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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롤로로 Feb 08. 2022

김승옥, 욕망과 부끄러움

김승옥이 성찰한 근대와 '나'

 김승옥의 작품들을 다시 읽었다. 김승옥의 단편 작품들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책은 민음사에서 '무진기행'이라는 이름으로 몇몇 단편을 덧붙여 발행한 세계문학전집인데, 나 역시 이것을 읽었다. <무진기행>과 <서울 1964년 겨울>은 종종 생각이 나서 다시 읽은 적이 많았지만, 책을 통째로 다시 읽은 것은 처음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무진기행>과 <서울>은 읽을 때마다 감각적이라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현대 소설의 원형을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은 어느덧 내가 신화적인 무언가를 읽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게 만들 정도였다. 하지만 더욱 눈에 들어왔던 작품들은 이른바 '대표작'이 아닌 것들이었고, 그 작품들 사이에서 반복되는 무언가가 눈에 밟혔다. 마침 책장에서 우연히 <김승옥, 욕망의 서사학>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국문과 교수가 김승옥에 대해 박사 논문을 쓴 것을 단행본 형식으로 바꾸어 출판한 책이었다. 이것까지 읽었으니 하나 정도 기록해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은 책은 민음사 버전의 <무진기행>과 김미현 교수가 첨부한 작품 해설인 <서울의 우울>, 그리고 서연주 교수가 집필한 <김승옥, 욕망의 서사학>이다. 


