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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리씨 Jun 23. 2020

우린 모두 김지영이었다

[82년생 김지영 review] 벗어나기 어려운 굴레

여자이기에 공감이 갔다고 할 수 있는 책 <82년생 김지영>. 처음 출간되었을 때부터 시작해 '김지영'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남녀 사이에서 지독한 갈등을 유발한다. 하지만 성별이 아닌 인간으로서 이 책을 보면 조금은 이해하고 관심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여자이기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책을 읽으며 나의 관점을 흘려본다. 



나는 김지영이다


‘김지영’. 실제 ‘나’의 이름은 아니지만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은 『82년생 김지영』속에서 다양한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982년, 여아 100명 당 남아 106.8명의 시대에 아들을 중해하는 가정에서 태어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남동생과 차별받으며 서럽게 살아왔다. 그녀는 학생이 되어서도 선생님들의 희롱과 기억나지 않는 선행만으로 학원 남학생에게 썅년 소리를 듣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직장에선 남자들 사이에서 살아남는 것은 물론 육아휴직도 마음 편하게 받기 어려운 현실에 부딪쳤다. 


어쩌면 ‘김지영’의 일생은 특별한 것 하나 없이 평범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독자들이 그녀에게 감정 이입을 하고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여자들이 태어나서 학생, 직장인, 엄마, 아내로 살아가며 받는 시선이나 삶들을 하나로 모아놓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누구의 인생이라고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사연을 담고 있는 이야기들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밖에 없던 요소가 된 것이다. 그리고 과거와 달라졌다고 하나, 전과 비슷한 사회 속을 걸어가며 아무것도 변화되지 않은 사회에 답답함을 느끼기도 한다. 여기에 일반 소설에 비해 많은 수치의 통계자료들은 스토리에 현실성을 부여하고 문제점에 대해 자각하도록 했다. 


한 편, 이유를 알 수 없이 ‘김지영’을 통해 그녀의 어머니이자 정대현 씨의 장모님인 오미숙 씨, 대학 시절 같은 동아리를 하던 선배 차승연이 등장한다. 그 외에도 김지영 씨 주변의 여자로 감쪽같이, 완벽하게 그 사람이 되기도 했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했던 그녀들은 ‘김지영’을 통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뿐만 아니라 ‘김지영’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그녀들의 흉내를 빌려하기도 한다. 전업주부가 되기까지 34년의 인생을 묵묵히 삭혀오던 그녀가 이제는 목소리를 내고 싶어 하는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소리를 ‘김지영’이 대신 전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김지영이지만김지영이 아니고 싶은


‘김지영’의 언니 ‘김은영’, 교탁으로 날아간 실내화가 김지영 때문이 아님을 말해준 아이, 남자 먼저 먹던 급식 순서를 바꾸자고 이야기 한 유나, 복장 규율에 항의했던 친구, 바바리맨을 잡았지만 징계를 받은 일진, ‘김지영’을 도와주고 지영의 잘못이 아니라고 해주었던 여자, 회사에서 꿋꿋하게 자리를 지킨 김은실 팀장. 연관성 없는 이들은 여성이며, 차별에 맞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전달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이들 역시 ‘김지영’과 같은 삶을 살고 있거나, 살았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김지영’과 달리 자신들에게 처해진 상황이나 불리함에 맞서 목소리를 냈다. 이처럼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회가 여성에게 내린 젠더 의식을 부각하고, 이를 타파하며 우리가 나아가야 할 지향점을 제시했다.


소설 속 이야기이기에 픽션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실제로도 많은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여성과 남성의 차별에서 오는 불합리가 아닌 평등을 위하여 ‘페미니즘’, ‘페미니스트’를 통해 일상은 물론 인터넷에서도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다. 지금까지 의문도 갖지 못한 채 침묵으로 일관하며 따르기만 했던 여성들이 지금은 달라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당장의 큰 변화는 가지고 오지 못하거나 오히려 바바리맨을 잡았음에도 징계를 받은 일진처럼 더 큰 불합리함이 찾아올 수도 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외치는 ‘김지영’ 임에도 ‘김지영’이고 싶지 않은 그녀들의 목소리를 들어줄 때가 왔다.      



방관자이거나, 가해자이거나.    


 “김지영 씨가 선택해서 내 앞에 펼쳐 놓은 인생의 장면 장면들을 들여다보며 나는 내 진단이 성급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틀렸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하는 세상이 있다는 뜻이다. 내가 평범한 40대 남자였다면 끝내 알지 못했을 것이다.”     

김지영 씨 부부의 상담을 들어주던 정신과 의사는 김지영 씨의 일생을 들으며 자신이 알지 못했던 세상의 존재를 알아차리게 된다. 단지 출산과 육아의 주체가 아닌 남성이기에 이것들을 이해하지 못해 찾아오는 무지함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그렇기에 정신과 의사는 더 이상의 발전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들어주기만 할 뿐, 무지함을 벗어나 알아가고자 하는 의지조차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이어 김지영 씨가 다니던 회사의 50대 남자 부장은 김지영 씨에게 끊임없이 얼굴에 대한 평가는 물론 19금 유머를 남발하기도 한다. 그리고 대학생인 딸을 데리러 먼저 회식 자리를 떠난다.


이들의 모습은 자각을 했든, 하지 않았든 불평등한 사회를 바꾸기 위한 특별한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단지 여성들이 처한 환경을 알고 있음에도 함께 목소리를 내지 않는 방관자와 여성들을 구석에 몰리도록 만든 가해자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들은 내 아내와 딸, 그 외의 다른 여성을 분리시킴으로써 자신에게 속한 여성만을 보호하고 있었다. 


‘2016년’이라는 목차에서 남자 정신과 의사의 서술 등장과 함께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도 육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여직원은 여러 가지로 곤란한 법이다. 후임은 미혼으로 알아봐야겠다.’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자신의 아내가 원하는 일을 하길 바라는 것과 동시에 기혼 여성에 대한 제약을 형성하게 된다. 그렇기에 반전을 줌과 동시에 남성은 여성보다 우위의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결국 기득권층이 될 수밖에 없는 남성과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하는 여성, 이들 사이에서 남성은 피해자라고 하기엔 부족한 면모를 보여준다.      



'나답게' 살기 위한 몸부림


대한민국은 현재 ‘나답게’ 살기를 권장하는 사회이다. 하지만 이 사회 속에서 여성으로서 ‘나답게’ 살아가기란 굉장히 어렵다. ‘나’의 이름을 가지고, 행복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은 여성으로서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대부분의 여성은 결혼이나 육아를 통해 ‘나’를 잊거나 지워진 채 ‘김지영’이라는 요즘 애 엄마이자, 누군가의 아내⦁며느리, 경단녀 (경력단절녀)로 어디에나 있을법한 인물로 살아가게 된다. 이를 벗어나고자 ‘페미니즘’, ‘페미니스트’라는 이름 아래 자신들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을 『82년생 김지영』이 함께했을 뿐이다. 남자와 여자를 양극에 세우고 대립하게 하는 구도가 아닌, 여성의 권리 및 기회의 평등을 추구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김지영’이 아닌, ‘나다운’ 이름을 가질 권리를 갖고 ‘나답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여성들의 이름을 되찾고자 하는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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