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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윤민정 May 10. 2021

My Sexuality: 나에게서 나를 제외하면

[구멍] 내 다리 사이를 들여다보는 남자들은 모두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딘가 넋이 나간 몽롱한 얼굴. 그들은 언제나 내 성기가 아니라 훨씬 더 먼곳에 있는 무언가를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시선을 턱밑으로 내리깔고 그들의 얼굴을 훔쳐봤다. 그들이 무엇을 보는지 늘 궁금했다. 내가 내 성기를 거울에 비춰보면 그저 하나의 기관이 있을 뿐인데. 하나의 기관? 사실 이렇게 단순하게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여성의 성기를 두고 학습된 수치심 때문인지 나는 내 성기의 이미지가 부끄럽고 거북하다. 그 희미한 감상을 걷어보면 그저 털, 살, 점막.

여자의 생식기는 흔히 구멍으로 비유된다. '구멍'이라는 단어를 입안에서 되풀이하면 조금 으스스한 기분이 든다. 무엇이 숨어 있는지, 어디로 통하는지 알 수 없는 어두운 곳. 내 공포심은 이곳을 통해 새로운 생명체가 나온다는 가능성과 맞닿아 있는 것 같다. 그 생각을 하면 문득 내 몸이 낯설다. 이 출산이라는 미지의 가능성을 제외하면 나에게 내 성기는 아무 신기할 것 없는, 클리토리스와 질, 나팔관과 자궁으로 연결되는 하나의 유기적인 조직이다. 실제로 내 몸 내부를 본 적은 없지만 머릿속에서 구성되는 이미지는 그렇다. 그러나 남자들은 늘 다른 것을 보는 것 같았다. 나도 그들이 보는 구멍을 보고 싶었다.


[질] A가 내 어깨에 입술을 대다가 한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움켜잡는다. 다른 손이 내 몸으로 미끄러진다. 그의 손가락이 내 질에 들어오는 순간 너무나 이질적인 느낌에 깜짝 놀란다. 내 질로 그의 손가락을 느낀다기보다, 그의 손가락을 통해서 내 질의 느낌을 감각하는 것 같다. 예전에 한 번 어플리케이터가 없는 탐폰을 쓰려다가 거북한 느낌 때문에 포기했던 적이 있다. 설명서에 나온 대로 중지에 탐폰을 얹고 질로 밀어넣을 때 손가락에 닿는 물컹하고 낯선 느낌에 충격받았다. 오래 전부터 탐폰을 써와서 무언가를 내 몸에 넣는 것은 이상하지 않았는데, 내 손가락으로 질 점막을 느끼는 건 어딘가 징그럽고 불쾌한 감각이었다.


[침해]

"미안."

그는 내 질에서 손가락을 빼며 숨을 몰아쉰다.

"오리한테 이러면 안 되는데."

그는 나를 '너' 같은 2인칭 대명사보다는 주로 '오리'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그의 말버릇 때문인지 나 역시 내가 3인칭으로 인식된다. 오리는 누구지? A의 오랜 친구지. 십여 년 동안 아무 성적인 분위기 없이 함께 놀다가 어느 날 뜬금없이 '너랑 같이 자고 싶다'라고 메시지를 보냈던 사람이지. 이혼한 후에 남편이 아닌 남자와 섹스하는 걸 두려워하다가 단지 그걸 두려워한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실행하고야 마는 사람이지.

나는 묻는다.

"콘돔 있어?"

그는 침대맡에서 콘돔을 찾아서 집다가 주저한다.

"아, 그만할까? 하지 말자."

그는 계속 망설인다. 모든 과정에 내가 동의를 했음에도 계속 미안하다고 말한다.

"너한테 폭력을 당하고 싶어."

나는 그를 두 팔로 감싸 안으며 말한다.


[침해] 그는 왜 나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걸까? 아마 내가 글에 그를 등장시킬 때 죄책감을 느끼는 이유와 비슷할 것 같다. 타인을 침해하는 행위에서 오는 꺼림칙한 희열. 내가 그의 이야기를 계속 쓰는 것처럼 그 역시 나에게서 몸을 떼지 않는다. 펜(Pen)의 어원이 페니스(Penis)라면, 나에게 글쓰기는 자신에게 없는 남성기의 대체물일까?


[말-상징] A가 내 젖꼭지를 손가락으로 잡고 비튼다. 나는 신음한다. 그의 손가락에 내 몸이 결박되어 있는 것 같다. 무력한 느낌이 나를 취하게 한다. 그는 나를 엎드리게 하고 등을 짓누른다.

