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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칩코 Jul 20. 2022

여기는 그냥 시골이 아니고

<길을 잃으면 질경이를 따라가> 



나랑 꼬리의 첫 여행지는 지리산이었다. 언젠가 지리산에서 살겠노라고 생각하면서 결정했다. 우린 한시도 빼놓지 않고 손을 잡고 다녔다. 여자 둘이 3박 4일 내내 손을 잡고 다니는 광경을, 민박집 아주머니가 이상하게 생각하시지 않을까 내심 두려웠다. 아주머니는 우리가 떠나는 날 묘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10년 전에 소중한 친구가 생겼다고 했다. 남편이 없어도 그러질 않는데, 이 친구만 곁에 없으면 한국이 통째로 텅 비어버린 것 같다고 했다. 이 친구를 조금만 더 빨리 만났더라면 자신의 인생이 더 반짝였을 거라면서. 그리고 우리 둘에게 그 손 꼭 잡고 행복하게 살라고 하셨다. 우린 그 아주머니와 헤어지고 왈칵 울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아주머니의 말씀은 주례사처럼 우아하고 뭉클하게 들린다.


이듬해 봄 우린 정말로 산내에 왔다. 우리가 지리산을 로맨틱하게 생각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농촌의 퀴어 축제는 말도 되지 않게 들린다. 일단 우리가 농촌에 와서 겪은 일들이 그랬다. 신입생 중엔 이성 커플도 있고 동성 커플도 있었다. 실상사에서는 쉬는 시간에도 여자와 남자가 함께 방에 있으면 안 되고, 혼숙도 금지였다. 이성 커플은 성적인 관계로 간주하여 이런 규칙을 따라야 했지만, 동성 커플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동성 간의 관계를 아예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기대에도 없던 ‘퀴어 패스권(?)’을 얻었지만, 그다지 기쁜 일은 아니었다.


공동체를 나온 후에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다. 여전히 젊은 여자만 보면 어르신들은 옆 동네 노총각과 맺어주려 하고, 노총각이 없으면 ‘처녀가 시골에서 남자도 없이 괜찮냐?’는 염려도 해주신다. 귀촌해서 집을 구할 때는 무조건 결혼과 임신 계획이 있다고 하라던데, 그 두 계획 모두 불가능한 커플을 위한 조언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여자들끼리만 사는 집엔 밤에 대문을 꼭 잠가야 한다는 조언 정도일까. ‘남자나 부부 세입자만 받는다’며 집을 못 구한 적도 있었다. 특히 찌찌 순례 경력은 꽤 치명적이었다. '민소매 입고 다니는 싹수없는 애들'이라며 입주를 거절당하거나, 어느 마을에서는 마을 회의를 통해 신입생들을 마을에 들이지 않기로 결정까지 내리셨다.


그런데도 여긴 그냥 농촌이 아니지 않나! 여긴 산내였다. 나랑 꼬리가 '지글스'에 마냥 낚인 것은 분명 아니란 뜻이다. 산내는 ‘성폭력 근절을 위한 지리산 여성회의’가 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성 인지 감수성 교육을 했고, 마을 삼거리에선 N번방 성 착취 사건을 주제로 1인시위 릴레이가 이어졌다. 또래 친구들은 대부분 ‘아주 작은 페미니즘 학교: 탱자’의 열정적인 수강생들이고, 마을 카페와 도서관엔 페미니즘 서적이 책장 가득했다. 길 가다가 페미니즘 구호가 적힌 티셔츠를 입은 중년 남성을 본 건 도시에서도 드문 일이었다. 무엇보다 찌찌 순례를 지지하고 참여해주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는 마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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