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에서 문어를 봤다. 문어는 임신하면 굴속에 콕 박혀서 나오질 않았다. 그 속에서 새끼들에게 온 힘을 다 부었다. 출산을 마치고 스르륵 굴 밖으로 쏟아져나온 문어는 창백했다. 얼마 안 가 작은 물살이(물고기 대체어)들이 와서 문어의 살을 뜯어 먹었다. 죽은 것이었다.
봄이랑 마을 길로 다니면 고양이들은 도망치기 바쁘다. 봄이가 혀를 휘날리며 달려들기 때문이었다. 고양이에 비하면 봄이는 덩치가 서너 배는 되었다. 저렇게 큰 동물이 덤벼들면 진짜 무서울 것 같았다. 다행히(?) 아직은 봄이보다 고양이들이 더 달리기가 빨랐다.
최근엔 놀라운 일이 있었다. 봄이가 냄새를 맡았는지 흥분하고 어느 구석진 곳으로 다가갔다. 그때 캭 소리와 함께, 에어백이 터지듯 고양이가 구멍에서 튀어나왔다. 고양이는 온몸에 털과 꼬리를 잔뜩 부풀려 세운 채로 봄이 코앞에 섰다. 봄이는 그 자리에 얼어 붙어버렸다. 가만히 뒀다가는 봄이가 다칠 것 같아 끌고 왔다.
봄이에게 맞선 고양이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흥분한 고양이도 처음이었다. 뒤돌아가는 길에 보니, 구멍 더 안쪽에 꼬물거리는 고양이 새끼가 있었다. 새끼를 지키려고...! 새끼를 위해서라면 자기보다 덩치가 서너 배는 큰 동물에게도 맞서는 용기가 생기는 건가. 새끼를 낳고 죽은 문어처럼 정말 그런 죽을 만큼의 용기가.
방랑하다 보면 할머니들을 매일 만난다. 할머니들에게 밥 동냥을 가면 "나 혼자 사니까 밥을 안 해둬"라는 대답이 거의 공식이다. 그런데 할머니들은 우리 뒷모습을 그냥 못 보시는 것이 또 다음 공식이다. 꼭 버선발로 뛰쳐나와 두유라도 쥐여주시는 것이다. 그리곤 배가 고파서 어쩌냐면서 밥이 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신다.
ⓒ아영
날이 무더워서 저녁에만 걸을 적 일이다. 깊은 산 속에 쏙 안긴 마을로 가는 길이었다. 마을 입구에서 한 할머니를 뵈었다. 할머니께서는 지금 저 산길을 어찌 가려 하느냐고, 우릴 못 보내겠다고 하셨다. 저녁도 먹고 하룻밤 자고 가라고. 처음 본 나그네들일 뿐인데, 저렇게 안절부절못하시는 마음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나라면 사실 이런 쪽이다. 얻어먹을 바에야 굶고 마는. 얻어먹는 게 그토록 싫다기보다는, 낯선 사람에게 부탁하는 게 내겐 너무 어렵다. 굶어버리거나 맛이 조금 덜해도 그냥 풀을 뜯어 먹는 편이 나았다. 그래서 실로 방랑 전에 내가 한 연습도 내 배고픈 감각과 친해지는 연습이나 풀을 공부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우린 사 개월간 굶거나 풀만 먹은 적이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아주 잘 얻어먹고 다녔다. 할머니들이 우리를 도저히 가만두지 못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하려는 말은, 위대한 모성... 이라는 진부한 이야기. 아니, 근데 겪어보니 진부하기엔 너무 놀라워서 안 떠들 수가 없다! '밥 얘기는 여자한테 말해야지' 하고 대답해버리는 할아버지들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할머니들만의 집요한 마음들.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돌봄의 습관들.
나도 '어머니가 될 가능성이 있는 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모성의 씨앗을 가지고 있을까? 나야 모성이 남 얘기처럼 들리는 순간이 많은 사람이지만. 할머니들처럼, 모성이 꽃 피우고 진 자리에 흰 갓털 달린 씨앗들이 인류애가 돼서 온 세상에 홀 홀 날아간다면 그만큼 타고난 복도 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