"오리한테 박고 싶다. 막, 거칠게."

실제 성기의 접촉은 우리를 둘러싼 기호에 비하면 대단치 않은 일 같다. '박는다'라는 단어의 상징성을 지탱하려고 행위를 하는 것 같다. 서로에게 무례하고 저속한 일을 하고 싶은 욕구.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전부인지 모른다.


[금지된 즐거움] "너한테 폭력을 당하고 싶어." 나는 왜 이렇게 말했을까? A의 다른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일까? 그는 이제까지 나를 상냥한 우정으로 대해 왔다. 나는 그가 어떤 면에서는 아주 수줍고 부드러운 사람이라는 걸 안다. 그러나 단지 A의 다른 면을 보고 싶다는 호기심만으로 이 말을 한 것 같지는 않다. 머릿속에 몇 가지 장면이 스쳐간다.

일여년 전 소은성 작가가 진행하는 글쓰기 수업을 들었다. 어느 하루 수업에서 이런 주제가 제시됐다. '나에게 금지된 즐거움은 무엇인가? 열 가지를 써 보자.' 그때 내가 쓴 목록 중 하나는 이런 것이었다.

"소스로 질척거리는 토마토 스파게티를 새하얀 벽에 던져보고 싶다."

내가 A에게 '폭력을 당하고 싶다'라고 하는 것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동일한 욕망이다. A의 집에서 함께 술을 마실 때 그는 나에게 계란말이를 여러 번 만들어줬다. 싱크대에 계란 껍데기들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녔다. 약간의 힘으로도 바스라질 수 있는 얇고 딱딱한 껍데기들. 축축한 스파게티가 벽에 부딪치는 파열음. 벽면에 흐르는 새빨간 액체.


[눈] 나는 그의 얼굴 앞에서 눈을 뜬다. 그는 깜짝 놀라며 물러난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오리 눈 보는 거 오랜만이야."

두 눈이 정면으로 마주치자 손전등 불빛을 보듯이 가벼운 현기증이 난다. 눈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자꾸 들여다보고 싶다. 우리는 지금 시선을 통해서 어떤 신호를 주고 받는 걸까? 우리의 눈동자는 에고에 난 구멍인가, 에고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는 연약한 보호막인가? 물론 단순히 둘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깝기 때문에 초점을 맞추기 힘들어서 어지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말-체인] "또 하고 싶다. 계속 하고 싶어." A가 말한다. 콘돔 포장지들이 바닥에 굴러다닌다. 나는 이 욕구의 목표점이 무엇인지 자문한다. 성기 중심의 오르가즘 욕구는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어떤 '말'을 듣고 싶은 욕구에 가깝다.

처음으로 그와 섹스의 가능성을 떠올렸던 것은 스쳐갔던 대화 때문이었다. 여러 달 전에 둘이 술을 마시다가 '성적 매력'이라는 주제로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너는 뭐가 섹시하다고 생각해?" 보통 이런 질문을 남자들에게 했을 때 나오는 대답은 뻔했다. 여성의 특정한 신체 부위라든가 어떤 복장이 좋다는 이야기. A는 대답했다.

"거리."

상대와 나 사이의 거리를 얘기하는 그를 보고 속으로 제법이라고 생각했다. 이후에 그는 비슷한 이야기를 할 때 다시 말했다.

"정말 야한 건 '말'이야."

그가 관능에 대해서 잘 이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그에게서 특정한 단어나 문장을 들으면 이 욕구가 사라질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말은 또 다른 말을 부른다.


[말-체인] 외설적인 말은 사실 텅 빈 기표에 불과하다. A가 나를 어떤 저속한 단어로 칭한다고 해도 실제로 그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음을 알고, 내가 안다는 사실을 그도 안다. 외설적인 말은 무언가를 가리키거나 표현하지 않으며, 오직 말하고 듣는 쾌감에만 복무한다. 혀의 움직임. 목구멍에서 나오는 소리. 의미를 탈각한 채 욕망의 신호로 기능하는 단어들의 체인.

아마 우리가 오랫동안 좋은 친구로 지내지 않았다면 너에게 '말'을 듣는 일에 이토록 흥미를 느끼지도 않았겠지.

너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가 무엇이든 상관없다. 이제까지 우리가 쌓아온 관계를 전복시키는 쾌감이 흥미의 본질이다. 아니, 어쩌면 아무 단어를 말할 필요도 없다. 네가 나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다.


