째쟁째쟁- 꽹과리 소리가 울렸다. 이내 북과 장구, 징 소리가 어우러지고 사람들은 커다란 원을 그리며 어깨춤을 추었다. 날씨는 적당히 심술궂었다. 먹구름이 온종일 무거운 엉덩이를 틀고 앉은 하늘이었지만, 비는 오지 않았으니 되었다. 산내에서 '성 다양성 축제'가 열리는 날이다. 우리는 알록달록 한복들로 저마다 꾸며 입었다. 두루마기에는 타이트한 치마를 함께 입고, 남성용 마고자와는 핑크색 아얌을 썼다. 한복 치마를 무지개색으로 리폼하거나, 외투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거나!
농촌엔 공개적인 퀴어 커뮤니티도, 선배 퀴어 부부도 없다. 중매를 자처하시는 어르신들에게 퀴어의 존재를 설명하기도 곤란하다. 이런 농촌 문화 안에서 “있는 그대로 우리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으로 성 다양성 축제를 기획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누구에게 보여주고 말고는 둘째 치고 퀴어들이 놀거리가 필요했다! 어영부영 축제 기획단 구색으로 '무지개 코딱지'를 만들었다. 나는 포스터를 맡았다. 지리산에는 창세여신 마고 할미가 산다는 신화가 있다. 산내는 마고 할미 품에 쏙 안긴 마을이었다. 성 다양성 축제 포스터에는 주홍색 삭발 머리에 입술엔 피어싱하고 어깨엔 타투를 새긴 마고 여신이 그려졌다. 털북숭이 팔뚝으로 사랑스러운 손 키스를 날리면서.
축제는 ‘성폭력 근절을 위한 지리산 여성회의’에서 사무실을 무료로 대관해주셨다. 전야제에는 카페 ‘히말라야’에서 공간을 베풀어주셨다. ‘비 온 뒤 무지개 재단’에서 지원금을 보내주셨고, ‘서울퀴어문화축제’에서도 무지개 깃발을 대여해주셨다. 전국 각지에서 노래, 춤, 낭독회, 드랙쇼, 토크쇼, 전시를 기꺼이 해주겠다는 연락들이 왔다. 이 모든 덕으로, 축젯날 여성회의 사무실 앞 좁은 골목은 온통 무지갯빛으로 북적거렸다. 퍼레이드 때는 쩌렁쩌렁 울리는 ‘born this way’ 노래와 함께 무지개 깃발을 휘날리면서 온 동네를 뛰어다니기도 했다. 퀴어 축제를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마을을 만들어 온 멋진 이웃들에게도 빚을 진 행사였다.
ⓒ아영
전야제에서 <런던 프라이드>를 상영했다. ‘광부들을 지지하는 레즈비언과 게이들(Lesbians and Gays Support the Miners ; LGSM)’에 대한 내용이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광부와 성소수자 두 집단이, 사회적 약자로서 서로의 연결고리를 발견해간다. 산내 성 다양성 축제도 부스 판매 수익금 일부를 ‘지리산 산악열차 반대 대책위’에 기부했다. “그럼 우리도 ‘LGSM’이네! 마고를 지지하는 레즈비언과 게이들(Lesbians and Gays Support Mago).” 하는 우스갯소리도 했다. 성소수자들과 지리산도 광부들만큼이나 엉뚱한 조합일까? 성소수자들이 ‘있는 그대로’ 존재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지리산도 개발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존재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무엇보다, 무지개는 서울광장뿐 아니라 지리산 자락 마고 할미의 이마에도 떠오르는 법이니까.
이후 성 다양성 축제는 해마다 이어져 3회차까지 왔다. 산내 주민들도 '아, 그 무지개 축제'라면서 아는 체를 해주신다. 음향 장비나 장소 대여를 할 때도 훨씬 수월해졌다. 축제 규모는 점점 커졌다. 3회 때에는 무려 100여 명이 참여했고 취재진도 늘어났다. 이 축제 이후 산내에 귀촌한 사람도 꽤 있었다. 관심이 감사하지만, 사실 이 축제가 더 커지길 바라진 않는다. '무지개 코딱지' 기획단은 엉성하고 느슨한 조직이라 더 커지면 무리가 이만저만이 아닐 테다. 무엇보다, 규모가 커지면 지금처럼 생태적인 방식을 고집하기가 어렵다. 세 차례의 축제는 모두 일회용품이 전혀 없었고, 부스는 모두 비건식에 핸드메이드나 중고제품을 팔았다. 장소엔 쓰레기통조차 없었다. 산내 성 다양성 축제를 보고 누군가는 '우리 지역도 해볼 만한 걸?'하는 희망을 발견하면 좋겠다. 무지개가 떠오르는 모든 지역마다 작은 성 다양성 축제가 생긴다면 바랄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