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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유 Oct 05. 2023

[단편] 당신의 쓸모 - 후편

그렇게 숨 쉬듯 시간은 흐르고 눈을 감은 듯 뜬 듯 11년을 보냈다. 그렇게 영원히 아침일 줄 알았는데, 다시 밤이 됐다.      


평범하게 어린이날도, 크리스마스도. 우리 아이의 엄마로 아빠로 지냈는데, 몇 년을 토닥거리면서도 여행도 가고 잘 지냈는데. 민준의 마음도, 신웅의 마음도 채우며 사는 줄 알았는데 민선의 마음까지 채우지는 못한 모양이다. 신웅은 아빠였고, 남편이었는데, 민선은 엄마는 됐지만 와이프가 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모든 걸 가질 수 없는 게 인생이라지만, 내가 너무 과한 걸 바랐나? 다들 그러고 사는데, 나는 왜 그게 욕심일까.’      


이건 너와 나, 우리의 필요다,라고 생각했는데 그날이 오고 알았다. 나와 우리의 필요였지만, 너의 필요는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 이혼해.”


“그래, 그러자.”    

 

신웅은 민선의 텅 빈 마음과 보잘 것 없는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민준이 걱정이었지만 양육권을 고집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엄마가 필요한 나이이기도 했지만 생물학적 끈이 없다는 점이 신웅으로 하여금 부정(父情)을 내세우기 힘들게 했다. 벼랑 끝에 선 민준의 손을 잡기에 스스로 떳떳하지 못한 느낌이었다.   

   

‘혼자 사는 데 많은 게 필요하겠어?’     


살던 아파트는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았다. 민준에게 달라지는 것 없이 오직 아빠, 자신의 부재 하나만 느끼게 하고 싶었다. 최대한 보잘 것 없는 존재였길, 또 비할 수 없는 커다한 존재였길 상반되는 두 가지의 진심 모두를 갖고 바랐다.      


이혼은 간단했다. 쌓일 만큼 미운 정이 있지도 않았기에 되돌아보기 무서운 미련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법원가는 날은 손을 항상 잡았다. 민선도 뿌리치지 않았다. 그렇게 몇 차례의 방문을 더한 뒤 종지부를 찍었다.      


법원을 나설 때마다 그 어떤 때도 겪어보지 못한 애틋한 마음으로 둘은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눴다. 밥 이상 무엇도 아니었지만 공허한 결혼기간을 대신할 추억으로 삼기엔 충분했다.      


서류가 정리되자 신웅은 집을 나섰다. 얼마간의 양육비를 민선에게 보내기로 했다. 모든 게 너무나 쉬웠다. 민준은 신웅에게도, 민선에게도, 이유를 묻지 않았고 떼를 쓰지 않았다. 오래 전 친모(親母)의 죽음 앞에서도 까닭을 묻지 않고, 울음을 내지 않았던 아이였다. 그러니 어떤 내색에도, 내색 없음에도 서운할 이유가 없었다.



      



이혼 후, 신웅은 다니던 회사를 정리하고 나와 동네에 작은 정육점을 열었다. 발골기술을 배워 좋은 고기를 썰어 팔았다. 민준에게 반찬감을 넉넉하게 자주 보냈다.      


아직 초등학교에 다니던 때 민준은 정육점에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자주 했다. 하교 후 가게 문을 밀고 들어와 학원을 간다고, 가지 않는다고 말을 건네고 한쪽 소파에 앉아 잠자코 게임을 했다. 신웅은 고기를 다듬는 동안 민준은 휴대폰을 손에 쥔 채 잠이 들기도 했다.      


“어머, 노총각인줄 알았더니 제법 큰 아들이 있네.”     


호들갑스런 아주머니 손님들의 오지랖도 조용히 즐겼다. 더 이상의 설명은 원하는 이도, 할 이유도 없었다. 그게 그저 마음이 편했다. 모두에게.      


어렸던 아이는 중학생이 되었고, 가게에 오는 일이 더 빈번해졌다. 좁은 동네에서는 민선의 이야기가 자주 들렸다. 신웅에겐 애정을 주지 않던 전처의 이야기였지만, 아이도 들었을까를 생각하면 다소 겁이 나는 이야기들이었다. 아이에게 아이엄마의 이야기를 묻지 않았고, 아이도 엄마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민선에게 전화가 왔다.      


“오빠, 민준이 학교 좀 가봐. 친구들이랑 싸웠대.”     