[신뢰] 다른 사람이 나에게 욕을 하면 나는 단박에 화를 낼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 크게 상처받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 왜 네가 침대에서 나에게 욕을 하는 건 재미있을까?

레너드 코헨의 '수전' 노래 가사가 하나의 대답이 될 수 있을지도.

'당신은 그녀와 여행을 하고 싶어하고

정신없이 여행하고 싶어하고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마음으로 그녀의 모든 육체를 어루만져 왔으므로

그녀가 당신을 믿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라고'

결국 우리가 서로에게 한껏 무례해지는 것은 안전한 놀이터에서 하는 놀이인 것이다. '네가 마음으로 나의 육체를 어루만져 왔으므로...'


[전쟁터/놀이터] "가학적인 섹스를 좋아하세요?" 나는 장난스럽게 묻는다. "네." A는 대답한 뒤에 잠시 생각한다. "난 가학적인 것도 피학적인 것도 다 좋아. 그런데 여자들은 보통 M 성향이잖아."

에세머들 사이에 떠도는 '여성은 본래 남성에게 지배받고 학대당하기를 원한다'는 속설은 늘 나를 난처한 기분에 빠뜨렸다. 실제로 마조히스트 중 여성의 비율이 높다고 해도 사회문화적 억압의 결과일 뿐 타고난 속성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성의 감각마저도 성차별적인 문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상기하면 '여성의 몸은 전쟁터'라는 슬로건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A 옆에 있는 지금, 나는 내 몸이 전쟁터가 아니라 놀이터 같다. 전남편과의 관계에선 남편/아내, 남자/여자라는 역할극을 견딜 수가 없었는데 A의 옆에서는 서로가 남자라는 것도 여자라는 것도 다 장난 같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내가 그의 여자친구나 아내가 아니기 때문에, 'A의 여자'로서 수행해야 하는 역할이 없기 때문에, 침대에서의 가학/피학 행위가 그저 기호의 장난일 뿐 우리 관계의 본질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걸까?

문득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비교 대상이 필요하다.


[더러운 몸] 나는 A에게 묻는다. "성병 검사한 적 있어?" 그는 아무 이상도 없다고 대답한다. 어쩐지 그는 바이러스와 세균에 감염되어 있는 것이 잘 어울린다. (이 이유는 좀 더 생각해봐야겠다. 단순히 그에게 섹스 파트너가 많기 때문은 아니다. 이 오염의 이미지는 한층 더 추상적이다.) 성병에 걸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오염된 몸이라는 이미지가 내 흥미를 끈다.

우리는 씻지도 않고 섹스한다. 전남편과의 관계에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일이다. 그와 나는 하루에 수십 번씩 손을 씻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함께 사는 내내 끊임없이 집을 쓸고 닦았다. 샤워를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더라도 성적인 분위기가 형성되면 반드시 다시 몸을 씻고 서로를 만졌다.

A의 집은 지저분하다. 침실 바닥에 물건들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다. 그의 집에서 나는 늘 엉망진창으로 술에 취해 있다. 오래 전 기억이 떠오른다. 한 여자 친구와 홍대 거리를 걷던 길이었다. 거리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이 덩치가 아주 큰 개를 옆에 세워두고 있었다. 친구는 개를 보고 탄성을 지르며 다가갔다. 친구가 개를 쓰다듬자 개도 반색하며 몸을 세웠다. 기쁨에 넘친 개는 기다란 혀로 그의 얼굴을 핥아댔다. 친구는 조금도 싫은 티 없이 활짝 웃으며 개의 애무를 받았다. 날씨가 화창했다. 거리낌 없이 웃는 그의 얼굴 뒤에 새파란 하늘이 있었다. 그 장면이 너무나 눈부셔서 차마 똑바로 볼 수 없었다.

또 하나의 장면이 뒤를 잇는다.

몇 년 전 씀씀 작업실에 다닐 때의 일이다. 여러 명이 단독주택을 작업 공간으로 쓰는 곳이었다. 그 공간에 다닌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무심코 부엌에 들어갔는데, 작은 방을 작업 공간으로 쓰던 은성이 나와서 커다란 수박을 자르고 있었다. 수박 향기가 부엌을 메웠다. 서걱서걱 칼질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이상한 놀라움에 사로잡혔다. 수박을 먹어본 지도, 잘라본 지도 오래 됐을 때였다. 전남편과 함께 살 때 수박처럼 음식물 쓰레기가 많이 나오는 과일은 절대 먹지 않았다. 아니, 과일 자체를 먹어본 기억도 거의 없다. 전남편보다도 내 주장에 따른 생활 방침이었다. 냄새나고 썩고 끈적이는 건 질색이야. 나는 물끄러미 은성을 보다가 물었다.

