찹쌀 선생과 촌닭 오라버니

by Jonx

자동차 운전석에 앉으면 습관처럼 라디오를 켠다. 채널은 늘 고정되어 있다. 매너 있고 정감 어린 캐릭터로 제법 인기가 있는 가수 겸 배우가 디스크 쟈키를 맡고 있는데, 그가 이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된 사연도 재미있다. 원래는 먼저 진행하던 디제이가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몇 달간을 쉬고 다시 맡기로 되어 있어서, 그 공백기간에 다른 진행자들이 돌아가며 대타 진행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의 디제이가 너무 잘하는 바람에 그 자리에 눌러앉게 된 것이다. 원래 진행자와 새로운 진행자의 사연은 웃지 못할 해프닝에 속하는데, 원래 진행자는 그 후로 행방이 묘연하다. 그 잠깐동안 쉬게 된 사정이 무엇인지도 궁금했지만, 그로 인해 졸지에 밥벌이를 잃게 된 그의 사연도 안타까운 면이 있다. 물론, 새로 진행을 맡게 된 진행자도 인간관계와 업계 도리상 고사를 했겠지만, 어쨌거나 그는 새로운 진행자가 되었고 1년 반이 넘도록 청취율도 잘 나오고 나름 잘하고 있는 상태다.

시동을 걸고 라디오를 켠 후, 운전석과 조수석의 창문을 살짝만 내리고 에어컨을 켰다. 몇십 년 만에 우리나라의 남북을 관통하는 태풍이 지나간 후, 기온은 다소 내려갔지만 차에 타면 삼복더위 때처럼 에어컨을 켜야 답답함이 가시곤 한다. 에어컨을 켠 후에는 통풍시트를 가동한다. 전에 타던 차에 비해 성능이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전보다는 소음이 줄어든 것만으로 만족하다는 느낌이다.

라디오에서는 디제이가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를 소개하며 말한다.

"이 노래가 발매된 지 벌써 30년이라네요. 여러 가지로 놀랍습니다."


찹쌀을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찹쌀은 친구의 별명인데,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렇게 부르는 친구는 나 밖에 없다. 그와 만난 1979년은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해인데, 내 기억으로는 박 대통령 서거 후 며칠이 지나서 내가 그가 다니던 학교, 그가 있던 반으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당시는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로 불렀는데, 기수와 기장을 따라 이열종대로 등교를 하면 정문에 들어서자마자 태극기를 바라보며 기장의 선창에 따라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고 한 곳에 가방을 내려놓은 뒤, 운동장을 다섯 바퀴 돌고 교실에 입실해야 했다. 나는 아침밥을 먹으면 속이 좋지 않아서 아침밥을 거르곤 했는데, 빈 속으로 뛰어도 몸이 거북했다. 워낙 달리기를 좋아하고 전학오기 전까지 학교 대표 육상선수였는 데다가 또 학교에서 시키는 일은 절대적으로 따르는 타입이라 불평 없이 뛰고는 달리기 완주 도장을 찍었다. 주변 다른 아이들은 어떤가 하고 살펴보면 그 아이들도 나름대로 큰 불평 없이 달렸고 스스로 달리기 완주 도장을 찍곤 했다.

그때 우리 반에는 욕을 하지 말자는 취지에서 욕을 하면 욕을 한 아이의 이름을 적고 욕 금지 명찰을 돌리는 시스템이 있었다. 8절지 크기의 종이에는 욕을 한 아이와 욕 명찰을 받은 아이의 이름이 순서대로 적혀있었다. 평소 별로 욕을 하지 않거니와 욕하는 걸 보는 것도 좋아하지 않아서 나와는 인연이 없는 걸로 알았던 욕명찰이 내게로 건네졌다. 그걸 전달하는 촌닭이라 불리던 친구가 말했다.

"너 아까 임마라고 했지? 받아."

마도 욕인가 하고 당황하는 사이, 촌닭은 교실을 나가버렸다. 순간, 어이없기도 했고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선이 부끄럽기도 했는데, 그때 내게 다가온 찹쌀이 말했다.

"괜찮아. 너도 얼른 다른 애 이름 적어서 주면 돼." 하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앉았다. 그게 찹쌀과 나의 첫 대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