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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유 Oct 05. 2023

[단편] 당신의 쓸모 - 전편

* 11년 전       


아침일까, 새벽일까. 그 어느 경계에 선 시간이었다.

현관 번호키 소리가 다소 경박하게 나며 작고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다가왔다.      

어딜 갔다 이제 와,라고 졸리지 않는 눈을 비비며 신웅은 모르는 채 물었다.  

    

이에 민선의 단호한 음성이 돌아왔다.      


“우리 이혼해. 알잖아. 나 오빠 사랑한 적 없었어.”     


놀라지 않았다. 올 것이 왔다 싶었다. 평범한 가정인 양 연기하는 소박한 허세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말인가. 절망스러울 뿐이었다.      


지난밤, 민선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외도를 위한 외박이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그동안 민선은 술에 취해 잠이 든 후배를 혼자 둘 수 없어 같이 모텔에 있었다는 거짓말을 해왔었다. 숨기지 않은 모텔 영수증이 계속 나왔다. 분명히 미호와 함께였을 것이다.      


‘그래도 거짓말이라도 하네’라는 안도감을 느꼈었다. 쓰린 마음과 별개로 이상하게 평온했다.


그 거짓말이 신웅은 질리지 않는데, 민선은 질리고 있었다. 몇 번이고 모르는 척해줄 수 있는데, 민선은 이제 정말 그만하고 싶은 듯 이혼을 보챘다.      


“더는 의미 없어. 남들보다 떵떵 거리며 사는 건 꿈도 안 꿔.”      


숨을 한번 크게 쉬더니 다시 거칠게 몰아붙였다.      


“그냥 난,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 남들 사는 거처럼. 그게 내 꿈이었어. 애 낳고, 그렇게 내 배 아파서 낳은 내 새끼. 걔는 남들처럼 엄마, 아빠 품에서 할머니, 할아버지 사랑받으며 살게 하고 싶었다고. 나랑 다르게 평범하게.”      


한숨조차, 분노조차 나오질 않는다. 되레 미안하다. 평범하지 못한 건 사실 그녀가 아니다. 신웅이다. 얼마 전 병원에서 검사결과를 받아들었다. 설마했다.      


‘무정자증’     


그런 줄 알았다면 결혼하자고 조르지 않았을 텐데. 내 것이 아닐지라도 민선을 사랑했었다. 그런 민선이 꿈꾸는, 모두가 누리는 보통의 삶을 짓밟을 마음은 없었다.   

   

‘그런데, 너도 아니? 나도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      


그때였다. 민선의 핸드폰 진동. 수신을 재촉하는 듯 탁자를 빠르게 두드리는 둔탁하고 무거운 소리. 소리에서 왠지 모를 서늘한 냄새가 났다.      


“응, 뭐?”      



울지도 못하고 하얗게 질려버린 그녀의 손을 잡고 신웅은 한적한 응급실로 들어섰다.


비어 있는 침대들 사이 하얀 커튼이 드리워진 유독 도드라지는 침대 자리 하나. 차가운 레일소리를 서둘러 밀어 커튼을 젖히니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아...............’      


거기 있어서는 안 될 사람.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민선의 얼굴을 한 그녀, 김은하. 나의 처제.

     

“하이고, 이를 우얄꼬. 우야노.”      


은하의 시어머니가 서늘한 그녀의 곁을 지키고 서있었다. 커튼소리에 신웅과 민선과 눈을 마주치자 푸념하듯 책망하듯 곡을 시작했다. 눈물을 가까스로 채웠지만 마른 소리였다. 그 옆에 꼭 붙어선 표정이 없는 5살 남자아이. 싸늘한 은하를 발견한 건 민준이었다고 한다. 은하의 아들이었다.     

 

한번 잠들면 좀처럼 깨는 일이 없던 아이였는데 새벽에 깨었나보다. 민준은 엄마를 찾아 방문을 열었고, 잠든 할머니를 깨워 “엄마, 엄마! 할머니, 엄마가 이상해.”라고 말했다고 한다.    

  

“민준아, 이리 와, 이모부한테 와. 괜찮아.”      


신웅이 품에 아이를 안았다. 192cm 넘는 신웅의 품에 안기니 작은 아이는 파묻혔다. 울어도 울어도 소리가 새어 나갈 것 같지 않았다. 마음껏 울면 좋겠는데 아이는 울지 않았다. 신웅은 안타까움에 품에 안긴 아이를 더 꼭 안았다.      


아빠 없이 촌에서 술장사를 하는 엄마 슬하의 두 자매. 민선과 은하. 둘의 성장과정은 결혼 전부터 여러 번 들었었다.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신웅은 언제나 둘을 지켜주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민선에게 은하는 꿈이었다. 작고 소중한 그 꿈이 예쁘게 자라는 게 좋았고, 매일매일 더 크게 부풀어 오르길 바랐다. 그랬던 은하였다. 그런 은하에게 민준이, 이 아이가 생겼다. 식도 올리지 못하고 살림을 차려야 했다.      

살림을 차렸지만 남편은 늘 부재중인 집에서 은하를 시들어갔다. 임신 이후에도 그랬지만 특히 출산 이후, 아이와 자신을 노모의 집에 던져 놓다시피 하고, 무얼 하는지 얼굴을 보기 힘든 남편 때문에 은하는 늘 속이 상해 있었다.      