"귀찮지 않아요?"

"저는 칼질 하면 스트레스가 좀 풀리더라고요."


[체인] 우리는 장난으로 서로의 목에 목줄을 채워 본다. A가 목줄을 했을 땐 그저 웃길 뿐이었는데 그가 내 목에 목줄을 채우고 사슬을 잡아당기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뀐다.

나도 그도 모두 옷을 입은 상태다. 평상시와 달라진 것은 목줄이라는 도구 하나뿐이다. A가 손을 돌려서 목줄을 짧게 잡는다. 뜻밖에도 지배적이고 잔인한 동작이 그에게 잘 어울린다.

얼마 전에 어깨와 등이 아프다는 나에게 그가 안마한다며 손을 댔다. 내 몸에 와닿는 악력에 깜짝 놀랐다. 그 힘을 느끼는 순간 정말로 그에게 구타 당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이에서 일어나는 폭력은 나를 파괴하는 만큼이나 너를 파괴하는 행위이기도 할 것이기에.

그가 손을 움직이고 철컥거리는 체인 소리가 울릴 때마다 나는 눈썹을 찡그린다. 침실에서 주고받는 외설적인 말은 추상적 차원에서 단어들의 체인이라면 이것은 현실에 실재하는 체인이나, 둘 다 텅 빈 기표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나는 그에게 무엇도 굴복하지 않으면서 굴복하는 시늉을 하는 것이며, 이것을 A 또한 안다. '놀이'는 얼마나 전적인 신뢰가 필요한 행위인가. 만약 A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같은 상황을 벌였다면 일말의 불쾌함도 없이 이것을 순수한 놀이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가 목줄을 잡아당기며 다른 손의 손가락으로 내 턱과 뺨을 건드린다. 그러다가 내 머리카락을 휘어잡고 고개를 젖힌다. 크게 힘들일 것도 없는 작은 동작들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가 쌓아온 관계에서 작동했던 코드들이 뒤엉키고 뒤집히는 데는 이 작은 동작만으로 충분하다. 나는 몸을 움츠리며 그를 곁눈질한다. 둘 사이에서 흐르는 시간의 밀도를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그가 내 티셔츠를 걷어 올리며 말한다.

"오리가 내 앞에서 이러고 있는 것...."


[권력-몸] 과거에는 섹스하기 전에 제모라든가 몸매를 무척 신경썼다. 상대방에게 예쁘고 매끈한 육체로 나타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요새는 어디에 털이 있든, 어디에 살이 붙었든 조금도 신경쓰이지 않는다. 한동안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가슴 중간에 발진이 잔뜩 난 상태에서도 누구 앞에서 옷 벗는 게 창피하지 않아서 신기했다. 오히려 더 흉해지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누군가에게 내 추함을 감내하라고 강요하고 싶다.


[더러운 몸] 전남편과 함께 살 때는 샴푸 하나를 사도 유해 성분을 꼼꼼하게 확인했다. 화장품 성분을 분석해주는 어플에 들어가서 어떤 유해한 성분이 얼마만큼 들어 있는지 확인하기 전에는 새로운 상품을 절대 사지 않았다. 몸에 해롭다는 이유로 향료가 들어간 제품도 쓰지 않았다. 그와 내가 얼굴과 몸에 바르는 로션은 친환경적이고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것들이었다.

우리가 살던 집의 욕실은 언제나 심플했다. 샴푸 하나, 비누 하나, 치약 하나, 칫솔 두 개. 나는 이 상태가 마음에 들었다. 물건들이 널려 있는 건 질색이야. 물질을 낭비하는 건 참을 수 없어. 꼭 필요하지 않는 것들이 시야에 들어와서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건 견딜 수 없어.

때때로 씀씀 작업실 주방에서 물병에 뚜껑이 닫혀 있지 않은 모습을 보곤 했다. 물병에 찬물을 받아서 티백을 우리는 것이었다. 나라면 먼지가 들어갈까 봐 뚜껑이 열린 상태로는 5분도 방치할 수 없었을 텐데, 물병은 으레 종일 열려 있곤 했다. 혹시 이건 버리려고 놔둔 걸까? 가만히 살펴보니 은성과 친구들이 그 물을 마시는 것 같았다. 물병에 담긴 물은 엷은 분홍색이었고 가까이 가면 풍선껌처럼 달큰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열려 있는 물병. 먼지와 기름때로 얼룩진 싱크대. 냉장고 안에서 물크러져 가는 음식들. 창문으로 들어오는 나른한 햇빛.

