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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겁쟁이 선비 Dec 30. 2023

꽃꽂이 했던 남자

피울 수 없는 꽃을 키웠어~♪




손재주 없는 내가 만들었지만 사진으로 보니 생각보다 예쁘네? 서양꽃꽂이 '대칭삼각형'


스트레스 (독특하게) 풀려고, 기술 배워서 사업해 보려고, 이성에게 잘 보이려고 마음먹었던 꽃꽂이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뭐 갖고 싶다, 뭐 먹고 싶다, 뭐 하고 싶다 처럼 의사표현, 자기주장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던 내향형 자아는 군 전역 후 고학점과 장학금에 눈이 돌아간 캠퍼스 라이프와 치열한 취업준비 기간을 거치면서 추진력 하나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강단 있게 바뀌었다. 그 덕에 소요되는 가용 예산과 투입되는 시간을 고려한 계획이 수립되면 고민하지 않고 바로 실행으로 옮겼다.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불확실한 리스크가 있으면 절대 돌다리를 건너지 않는 나는 J 그 잡채. 하지만 최근에는 대충 두들겨보고 조금 흔들려도 그냥 건너간다. 물에 빠져도 중심을 잡고 다시 물 밖으로 나오면 되니까.) 그렇게 5월에 다녀온 '관음성지 낙산사 템플스테이'와는 별개로 꽃꽂이를 솜씨 좋게 배우기 위해서, 화훼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것저것 찾아보는 것부터 시작했다.


나의 추진력과 실행력의 원천(이었던 것). 근데 진짜 고학점과 장학금 뽕맛은 한번 맛보면 눈이 돌아갈 수 밖에 없다


먼저 꽃꽂이를 전문으로 하는 인력, '플로리스트'라는 직업에 대한 탐색부터 시작했다.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고 시작해야 나중을 생각할 수 있으니까 가장 기초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직업 정의부터 찾아봤다. 한국고용정보원 워크넷의 『한국직업사전』에 따르면 '화훼장식가'는 꽃을 포장하여 판매하거나 행사장에 화훼장식을 하는 등 용도에 적합하고 아름답게 꽃을 연출하는 사람이다. 비슷하게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는 '화훼장식 전문성을 가지고 화훼류를 주 소재로 실내 · 외 공간의 기능성과 미적 효과가 높은 장식물의 계획, 디자인, 제작, 유지 및 관리하는 기술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다. 자세하게는 '화훼가 시들지 않도록 적정 온도와 습도를 갖추어 보관하고, 고객의 요청에 따라 꽃을 포장하여 판매하며, 단순히 꽃을 장식하는 것뿐 아니라 꽃 장식품의 경제적 효용 가치를 높이기 위해 꽃의 재배, 유통, 소재에 대한 지식과 더불어 식물의 학명과 꽃의 종류 등에 대한 지식을 습득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범주의 '플로리스트'는 플라워(flower)와 아티스트(artist)의 합성어로 꽃과 식물에 관한 다양한 전문 지식을 이용해서 꽃을 디자인하는 사람을 뜻한다. 이를 종합해 보면, 우리가 화훼 전문가로 부를 수 있는 '플로리스트'는


화훼를 관리하며 필요에 따라 화훼로 이것저것 만드는 사람이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미적 감각과 색채 감각이 있어야 하며, 새로운 아이디어로 의도와 콘셉트에 맞는 작품을 제작할 수 있는 창의력이 요구된다. 그렇기에 해당 키워드로 검색하면 관련 전공으로 조경학, 원예학, 식물학, 컬러리스트, 공간디자인, 디스플레이 등이 나온다. 그렇다, 나랑 맞는 게 단 하나도 없다! 특히 예술형과 탐구형의 흥미를 가진 사람에게 적합한 이 분야는 예술 감각이 심각하게 결여된 현실주의, 논리주의, 계획형 인간인 나와 상극이고 정반대인 대척점에 있다. 비록 미적 감각이 제로에 수렴하지만 그럼에도 하기로 마음먹고 추진한 이상, 소기의 목적 달성을 위해 '근성과 노오오오력으로 한번 부딪쳐보자!'는 심정으로 플로리스트가 되기 위한 방법들을 알아보았다. 그럼 플로리스트라는 자격을 어떻게 하면 갖출 수 있을까? 무엇을 해야 플로리스트라고 인정받을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딱히 없다.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흔히 전문가라 일컬어지려면 그에 준하는 '교육'과 '검증'을 받았는가, 소위 특정 '학위'와 '자격증'의 여부를 쉽게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화가가 되는데, 래퍼가 되는데, 배우가 되는데, 작가가 되는데 *인허가를 받을 필요 없는 것처럼 꽃집 차리는데 특별한 자격 요건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물론 사업자 신고는 해야겠지만.) 그림을 그리면 화가고, 랩을 하고 음반을 내면 래퍼고, 무대에서 연기를 하면 배우고, 글을 쓰고 책을 내면 착가인 것처럼 화훼로, 꽃으로 부가가치를 창출하면 플로리스트다.