이제 24살. 겨우 24살. 고작 24살. 24살 은하의 예쁜 얼굴, 톡톡 튀는 생기는 술에 절여져 빛을 잃은 지 오래 됐다. 은하는 민선에게도, 신웅에게도 아픈 손가락이었다. 시한폭탄이라 생각한 적 있지만, 이건 생각지 못한 전개다. 너무 빠른 전개다.   

   

오늘 새벽, 신웅과 민선이 다투기 직전, 밤 11시 경 은하는 신웅과 통화를 했었다.    

 

“괜찮아. 요즘 누가 남편 믿고 사나? 집어치워. 나 믿고. 괜찮아. 괜찮아.”        


형부의 너스레와 위로에 기분이 다소 풀린 듯 배시시 웃고 “그래요, 형부. 고마워요. 내일 봐요”라며 전화를 끊었는데, 몇 시간 안 돼 약을 먹은 것이다.      


드문드문 집을 다녀간다는 그녀의 남편이 방문했었더라면, 아이가 차라리 밤새 울고 보챘다면, 민선이 동생 은하에게 치맥을 하자고 여느 때처럼 불러내 밤새 신세한탄이라도 했다면, 그 모진 순간이 모두의 삶에서 비켜나가지 않았을까. 차라리, 차라리 말이다. 새벽의 빛이 아닌 어둠의 힘을 빌린 순간의 감정, 그 고비를 넘길 수많은 경우의 수가 단 하나도 그녀를 잡지 못했다.             

   


*** 며칠 뒤     


“민선아, 얘기 좀 하자.”


“.................”


“이혼, 이혼 정말 할 거야?”


“그럼, 하지. 하자고 했잖아. 달라질 거 없어. 왜? 내가 불쌍해?”


“아니, 니가 불쌍하다고 이혼 못할 건 없지. 처제가 죽었는데 내가 옆에 있다고 위로가 되겠니? 오히려 없는 게 나을지도 모를 일이지. 정말 그럴 것 같긴 하다.”


“.................”


“근데 민선아, 민준이 어떻게 할 거니?”


“.................”


“내가 키워야지. 지 마누라 죽어도 안 나타나는 새끼. 믿고 있을 순 없지.”


“내가 민준이 아빠 만나볼게. 정말 민준이 키울 생각 없는지. 물어볼게.”


“.................그래? 근데, 그리고는?”


“아마 키운다고 할 것 같진 않네. 그럴 능력도 없을 거 같고. 그렇다 해도 너 혼자서는 안 돼. 무리야.”


“.................”


“엄마 잃은 상실감 못 느낄 만큼 엄마, 아빠 자리 다 채워서 잘 키우고 싶어.”


“무슨 소리야?”


“우리, 자식으로 입양하자.”


“무슨 소리야?”


“내 자식으로 입양하겠다고. 최민준 아니고 하민준으로 내 자식으로 정식 입양하고 싶어. 나 어차피 내 친자는 못 갖는 몸이야. 알잖아. 이모부와 조카로 맺어졌지만, 결국 부모자식이 될 인연이었는지도 몰라.”


“.................”     


결혼 이후 점차 표독스러워진 민선은 늘 말이 많았다. 탈도 많았다. 원망은 더 많은 사람이었다. 안타깝게도 주로 대상도 타겟도, 신웅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유독 말이 없다. 낯설지만 싫지만은 않다.      


민선은 그랬다. 인생의 굴곡은 많지만 고민은 없는 여자였다. 생각이 이렇게 많은 여자라고 생각지 못했는데, 생각이 많은 걸 보니 참 새로웠다.      


‘처음부터 생각이 많았다면 여기까지 왔을까. 너무 많아서 여기까지 온 걸까.’      


궁금했다.      


‘무엇을 재고 있을까.’      


민준이와 미호, 저울은 어디로 기울까. 그 저울에 나는 없겠지, 잠이 든 민준을 옆에서 신웅은 그런 민선을 잠자코 바라봤다. 생각은 길어졌다. 밤이 기울었다. 기울다 지친 밤이 새벽에 이르렀다.      


“그래, 그러자. 이혼 없던 일로 해. 물어 보나마나겠지만, 물어는 보자. 민준이 키울 건지. 사랑으로 키운다면 못 믿겠지만, 친부의 정을 믿어보고. 개새끼. 지 새끼, 지 마누라도 없는데 나 몰라라 하면 사람 새끼 아니니, 우리가 키운다고 하자.”     


이때는 ‘우리’라고 하는구나, 이렇게 되어야 우리는 ‘우리’가 되는구나, 이렇게라도 ‘우리’가 되어 얼마나 좋은 지, 너는 알까, 신웅은 생각했다.      


기묘한 게 사람의 인연이다. 그렇게 돌아 다시 만났다. 너도, 나도, 내 자식도. 그래, 알 수 없는 게 사람의 인생이다.


끝이라고 생각한 순간 생각지도 못한 다시 새로운 시작이라니. 참 복잡하고 잔인한 게 사람의 감정이다. 누군가의 죽음, 누군가의 상실이 이렇게 새로운 싹을 틔워 희망을 안겨주다니. 슬퍼해야 할까. 고마워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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