씀씀 작업실 부엌에 퍼져나가는 수박 냄새 속에서 나는 어떤 통증을 느끼며 서 있었다. 내가 느끼는 아픔은 나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들, 나에게서 박탈된 것들이 불러오는 감각이었다. 도대체 누가 허락하지 않고, 누가 박탈했단 말인가?

나는 내 옆으로 다가오는 전남편을 밀어내며 말했다. "척척한 것보다 산뜻한 상태로 있는 게 훨씬 낫잖아?" 여자와 남자의 섹스는 권력 관계로 오염된 행위야.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일은 하기 싫어. 키스처럼 질척거리는 일은 하기 싫어. 네가 나에게 침 묻히는 게 싫어. 내 몸과 네 몸에서 나오는 모든 체액이 더러워서 싫어.

이후에 글쓰기 모임에서 은성을 만났을 때 그는 여행기에 이런 이야기를 쓰기도 했다. "입술에 꿀과 버터가 묻은 채로 양치질도 하지 않고 잠드는 밤..."

나는 A의 몸이 세균과 바이러스로 오염되었다고 상상하며 그에게 손을 뻗는다. 내 삶에 비누로 씻어버린 것들을 전부 다시 찾아오고 싶다.


[말] A와 내가 침실에서 주고 받는 말들은 영어를 처음 배울 때 학습하는 문장과 비슷하다.

'아이 엠 어 걸, 유아 어 보이, 디스 이즈 어 데스크'

'벌리다. 넣다. 박다. 빨다. 흘리다. 싸다. 느끼다. 떨리다. 가다. 하다. 좋다.' 이 동사와 신체의 특정한 부분들을 칭하는 명사가 결합된 문장이 우리가 하는 말의 전부다. 침실의 말에선 추상적인 표현이 사라지고 눈앞의 대상을 지시하는 즉물적 기능만 남는다. 이렇게 유아적 언어로 돌아가는 환희를 관능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우리의 말은 퇴행적이라는 의미에서 천진하다.

"좋아, 너무 좋아."

천진한 말을 발음할 때의 구강기적 쾌락과 수치심. 이 감각이 우리의 말을 음란하게(=멈추지 않게) 만든다. 말이 욕망을 부르고 욕망이 말을 부른다. A와 내 몸에서 나오는 액체는 외설적인 변주곡의 증거다.


[기호] A가 목줄을 잡아당기자 내 성기가 젖는다. 문득 성당의 성체 성사가 떠오른다. 오래 전 나는 일요일이 되면 성당에 나가서 미사보를 쓰고, 성직자가 내미는 밀떡을 삼키곤 했다. 목줄이라는 기호에 반응해서 질액이라는 물질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얼마나 복잡한 은유와 유추 과정이 있을까? 아마도 그 찰나의 정신 작용은 주님의 몸이 밀떡이 되는 것보다 간단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정확하게 딱 그만큼 신비할 것이다.


[고양이] A가 나를 애무하고 있을 때 그의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가 침대로 다가와서 울어댄다. 둘이 술 마시고 있을 땐 있는둥 없는둥 소리없이 오가기만 했는데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A는 고양이가 질투하는 거라고 말한다. 고양이가 계속 울어대자 A는 작은 장난감을 침실 밖으로 던진다. 고양이는 조그만 천 뭉치를 물고 다시 돌아온다. A는 내 벗은 몸을 쓰다듬는 한편 고양이의 장난감을 다시 또 던져준다. 이 일이 몇 번 되풀이된다. 그는 지금 나와 고양이 둘과 동시에 놀아주고 있는 것이다. 동물과 똑같은 위치에 있는 느낌이 좋다.


[종로] A와 처음 섹스한 다음 날 우리는 종로에서 낮술을 한 잔 했다. 전날의 피로가 채가시지 않아서 둘 다 말수가 적었다. 여느 때보다 차분한 상태로 술 마시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우리의 대화는 충분한 간격을 두고 흘러갔다. 그는 창밖을 보다가 나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여자와 남자 관계에서 섹스는 흔히 마지막 단계처럼 얘기하잖아. 나도 같이 자고 나면 상대방한테서 흥미가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거든. 그런데 오리는 섹스하고 나니까 어떤 사람인지 더 모르겠다."

나도 나를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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