*당연하게도, 이와 달리 의사, 약사, 판사, 검사, 회계사, 감정평가사 등 국가에서 직접 운영·관리하거나 고용하는 일부 직종은 검증된, 엄격한 자격 조건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법적으로' 별도의 시험과 학위, 어학 등 자격 조건이 필수인 직종이 있는 반면, 플로리스트는 필수가 아닌 직종인 셈이다.


그렇다고 자격증이 없는가? 당연히 있다! 플로리스트 역시 화훼에 특화된 영역이기 때문에 업(業)을 수행하기 위해 전문지식을 필요로 한다. 그 지식을 얻기 위해 커리큘럼과 학위가 있는 것처럼 대학에서 전공으로도 배울 수 있고, 국가와 민간에서 운영하는 교육과정(NCS)과 검증된 시험을 통해 자격증을 취득할 수도 있다. 직장인인 내 입장에서 전자는 쉽게 고를 수 없는 선택지기에 자연스럽게 후자를 알아보게 되었다. 그중 국가에서 운영하는 자격증 시험은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시행하는 '화훼장식기능사'와 '화훼장식산업기사', '화훼장식기사'가 있고, 민간에서 운영하는 자격증 시험은 사단법인 한국플로리스트협회에서 운영하는 플로리스트 자격시험(각 1급, 2급, 3급)이 있다. (그 외에도 민간에서, 해외 기관에서 관련 자격시험을 운영하는 곳들이 추가로 있을 수 있다.)


화훼장식기능사 실기과제 '서양꽃꽂이' 中 부채형. 없는 재능, 노력으로 극복 중






나는 이 둘 중 상대적으로 응시 비용이 저렴한 *화훼장식기능사 취득을 목표로 공부를 시작했다. 기능사 시험은 1차 필기시험과 2차 실기시험이 있는데, 1차 필기시험은 화훼장식재료 및 형태학, 화훼장식 제작 및 유지관리, 화훼유통 및 경영론 과목에서 출제되는 객관식 4지 택일형 60문항을 60분 안에 풀어서 최종 100점 만점에 60점 이상 받으면 합격이다. 필기시험 합격 후 실기시험을 응시할 수 있는데, 실기시험은 화훼장식디자인 실무로 2시간 이내에 코사지와 구조물 꽃다발, 서양 꽃꽂이, 동양 꽃꽂이까지 총 4가지 작업물을 만들어 제출하고 100점 만점에 60점 이상의 평가를 받으면 최종 합격이다. 필기시험의 응시 합격률은 80% 안팎, 실기시험의 응시 합격률은 50% 안팎으로 응시 난이도 자체는 필기도 쉽지 않지만 실기는 더더욱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화훼장식기능사와 달리 화훼장식산업기사는 기능사 자격 취득, 유사 직종 실무경력, 관련 학위 등이 응시자격 조건이다. 화훼장식기사 역시 마찬가지로 숙련도가 높은 국가공인 자격 '기사'이기 때문에 선행조건을 만족하지 않으면 시험을 볼 수 없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이 숫자는 숫자일 뿐이고, 일단 필기시험부터 합격해야 실기시험에 응시할 수 있으니까 냅다 시험 접수부터 했다. Q-net에 접속해서 가장 빠른 접수일자부터 필기시험 신청했고, 그나마 집에서 상대적으로 가까우면서 응시 자리가 남은 곳이 한국산업인력공단 서부지사여서 그곳에서 *시험을 봤다. 집에서 구파발까지 멀기도 하고 시험이 아침 일찍이어서 필기시험 당일은 연차를 소진하고 시험 보러 갔다. (나는 연차 소진할 만큼 진심이었다.) 컴퓨터로 응시하기 때문에 시험 종료 후 나오면 바로 합불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데, 78점으로 첫 응시에서 한 번에 바로 합격했다. (필기시험 공부는 성안당에서 출판한 화훼장식기능사 교제로 한 달 정도 주말마다 2시간 안팎으로 공부했다.) 그렇게 2021년 4월 20일 (화) 필기시험에 합격한 직후 '숨고' 플랫폼을 통해 실기를 배울 수 있는 스튜디오와 선생님을 찾았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집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선생님을 만나 매주 토요일마다 꽃집에서 수업을 받았다.

*공단 지사마다 여러 기능시험이 동시에 시행되기 때문에 원하는 날짜와 응시 장소를 고르기 위해서 접수시간에 맞춰 빨리 신청해야 한다. 마감되어서 자리 없으면 시험에 응시조차 할 수 없다.


