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모종의 사건을 계기로 짱이가 검둥이에게 진정으로 마음을 열게 되었다. 검둥이가 짱이를 구해준 것이다! 도대체 누가 이런 산골짜기까지 와서 강아지를 유기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동네에 하나 둘 유기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다행히 동네 인심이 넉넉해서 유기견들은 길동이와 길순이(소형 믹스견, 길에서 발견 돼었기 때문에 길-동이와 순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꺽정이(진도 믹스)라는 이름을 얻은 채 마을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다. 세 마리의 강아지들 중 꺽정이는 특유의 카리스마로 금방 대장 자리를 꿰찼다. 꺽정이를 필두로 세 마리의 강아지들이 우리 마을까지도 정찰을 나오곤 한다고 검둥이네 집 선생님이 말씀해주셨다. 검둥이와 꺽정이가 마주쳤을 때 둘 사이에 어찌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던지, 선생님이 검둥이를 허겁지겁 집으로 들어오라고 부르셨다는 모양이다.
사건이 있던 그 날도 어김없이 짱이와 산책을 나서는 참이었다. 검둥이네 집 앞을 지나자 짱이 냄새를 맡고 달려 나온 검둥이가 담장 위에 발을 올리고 배웅해주었다. 검둥이를 지나치고 얼마나 지났을까, 돌연 내 눈 앞에 세 마리의 개가 나타났다. 말로만 듣던 꺽정이 삼총사를 마주친 것이다. 꺽정이는 우람한 어깨를 자랑하며 우두커니 서서 짱이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강아지들은 언어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몸짓으로 이야기 한다. 이것을 ‘카밍 시그널’이라고 한다. 나는 강형욱 훈련사는 아니지만, 적어도 꺽정이가 짱이에게 공격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것 정도는 캐치할 수 있었다. 강아지를 키워본 적이 없는 사람이 보더라도 꺽정이가 짱이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음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꺽정이는 짱이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꼬리를 하늘 위로 한껏 추켜올렸다. 그르르르, 울대에서는 끓는 소리가 났다.
꺽정이는 나와 짱이를 그냥 지나쳐 보내지 않을 생각이다. 명백한 위협이다. 나는 무서운 예감에 짱이를 끌어안았다. 내 품안에서 짱이는 등을 옹송그렸다. 꼬리는 이미 가랑이 사이로 말려들어간 참이다. 짱이는 덜덜 떨고 있었고, 무서운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등을 보이는 순간 당장 꺽정이는 우리 둘을 덮쳐올 것이다. 그렇다고 앞으로 갈 수도 없다. 그야말로 사면초가다. 꺽정이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겁내고 있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다리를 넓게 벌리고 섰다. 꺽정이를 자극하지 않으면서 최대한 버티는 수밖에 없다.
그때였다. 돌연 검둥이가 나타났다. 검둥이는 꺽정이의 뒤로 달려와 목덜미를 물고 순식간에 바닥으로 깔아뭉갰다. 목덜미에서 입을 떼지 않은 채로 검둥이는 앞발로 꺽정이를 꾹 누르고 선다. 리더인 꺽정이가 당하자 길동이와 길순이는 우왕좌왕한다. 꺽정이는 애처롭게 낑낑거리기 시작한다. 방금까지 적의를 드러내던 모습과는 영 딴 판이다. 나는 짱이를 품에 안은 채로 천천히 검둥이와 꺽정이 옆을 지났다. 짱이가 뛰어가는 게 더 빠르겠지만 불안해서 계속 안기로 한다. 집으로 들어서는 커브를 돌기 전 뒤를 돌아보니 검둥이는 꺽정이를 물었던 목은 놓아준 모양이다. 하지만 여전히 발은 꺽정이의 위에 놓여 있다. 잗다란 길동이와 길순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꺽정이는 검둥이에게 배를 보이고 있다.
클리셰로 가득한 이야기이다. 늘 새초롬한 짱이와 한결같이 그 곁을 지키던 검둥이. 검둥이가 위험에 처한 짱이를 구해주고 그 이후에 둘 사이가 가까워졌다니, 90년대 드라마에나 나올 것 같은 촌스러운 설정이다. 이후에 꺽정이가 설욕을 씻기 위해 한 번 더 나와 짱이 앞을 가로 막았지만, 또 다시 검둥이가 나타나 사건을 종결지었다면 누가 믿어줄까? 때로 인생은, 아니 견생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