 숫자로 말하라면 무조건 10! 10!이었는데 정작 정말 너무 아플 때는 그런 걸 묻지도 않더라.


너무너무 아파서 죽을 지경이었던 다시 또 이튿날 새벽 3시경 (병원 도착 후 29시간 경과) 다시 내진을 하였을 때 드디어, 자궁문이 6센티 열렸다고 하며 무통주사를 맞겠냐는 질문을 받을 수 있었다. 네! 네! 얼른 투여해주세요!


유독 온화해 보이던 이 시간을 담당했던 여자 의사가 나를 진정시키며 이제 무통 주사를 맞으면 진통은 느낄 수 없을 테고, 그러면 일단 잠을 푹 잘 수 있을 거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그때 아이를 낳아야 하기 때문에 일단 푹, 푹 잠을 잘 자라고 얘기해 주는데 세상 그렇게 달콤한 말이 있을 수 없었다.


정말 자궁문이 3센티에서 6센티로 가는 그 4시간 정도가 너무너무 너무 힘이 들었다. 체력도 너무 달리는 데다 진통은 너무 강하고 진정제를 투여받은 바람에 자꾸 잠이 들었다 깨는 과정까지 정말 끔찍했던 것 같다.


이후 무통주사를 투여받기까지는 또 얼마나 굼뜬지. 매 3분마다 왔다가는 진통을 온몸으로 겪는 건 나뿐이라 그런지 어쩜 다들 그렇게 느긋해 보였는지 모르겠다. 이때는 아파할 힘도 없어서 진통이 올 때마다 그냥 눈물만 주룩주룩 흘렀던... 무통 주사는 다른 과의 의사가 와서 투여해야 해서 의사를 호출하고 그 의사가 도착하기까지의 시간도 한참이 걸렸고, 그 의사가 도착해서도 주사를 준비하는 시간에 내가 주사로 인한 부작용 등을 감수하겠다는 서류에도 직접 사인을 해야 했다 (사인하는데 손이 덜덜...).


아무튼 그렇게 무통주사를 맞았고, 이후 나는 순식간에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깬 건 다시 아침 7시 (병원 도착 후 33시간 경과), 다시 바뀐 간호사와 의사와 함께 출산 준비를 시작했다. 문제는 무통주사 탓에 아직 다리에 감각이 전혀 없었다는 건데 그래서 정말 출산을 위해 푸시를 시작할 때 뭐가 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진통이 오고 가는 감각도 전혀 없어서 모니터를 보고 간호사가 푸시를 하라고 할 때 하긴 했는데 제대로 해내질 못했던 것 같다. 그렇게 무통주사 투여를 멈추고 시간이 조금 더 흐른 후 (푸시를 시작하고 두세 시간이 경과했을 무렵) 내가 직접 진통을 느낄 수 있었고 (이때도 무통주사의 영향으로 통증은 없었다) 제대로 힘을 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정작 푸시를 한 시간도 4시간이나 걸렸다. 나중에는 정말 너무너무 지쳐서 이 정도까지 왔는데 설마 푸시를 못해서 제왕절개를 하게 되진 않겠지? 하는 불안감이 엄습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결국 오전 11시 12분 (병원 도착 후 약 37시간 경과), 그토록 바라고 바라던 우리 아이를 품에 안아 들 수 있었다. 3.4 kg에 53 cm, 건강한 딸아이였다. 남편이 원해서 탯줄은 남편이 잘랐다.


출산의 순간에는 뱃속에 있던 것이 다 빠져나가면서 아주 시원한 기분이 든다고 하더니 나는 정작 그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태반 등 아이가 나오고 난 후 뱃속에서 나온 것들을 투명한 플라스틱 통 안에 넣은 채 나와 남편 눈앞에 보여주며 이게 태반이고 이게 뭐고... 하며 의사가 확인도 시켜주었는데, 저게 모두 내 배 안에 있었다니... 하는 생각에 뒤늦은 공포감도 들고, 근데 뭐 다 나온 거라니까 하는 안도감도 들고, 임신했을 때 쪘던 살이 얼마 정도 빠지기도 했겠다는 여유 있는 생각까지도 했었던 것 같다.


