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으면 질경이를 따라가>
김장철이다. 난 김치를 담가본 적이 없다. 요리를 퍽 어려워하지는 않지만, 김치만큼은 요술로 여긴다. 엄마는 김치를 시도 때도 없이 담그신다. 그냥 척척 씻어서 소금 술술 뿌리고 계량도 없이 양념하시는데, 어떻게 이렇게 맛있는 맛이 난단 말인가! 김치만큼은 어쩐지 넘을 수 없는 벽이 느껴지는 요리였다. 그런데도 '시골에 왔으면 김치 정도는 자급해야지!' 하는 마음은 어디 근본도 없이 튀어나온 건지 그 좁은 텃밭에 가을작물로 배추랑 무만 듬뿍 심었더랬다.
'토종씨드림'에서 씨앗을 나눠주신 덕에 토종조선 배추와 청방배추를 심었다. 토종씨드림의 씨앗은 나눔을 받으면 1배 이상 되돌려드리는 것이 도리이다. 다 섞어서 김장해버린 탓에 그 두 종자가 어떻게 다른지 감상은 못 했지만... 심지어 씨받기마저 못 했지만... 배추 농사는커녕 농사가 아예 처음인 초보이니 아량을 베풀어주시길 바란다. 나랑 꼬리가 주로 돌보는 밭이었는데 우린 배추를 묶어준다는 것도 몰라서 배추 이파리가 죄 파랗게 되었고, 꽃처럼 활짝 펼쳐져 자라는 바람에 여러 배추 포기를 포갤 때도 어째 더 엉망이 되었다.
꼬리는 농사짓던 대안학교를 다닐 적 보았는지, 텃밭을 가꾸시는 부모님 댁에서 보았는지, 열심히 배추벌레를 잡았다. 죽이지는 않고 투포환 선수처럼 저 멀리 날려 보냈다. 나는 농사가 처음이라 배추벌레에 그렇게 대해도 되는지 헷갈렸다. 배추벌레 입장에서는 '나는 원래 배추만 먹던 원주민이다! 네가 뭔데 나를 쫓아내냐!' 할 성싶었다. 꼬리가 배추벌레를 추방하는 동안 옆에서 소심하게 오줌 액비나 뿌렸다. 올해 배추 농사를 삼 년째 짓고 보니, 배추는 정말이지 인기가 너무 많다. 모종부터 당최 살아남는 배추가 없다. 온갖 벌레들이 모여 이파리에 구멍을 내면, 배추는 청소년이 되기도 전에 시들 거리다 죽어버린다. 아무래도 나도 올해는 배추벌레 추방에 조금은 덜 소심해져야겠다.
그렇게 키운 배추는 꽤 먹을만했다. 덩치도 컸고, 맛도 좋았다. 세어보니 스무 포기나 되었다. 산내 친구들은 김치를 함께 담그자고 제안을 해왔다. 역시... 이번엔 배추 수확 철이니 배추 파티 겸 김장을 하려는 속셈이다. 여기저기서 맛있는 채식 김치 레시피를 수소문해서 양념할 재료를 구매했다. 하루는 배추를 씻어서 절이고, 다음 날은 양념을 만들어 배추 안에 넣는 작업을 했다. 그 이듬해에도 또 김치를 함께 담갔는데, 그땐 또 다른 채식 레시피로 만들었다. 나는 두 번째 김장은 명상센터에 있느라 참여를 못 했는데 친구들이 재밌는 에피소드를 말해주었다. 김장철에는 마을의 모든 집들이 다 배추를 절이는 광경을 볼 수 있는데, 이웃 할머니가 오시더니 친구들이 만든 양념장을 보고 혀를 끌끌 차셨다고 했다. '그렇게 되직하면 양념 못해!' 빽빽 소리를 치시더니 순식간에 요술처럼 양념을 걸쭉하게 만들고 가셨다고...
함께 만든 김치는 놀랍도록 맛있었다. 물론 이파리가 파래서 김치 색깔이 어두운 모양새가 좀 특이했지만. 당신이 만든 김치 말고는 마뜩잖아하시는 우리 엄마마저도 이 김치만은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나와 꼬리가 직접 기른 배추로 직접 김장하다니. 새삼 김치를 먹으면서도 감동이었다. 김장을 한 날에는 다 같이 부침개와 두부김치를 해 먹었다. 산내 친구들은 거의 모두 채식해서 수육을 찾는 사람은 없다. 젓갈이 없는 김치도 모두의 입맛에 맞다. 김치를 구매하려면 겹겹이 삼중 포장된 쓰레기까지 함께 구매하는 데 그런 소비도 덜었다. 좀 품이 들었어도 마음이 아주 흐뭇하다. 아, 배추벌레에는 면목이 없지만...
<길을 잃으면 질경이를 따라가4> 예고편
도는 시장 한복판에서 닦으라고 했다. 사람과 자연에 얻어먹고 얻어 자며, 돌연 지리산을 무전으로 방랑한다! 지리산에 푹 빠져 벽에다 대고도 인사하는 사람이 된 칩코. '명상 뽕' 과다로 기병을 앓고 인디언 전생의 환청까지 듣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