맞은 아이부모는 학교를 찾아왔고 민준은 사과하지 않았다고 한다. 신웅은 전화기를 내려놓고, 고기를 썰던 칼을 잘 닦아 정해둔 자리에 두고 옷을 갈아입으러 집으로 갔다. 가장 말끔한 옷을 입고, 학교로 갔다. 사춘기 사내아이를 둔 부모라면 당연히 감내해야할 부분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학교에서 전해들은 얘기는 생각보다 많이 거칠고 불쾌했다. 아이들의 이야기지만 전해 듣는 마음이 몹시 상했다.      


싸운 친구들은 서로 집도 왕래하며 친한 편이라 민준의 속사정도 아는 애들이었다. 사이는 어느 순간부터 소원해졌다고 했다.


돌아다니던 민선에 대한 풍문이 한 아이의 부모 누군가의 귀에 닿았고 자신의 아이에게 “민준이와 같이 놀지 말라.”고 말했다고 했다. 이 모든 게 민준이 감내해야할 몫으로 돌아왔다. 기분이 썩 좋지 못한 민준의 귓전에 결정적으로 꽂힌 건 “몸 파는 년”이라는 말이었다고 했다.      


지난 이야기를 듣는 신웅의 얼굴도, 가슴 속 혈관들도 불이 붙는 듯 화끈하게 들고 일어섰다. “화날 만했네요. 저도 주먹이 쥐어지는 이야기네요.”라는 말과 함께 “치료비는 부담하겠습니다만, 사과는 하지 않겠습니다. 아이에게도 사과하라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을 마치고 교무실을, 학교 운동장을 나섰다.     

 

민준이 너무 힘든 사춘기를 보내고 있었다. ‘내가 그동안 무심했구나’라는 자책이 신웅을 세차게 휩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웅은 그날 이후 민준에게도, 민선에게도 속내를 비치지 않았다. 속내는 속에 있어야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이런저런 말에는 이골이 났지만, 진실이 아니면 그만이다. 부지런히 시계는 그 후에도 시간을 흘려보내다 다시 멈췄다. 잔인한 삶의 현실 무게다.    

  

“나, 결혼해.”


“.................”


“재혼, 할 수 있잖아.”


“그래, 할 수 있지. 누구랑.”


“알면서 왜 물어.”      


그래, 알지,라고 신웅은 생각했다. 알고 있는 게 문제였다. 신웅이 알고 있는 그 사람, 미호와 혼인관계로 묶인다는 게 기가 찼다. 우리가 기어코 인연이 아니었지만, 너희는 기어코 인연이었던 거야?,라고 묻고 싶었지만 물을 수 없었다. 미호는 아니지 않니?,라고 반문할 수도 없었다. 알지만 언급하고 싶지 않은 이름이었다.    

  

“민준이는”


“데리고 가야지”      


말 같잖은 소리에 화가 났다. 미호에게 물어봤냐는 말은 무의미했다. 혼자만의 생각이든, 둘이 나름 내린 결론이든. 그 작자가 데리고 오라고 했든, 아니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신웅이 아는 한 미호는 민준의 생부와 다를 바 없었다. 자매가 보는 남자 보는 눈이 비슷한 탓이다. 예견된 민준의 처지가 너무 안쓰럽고 위태로웠다.


민준은 중학생이 되도록 어느 가정의 울타리에서도 안전하게 둥지를 틀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냥 둘 수 없다.      

 

“민준이는 내가 키우게 해줘.”


민선은 미호와 이듬해 봄, 결혼을 했다. 일요일 오후 4시. 한적한 시간, 식을 올린 민선은 예상대로 아름다웠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신웅과 민준도 참석했다. 사진을 찍거나 가까이에 앉아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하객이 얼마 없는 시골의 결혼식장에서 둘의 존재는 부각되었다. 쏟아지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슬그머니 식이 끝나기 전에 빠져나왔다.      


“엄마, 예쁘다. 그치?”


“엄마는 원래 예뻤죠.”  

   

민준과 신웅은 처음으로 닮은 표정을 지었다. 손을 잡지는 않았지만 나란히 걸었다. 이른 봄, 곧 해가 질 테다. 그래도 봄은 오고 여름도 올 테지. 하지만 아직 공기가 차다. 엄마가 없고, 와이프가 없는 민준과 신웅은 가게로 갔다.   

   

“오늘은 든든하게 라면에 차돌박이를 넉넉하게 넣어 끓여 먹자.”     


신웅은 이야기했고, 민준은 “응”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모든 게. 더할 것 없는 하루가 간다. 더할 것 없는 하루가 이대로 끝이길 바란다. 노곤한 춘곤증을 견디어 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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