아무튼 세상에, 병원엔 일요일에 왔는데 출산은 화요일에 했다. 정말 지독하게 길었던 나의 출산 과정. 지금 되돌아보면 일요일에 너무 무리를 했기 때문이었는지 자궁문은 전혀 열리지 않았는데 양수부터 터졌던 게 이렇게 힘든 출산의 원인이었던 것 같다.


양수가 터지면 감염의 위험 때문에 24시간 이내에 출산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는데 나는 37시간이나 걸렸기 때문에 의료진들은 감염의 가능성을 계속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이런 경우 매뉴얼이 매 두 시간마다 체온과 맥박을 측정하는 것이라고 해서 그 힘든 출산 과정 내내 두 시간 간격으로 계속 체온과 맥박을 측정하였는데 마지막 출산을 위해 푸시를 시작하기 직전에 내 체온이 100도 이상으로 오른 바람에 순식간에 나와 우리 딸은 감염이 되었을 것을 가정하고 치료를 받게 되었다. 나도 푸시하는 내내 계속 항생제를 투여받아야 했고 우리 딸도 태어나자마자 48시간 동안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계속 항생제를 투여받아야 했다. 48시간 이후 감염 여부를 알 수 있었는데 결국 감염은 아니었다고 하니, 어찌 보면 다행이지만 괜히 내가 마지막에 체온이 오른 바람에 딸아이를 고생시킨 것 같아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내 출산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은 하나같이, 한국이었으면 진작 제왕절개를 했을 거라고 얘기한다. 실제로 나와 비슷한 과정으로 병원에 가서 유도분만제를 투여받았던 친구 하나는 자궁문이 너무 열리지 않아서 제왕절개를 하기도 했고. 그런데 미국은 정말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웬만해서는 제왕절개 수술은 시도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진득하게 나의 출산 과정을 다 기다려 주었던 것 같다.


그리고 분만실에서 만났던 간호사들이 유독 너무 친절해서 아주 감동스러웠다. 어쩜 직업의식이 이리도 철저할 수 있는 건지, 간호사들이 다들 너무너무 친절해서 일일이 손잡고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예전에 없던 간호사라는 직업 가진 사람들에게 존경심까지 생겼을 정도.


출산을 기다리며 진통을 하는 동안에 날 돌봐주었던 간호사들도 모두 친절했지만, 정말 출산 순간을 함께했던 간호사 (그녀의 이름은 Ariana,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다)와 역시 그 시간대에 내 곁을 지켜주었던 레지던트 한 명 (출산 순간에 내 손을 꼭 잡아주었던, 그녀는 태어난 아가와 함께 셋이 된 순간의 우리 모습을 남편의 휴대폰 카메라에 담아주기도 했다)은 특히나 기억에 남는다.


이렇게 분만실에서 이틀, 또 이후 회복실에서 이틀까지 자연 분만 치고는 병원에 머무른 시간이 조금 길기도 했고, 그동안 투여받은 주사 종류도 워낙 많기도 해서 그런지, 나중에 청구된 병원비를 보니 나와 아이의 병원비를 합쳐서 모두 62000불 정도가 나왔더라. 한국 돈으로 치면 약 7천만 원 정도가 나온 셈이다. 다시금 감동스럽게 좋은 우리 보험 덕택에 우리는 돈을 전혀 내지 않아도 되었지만, 미국 병원비, 이 정도는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새 시간이 많이 지나서 이때의 고통은 기억에서 많이 사라져 버렸다. 출산 이튿날만 해도, 우리에게 둘째는 없다, 이 아이 하나만 이쁘게 잘 키우자 생각하고 남편에게도 그렇게 말했었는데 지금은 아이가 너무 이뻐서 둘째도 낳고 셋째도 낳고 싶다고 얘기하고 있으니까 나란 사람은 대체 얼마나 멍청한 건가! 벌써 둘째 아이의 이름까지 지어두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정말 내가 둘째를 낳기 위한 출산을 할 때가 된다면, 그 출산은 지금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수월하기를 바라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진, 주변 정리, 그리고 기다리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