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으면 질경이를 따라가>
나의 내복 사랑은 유명했다. 난 9월부터 4월까지 내복을 껴입고 다녀서 여러 사람을 경악게 했다. 추운 걸 죽도록 싫어했으니까. 지리산에 살기 시작한 후로 생태 화장실을 쓰게 됐다. 나에게 생태 화장실은, 똥이 물과 함께 먼 곳으로 깔끔히 사라지지 않고 구더기와 함께 쌓인 꼴을 보는 것보다, 추운 겨울에 맨 엉덩이를 내미는 것이 더 적응하기 어려웠다. 어느 날은 책을 읽다가 추위가 건강에 굉장히 좋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 이후 간사하게도 생태 화장실에 가는 게 묘하게 기꺼워졌다.
내 모든 감각에는 꼬리표가 있다. 가령 배고픔이란 감각은 불쾌함의 꼬리표가, 달콤한 사과의 감각은 유쾌함의 꼬리표가, 추위라는 감각은 불쾌함의 꼬리표가 붙는다. 춥고 배고프다면? 그 순간 나보다 불행한 사람은 없을 거다. 감각은 세상과의 연결고리, 꼬리표는 나의 작은 세상. 감각이 바뀔 순 없지만, 꼬리표들은 스리슬쩍 바뀌기도 한다. 단식수행을 한 이후 배고픔이 좋아졌다. 생태 화장실의 추위가 좋아진 것처럼. 추위와 배고픔의 감각은 변하지 않았다. 내 마음만 바뀌었을 뿐이다. 유쾌함의 꼬리표가 많을수록, 나의 작은 세상은 행복해진다.
유쾌함의 꼬리표를 많이 만드는 건, 사실 어렵지 않다. 현재의 감각을 그냥 받아들이면 된다. 유난히 뜨거웠던 작년 여름, 더위를 피해 냉방이 빵빵한 도서관으로 피서를 갔다. 땀을 줄줄 흘리며 짜증이 나 있다가도, 냉장고 같은 실내가 한순간에 무더위를 발로 뻥 날려주었다. 코로나로 도서관이 문을 닫자, 갈 곳 없는 나는 숲으로 들어갔다. 나무가 울창한 숲속에 들어가서 가만히 누우면 서서히, 아주 서서히 몸이 식었다. 그대로 계속 누워있으면 가끔 추울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때 숲이 내게 알려준 것은 놀라웠다. 숲은 더위를 쓰레기통에 넣듯 뻥 차지 않고 천천히 어루만져서 돌려보냈다. 그리고 내게 속삭였다. 네가 지금 누리는 시원함은 저 더위가 선물해주었다고. 숲을 향해 걸어가는 아득한 걸음, 숨을 고르며 몸이 식기를 인내하는 시간, 열기가 빠져나간 땀의 서늘함까지 이 모든 과정을 나는 사랑하게 됐다. 더위라는 감각을 마귀처럼 쫓지 말고, 그냥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현대사회의 모든 개발품은 감각을 극복하려고 만들어졌다. 허리 굽혀 비질하는 일, 나무를 해서 불을 피워 요리하는 일은 모두 고된 감각이다. 청소기와 가스레인지가 이를 한 번에 해결! 서울에서 부산까지 며칠에 걸쳐 걷는 것도 피하고 싶은 감각이다. 산을 뚫어서 터널을 만들고 철도를 놓으면 해결! 땀에 흠뻑 젖어 산을 오르는 것도 유쾌하지 않은 감각이다. 산꼭대기까지 아스팔트로 발라버리면 해결! 사람들이 이 모든 감각을 그저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숲이 그러하듯이, 그 감각들을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았다면. 모든 감각은 지구가 내게 준 선물이다. 우리는 감각을 통해서만 지구를 만날 수 있다. 감각은 세상과의 연결고리, 지구와의 연결고리니까. 이 연결고리를 하나씩 끊어가면서 인간은 단절돼 왔을까.
나는 병들거나 곧 병 드리라 단지 예상되는 돼지들이 흙구덩이에 밀려 생매장될 때, 그들의 감각과 연결됐다. 돼지고기의 질겅거리는 감각에 붙었던 유쾌한 꼬리표를 떼기로 했다. 이후 개 농장 철창 속의 눈빛들과 차바퀴에 깔린 미지근한 핏덩이들, 머리채를 떨구며 베어지는 나무로 연결이 확장됐다. 그들의 고통을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는 감각도 지구가 준 선물이었다. 그들과 나를 떼려야 뗄 수 없게끔 만드는 감각들. 지금 내가 지리산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기도 했다.
인디언이 말하길, 모든 사람은 각자 특별히 좋아하는 동물이나 식물 또는 장소가 있다고 한다. 나에게 피서의 숲이 그럴 테다. 남들은 그냥 지나치고 말 지리산의 어느 작은 숲일 뿐이지만. 모두가 지리산의 어느 한 부분씩만이라도 사랑하게 된다면, 정말 진심으로 연결된다면, 모두가 지리산을 지키려 하지 않을까? 아름드리 느티나무에 위로받고, 방울새의 작은 지저귐에 감동하고... 잘 떠올려보면 그런 이야기들이 다들 하나씩은 있지 않을까? 나는 기어코 내게 추위와 더위의 감각마저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준 지리산을 지키기 위해, 그 이야기들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지리산은 난개발로 숲을 잃어가고 있다. 지리산에 기대어 살던 사람들의 기억도 함께 저편으로 사라진다. 지리산 마을 길을 걸으며 사라진 숲에 대한 이야기를 채집하는 방랑을 시작한다. 편리를 추구하는 개발의 논리에서 벗어나, 무효율의 삶을 살면서 말이다. 덜덜 떨며 밤을 지새우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수록 이튿날 떠오르는 한 줌의 햇살이 얼마나 소중해질까? 아주 작은 햇살에 감동할수록, 한낮의 태양은 나의 작은 세상에 유쾌한 꼬리표를 주렁주렁 열리게 해줄 것이다. 고생을 사서 하는 말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요는 두려움 없이 모든 감각을 두 팔로 끌어안자는 얘기다. 숲이 그러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