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으면 질경이를 따라가>
방랑단은 미니멀리즘을 실천하기에 제격이었다. 가장 필요한 것만 추리고 추리게 된다. 짐을 많이 챙기면 어깨가 남아나질 않았다. 내 가방에는 간절기용 침낭 하나가 가득 들어차고, 여분의 옷은 없었다. 4월에는 추워서 껴입던 외투와 내복이 한 장씩 있었으나 5월이 되고부터는 그마저도 챙기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입고 다니던 옷 외에는 따로 짐이 없었다.
옷은 긴팔과 긴바지를 입었다. 미니멀리즘은 옷 가짓수를 줄이는 것이 핵심이다. 겨울에 덜 껴입고, 여름엔 봄 가을용 옷을 입으면 옷을 최소화할 수 있다. 그래서 추위와 더위와 친해지려 노력했다. 건강에도 좋다기에 추워도 옷을 안 껴입었다. 날이 무더워지기 시작하는 6, 7월에는 긴팔과 긴바지로 버텨보았다. 생각보다 덥지 않고, 햇빛 알레르기도 일어나지 않고, 벌레도 피할 수 있어 좋았다. 여름에는 걷고 나면 옷이 흠뻑 땀에 젖는데, 갈아입을 옷이 없으니 매일 계곡에서 빨래했다. 다행히 햇빛이 강렬해서 단숨에 말랐다. (매일 똑같은 옷을 입어도 나름 청결을 신경 썼는데, 오랜만에 본가에 가니 큰언니가 날 보고 코를 움켜쥐긴 했다)
이 년 전 산 면바지를 계절 없이 주야장천 입었더니 휴지 조각이 됐다. 특히 무릎과 엉덩이는 더 기울 곳도 없었다. 방랑 시작할 때쯤 이미 바지는 자연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어서, 나름의 목표는 방랑 사 개월까지만 이 바지로 버티자! 였는데... 고작 이 개월 만에 작별할 때가 왔다. 태우려고 보니 무릎과 엉덩이를 제외하면 또 멀쩡해 보였다. 결국 온전한 부분만 이어 붙여 룽기를 만들었다.
룽기는 미니멀리즘에 좋은 점이 많았다. 윗도리를 세탁할 때면, 룽기를 원피스처럼 올려 입었다. 추우면 겉옷처럼 걸치고, 여름엔 침낭을 버리고 룽기를 덮고 잔다. 또 룽기는 어떻게 휘감느냐에 따라 다른 옷처럼 보여서 재미도 있다. 옷 하나의 활용도가 높으면 여러 옷이 필요가 없구나! 무릎을 '탁' 친다. 실로 미니멀리즘 책들을 보면 한 물건을 여러 용도로 사용하라는 팁이 꼭 있다.
나는 머리가 짧으니 모자를 즐겨 쓴다. 햇빛을 가리는 용인 여름 모자와 추위를 막는 겨울모자가 있다. 이번 방랑단을 하면서 산내의 유일무이한 공정무역 인도 옷 가게 사장님께서 터번을 선물해주셨다. 말이 터번이지 그냥 목에 두르면 스카프다. 처음으로 사용해봤는데 정말 좋았다! 여름과 겨울 모두 사용할 수 있다. 머리에도 쓰고, 목에도 두르고, 목과 머리를 한 번에 감쌀 수도 있다. 또 가끔 바지를 세탁할 때는 터번을 치마처럼 둘둘 둘렀다. 핸드폰이나 지갑 등 자잘한 짐들이 거슬리면 보자기처럼 싸서 가방처럼 들고 다닐 수도 있고! 이런 만능 템이 또 없다.
방랑이 끝난 지금, 옷은 조금씩 기능별로 늘렸다. 예를 들면 방랑할 때는 생활복과 잠옷과 작업복이 같았는데 정착한 지금은 잠옷과 험한 일을 할 때 입는 작업복은 따로 있다. 그럼 옷별로 세탁을 덜 할 수 있어서 좋다. 그래도 내 옷들은 사계절을 합해서 스무 벌이 넘지 않는다. 신발도 두 켤레. 터번은 아직도 무지하게 애용한다. 다만 룽기는 정말로 작별해야 했다. 룽기로 만든 이후에도 구멍이 걷잡을 수 없어 당최 넝마인지 옷인지 구분이 어려웠다. 이젠 룽기를 덮고 잘 일은 없으니 다행한 일인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