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공간을 잃은 자들의 행선지
* 이 글에는 영화와 관련된 내용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초등학생 때 나와 내 친구들은 강남역을 마치 집인양 뻔질나게 돌아다녔다. 너무 많이 와봐서 눈감고도 지하철역을 나와 얼짱 스티커 사진을 찍으러 갈 수 있었고 교보문고는 열을 식히는 공간이었으며 아트박스에선 반짝이는 것을 보는 까마귀들처럼 꺅꺅댔다. 매번 같은 행선지였지만 우리는 그때마다 다른 기분이었고 그때마다 다른 것들로 고민하고 있었고 그때마다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만났다. 그러니까 그때의 ‘강남역’은 나의 첫 번째 기억공간이었던 것이다.
공간이라는 것은 신기해서 단순히 한 가지의 기억이 남는 것이 아니라 공간 속의 인물, 기분, 대화, 날씨, 감정까지 고스란히 남는다. 여전히 내가 서울의 많은 곳들을 돌아다니는 하는 이유는 하나다. 처음 갔던 장소에 남겨뒀던 기억을 리셋시키거나 아니면 다시 되돌리고 싶어서.
2008년 ‘강남스타일’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기억공간을 잃어버린다. 불과 한 달 전에 자주 가던 곳들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그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무한리필’이라는 이름이 잔뜩 붙은 가게들이 나타났고 처음 보는 사람들이 어린 우리를 치고 다니기 시작했다. 어렸지만 자기 방어적인 나는 서서히 ‘강남역’을 향해 걷던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2016년, 기억이 흐릿해질 정도로 강남역을 찾지 않았을 때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난다. 강남의 노래방 화장실에서 여자 한 명이 찔려 죽는 일. 그리고 그 노래방이 나와 내 친구들이 뻔질나게 다니던 수 노래방이라는 걸 알았을 때 가슴에 칼을 찔린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 칼을 내가 내 손으로 뽑았을 때. 정말이지 동맥에서 터져 나오는 피처럼 많은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내가 마지막으로 그곳을 갔던 복장, 나와 함께 했던 친구들, 다 같이 그곳에서 무료로 주는 싸구려 아이스크림을 퍼먹었던 일들. 피해자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들이 너무 생생하게 나에게서 쏟아져내렸다. 그리곤 만약 그날 그때 나와 내 친구들이 거기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에 쉽사리 잠에 들지 못했다.
아직까지도 나는 강남역을 가지 않는다. 아니 가지 못한다는 말이 맞을 거다. 강남역을 지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나는 밖을 바라보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기억공간이라는 것은 이렇게나 강력하고 파괴적이다. 이런 공간이 생겨버리면 전처럼 새로운 공간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한다. ‘노매드랜드’는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다. 기억공간을 잃어버린 자들이 헤매는 이야기다.
영화 속에서 ‘펀’은 자신이 사랑하는 기억공간을 잃어버린다. 영광을 잃어버리고 파산한 회사, 남편의 투병생활 그리고 끝내 맞이한 남편의 죽음. 그녀에겐 많은 기억공간이 있었겠지만 집의 뒷문을 열면 나타나는 뒷마당이 그녀가 가장 사랑하던 기억공간이었을 것이다. 눈을 감고 문을 열어도 넓은 들판이 보이고 불어오는 바람을 몸으로 기억해낼 수 있는 공간은 쉽사리 잊을 수 없다. 그랬기 때문에 그녀는 고통받는다. 그녀의 목조주택 만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녀의 남편, 그녀의 짐들 그리고 기억들이 전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런 상실은 그저 그녀가 스스로의 기억을 잊어버리지 않으려 애쓰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녀가 기억공간을 기억하듯이 그녀를 기억하던 기억공간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녀는 자꾸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그녀가 ‘집’을 찾아 떠나는 여정으로 이해하곤 한다. 사실은 '노매드랜드'는 그녀 자신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에 가깝다. 그녀를 기억하는 유일한 공간을 잃어버리고 그녀는 나아가기 시작한다. 자신이 기억하기 위한 공간을 찾아 떠나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중반부에 떠돌아다니는 ‘펀’에게 언니가 묻는다. 힘들고 추레하게 돌아다니지 말고 자신의 ‘집’에서 지내면 안 되냐고. 그리고 ‘펀’은 이렇게 대답한다. Home과 House는 다르다고. 그 집은 언니의 Home일수는 있어도 절대 ‘펀’의 Home이 될 수 없다.
영화의 초반엔 그녀가 마주하는 자연의 풍경들을 계속 보여준다. 아름답고 멋지지만 그녀가 꼼꼼히 기억하는 집의 뒷마당과는 비 할 수 없는 것들. 그녀는 그 속에서 침묵한다. 아름다운 장소로도 채워지지 않는 상실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계속해서 공간을 부유한다.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못하고 자꾸 홀로 남는다.
그렇게 부유하는 그녀에게 도움을 주려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그녀가 처음으로 마음을 주기 시작하는 인물인 ‘데이비드’가 나타나고 영화는 조금 다른 공간을 향해간다. 영화는 그녀를 자꾸 다른 이의 Home으로 데려간다. 그녀가 당도한 데이비드의 집이나 언니의 집은 영화 내에서 천천히 그리고 꼼꼼히 보여진다. 마치 그 정도의 공간이라면 그녀의 상실을 채워줄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 사실 우리가 보기엔 데이비드의 집이나 언니의 집은 안정되고 따뜻하고 근사하다.
하지만 ‘펀’은 번번이 도망친다. Home과 House가 다른 것처럼 그녀에겐 집을 잃어버린 것이 단순히 상처가 아니라 그녀의 존재를 파괴시키는 트라우마이기 때문이다. 남들이 다 잠든 시간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고 떠나는 ‘펀’을 바라보는 것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그녀의 트라우마를 꺼내어 다시 부검하는 과정을 우리가 지켜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결국 차에 올라탄 그녀가 향하는 공간은 돌고 돌아 그녀의 Home이었던 엠파이어다. 그녀가 그녀의 기억공간을 애도하는 방식은 이런 것이다. 또 다른 Home을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니라 결국엔 회귀하여 그 기억공간이 사라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녀의 애도가 마침내 끝났을 때 그녀는 그제서야 모든 것을 처분하고 다시 떠날 수 있는 것이다. 새로운 기억공간과 새로운 그녀를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