서투르지만 진심모드로 열심히 배웠다. 찐 열정맨이야~~






첫 수업에서 서양꽃꽂이 반구형을 만들었는데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전편 글 마지막에 첨부된 작품이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든 꽃 장식물인데 첫 작품치곤 무척 예쁘게 완성되었다.(시키는 대로 하는 건 참 잘하는 듯.) 태어나서 처음으로 *오아시스도 만져봤다. 마치 촉감놀이를 하는 어린이 같았는데 기분이 묘하면서도 꽃꽂이를 배우는 나 자신이 너무 어색하기도 했고, 그냥 신기했다. 내가 내가 아닌 느낌? 분명 자의로 나의 시간과 돈을 투자해서 배우는 것임에도 전혀 실감 나지 않았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이질적이어서 그런 것 때문일까. 태어나서 첫걸음마를 떼는 아기 같은 기분이었다. (꽃꽂이를 처음 배우는 거니까 틀린 비유는 아니다.) 이런 종류의 낯섦은 대리가 된 당시의 글에서도 남겼지만 나에게 신선한 긴장감과 가장 선명한 두근거림을 선사한다.

*원예에서 사용하는 플로랄 폼의 제조사 브랜드 이름이다. 워낙 유명해서 대일밴드, 리스테린, 타이레놀, 포스트잇처럼 플로랄 폼을 대체하는 보통명사처럼 쓰인다. 이 플로랄 폼은 물을 흡수하는 스펀지 같은 물건으로 화훼장식물의 구조를 고정시켜 주고 생화의 수명을 오래 유지시키는 목적으로 사용한다.


자, 그렇다면 필기도 붙었고, 실기도 열심히 준비한 거 알겠는데 그래서 화훼장식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했을까? 결론은 취득하지 못했다. 왜냐! 시험 자체에 응시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글을 쓰는 이 시점까지 꽤 시간이 흘렀는데, 2022년 1월 겨울까지 연습하고 그 뒤로 *컨디셔닝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회사에 변화가 생겨서 기존에 속해있던 팀에서 조직개편으로 소속이 변경되면서 다른 의미로 바빠져서 도통 연습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 그렇다고 업무가 줄어든 것도 아니고,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더 많이 늘어난 대다가 이 무렵을 전후로 시작했던 갓생살기(해외 투자공부, 화훼와 같이 병행했던 바리스타 공부, 필라테스 레슨이 끝나고 시작한 복싱, 매일매일 1시간 독서 등)로 스스로 성장하는 성취에 맛 들리는 바람에 실기에 집중해서 빠르게 응시했어야 할 타이밍을 놓쳐 아쉽게도 실기 시험은 치르지 못했다. 그래서 부제를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만) '피울 수 없는 꽃을 키웠어'라고 붙였다.

*구입한 꽃 원물을 사용 의도에 맞게 손질하는 과정을 이르는 말이다.


스트레스 (독특하게) 풀려고, 기술 배워서 사업해 보려고, 이성에게 잘 보이려고 시작했던 꽃꽂이의 첫 목표(화훼장식기능사 취득)는 비록 달성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건 아니다. 공부했던 지식이 사라지는 건 아니어서 공부했던 필기 교재를 몇 번 쓱 훑어보면 필기 재응시 합격은 어렵지 않은 수준이고, 내가 사용하던 도구들만 주어진다면 배웠던 기술을 활용해 얼마든지 꽃 장식물을 만들 수 있다. (부족한 미적감각을 대체할 수 있도록 아주 교과서적으로 만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강남 고속버스터미널 화훼상가를 수 없이 드나들면서 자연스레 늘어난 안목 덕분에 상태가 괜찮은 생화를 합리적인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고, 꽃집에서 꽃다발을 구입할 때 합리적인 가격으로 구입했는지, 소재와 꽃의 구성이 가격에 적합한지, 구매한 꽃의 컨디션이 괜찮은지, 이 집이 정말 잘 만드는지 얼추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중 무엇보다도 바꿀 수 없는 것은, 마냥 힘겨워했던 사회 초년생의 멘탈리티를 결핍 상태로부터 건전하게 회복하도록 도와준 회복탄력성의 성장과 이전과 달리 한층 더 윤택해진 정서적 건강이다. 꽃이 가져다준 선물은 저 간결하게 표현된 텍스트 이면의 것들이 있다. 그리고 이는 경험해 봐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인생에 한번 즈음 그런 시기가 찾아올 때, 나도 자신 있게 꽃을 권하고 싶다. 분명 그 시기를 이겨낼 훌륭한 방법들 중에 하나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추신]
감사합니다, 소정 누나. 태어나서 폼 커터와 오아시스(플로랄 폼)를 처음 만져보는 무지렁이에게 꽃의 매력과 재미를 알게 해 준 당신은··· 위대한 스승!
Thanks for @P.S. Flower.



누구나 더 화사하고 아름답게 피어날 때가 찾아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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