  먼저, <서울의 우울>이라는 해설을 쓴 김미현 교수는 두 가지 화두를 던진다. 하나는 1930년의 경성과 1960년의 서울의 반복과 차이이다. 이 두 공간을 가르는 것은 해방과 전쟁인데, 가히 참사라고 부를 법한 이 사건을 거치며 서울이라는 공간이 어떻게 변화하였고, 또 무엇이 유지되고 있는지를 김승옥의 소설에서 볼 수 있다는 의미다. 다른 화두는 '나'에 대한 한국 문학의 탐색이다. 김미현 교수의 지적에 따르면, 이광수를 통해 최초로 제시된 '나'라는 개념은 계몽을 위해서, 그러니까 '우리'를 위한 '나'였다는 점에서 이상화되는 것에 그쳤었다. 그리고 이러한 '나' 개념을 더욱 밀어붙여 '우리'와 대립되는 절대적인 '나'를 상정하는 것에 성공한 인물로 이상을 언급한다. 그러나 이상은 알다시피 절대적 '나'의 유희에 집중하며 결국 주관성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이러한 '나' 개념의 측면에서 본다면, 김승옥은 전쟁을 겪은 후 모든 질서가 파괴된 사회의 개인을 그린다는 점에서 색다른 '나' 개념을 창조한다. 김승옥의 '나'는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나'를 지배하는 환경에 대해 사유하는 것을, 그리고 그 환경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자신을 객관화하는 것에 성공한 '나'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김승옥의 '나'는 피식민지 조선인 '나'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나'를 최초로 발견하는 것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나'가 지속적으로 느끼는 감정은 부끄러움이다. 왜냐하면 '나'가 살고 있는 세계는 추함으로 가득 찬 세계이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된 사회. 기존의 가치가 무너지고 생존 본능만이 남아 있는 사회. 생존 본능을 자극하는 자본주의의 굴레에 갇힌 사회. 그 속에서 인간이 지향하는 가치들은 사라지고 금전적 거래 관계만이 살아남은 사회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회 속에서 인물이 느끼는 감정이 분노나 절망이 아니라 부끄러움이라는 사실이다. '나'가 분노나 절망이 아닌 부끄러움을 느끼는 이유는 '나' 또한 그 세계를 일정 부분 받아들이고 있으며, 심지어 활용하기까지 한다는 점에 있다. 김승옥의 작품들 중 대다수의 주인공이 '가난한 남성 대학생'인 것은 이러한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역사>의 주인공이 껍데기뿐이라고 느끼는 양옥집에서의 삶을 경멸하면서도, 결코 빈민촌인 창신동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생각하거나, <다산성>에서 주체성을 상실하고 자본의 기표를 따라 사는 삶을 비판하는 주인공이 하숙집 딸 순이를 유혹할 때는 자신이 가진 사회적 자본을 아낌없이 표현하는 모습은 '부조리에 온 몸으로 맞서는 새로운 시대상'이 아니라 한 없이 초라해진 자신을 인식하기 시작한 진정한 근대인으로 보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결국 김승옥의 소설은 모든 것이 폐허가 된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나 또한 그 폐허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로부터 느껴지는 자신에 대한 환멸과 자기혐오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김승옥의 표현을 빌리자면, 타락한 사회로 들어가는 순간 느끼는 개인적인 감정이 바로 '자기 세계'이다. 김승옥이 이러한 부끄러움과 환멸을 '자기 세계'라고 표현한 이유는 김승옥이 생각한 자기 세계는 이상으로 가득 차있고, 젖과 꿀이 흐르는 상상의 공간이 아니라, 어느 이름 모를 성에 알려지지 않은 지하실 같은 존재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지하실'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등단작인 <생명 연습>에서부터 김승옥은 자기 세계에 대해 말하고 있고, 그것을 지하실로 표현하고 있다. 나는 언젠가 썼던 에세이에서 사람의 각자 마음속에 들어 있는 우물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는데, 결국 그 우물이나 지하실이 의미하는 것은 공감받을 수 없는 원 체험이나 감정이다. 공감받을 수 없기에 대화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우물과 지하실은 묵묵히 개인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썩어가며 악취를 풍긴다. 김승옥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행동들은 모두 그 자신의 내면에서 풍겨오는 악취를 참지 못해 발작하는 소시민들이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김승옥의 문학적 성과는 전쟁 이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탄생하는 시점에서의 '개인'을 발견하는 것에 성공했다는 것과 이를 '지하실'과 '자기 세계'라는 공간으로 표현하는 것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내가 주의 깊게 살펴보았던 점은 김승옥의 인물들이 '자기 세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거치게 되는 모티프들과 통과 의례적인 성격을 지닌 요소들이었다. 지금부터는 그것에 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먼저, 김승옥의 첫 번째 모티프는 아버지의 부재이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아버지는 이미 죽어있는 상태로 나오고, 아버지가 부재하기 때문에 생기는 상황이 소설의 주요 줄거리가 되거나 인물의 결정적 행동으로 추동한다. 여기서 아버지의 부재는 전쟁 직후의 한국 상황에 대한 하나의 은유이다. 한국은 뿌리 깊은 가부장제 사회인만큼, 가장이 부재하는 가정이라는 환경은 그 자체로 한국 사회에 대한 하나의 은유가 되는 것이다. 기존의 한국 문학이 아버지가 부재하는 전쟁 환경을 하나의 재난으로 인식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그렸다면, 김승옥은 '아버지가 되려 하는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쓴다. 판단 중지의 영역이었던 전쟁, 그러니까 아버지의 부재를 판단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판단을 통해 고뇌하며 주체성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김승옥의 인물들이다.


 두 번째 모티프는 상경이다. 김승옥 소설의 인물들은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동하면서 겪는 잡념과 그 잡념으로부터 비롯된 사건 내에서 행동한다. 그리고 대부분 서울 통해 사회의 위선과 부조리를 느낀 후 낙향을 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때 주의해야 할 점은 김승옥에게 고향은 도시와 대립되는 유토피아적인 공간이 아니라는 점이다. <무진기행>에서 무진은 안락한 고향이라기보다 잊고 싶은 과거의 경험을 상기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즉, 김승옥의 인물들은 아버지가 부재한 공간을 떠나 도시에서 새로운 물질과 정신을 수용하려 하지만, 결국 이것에 실패하고 낙향한다. 하지만 낙향한 그곳에서 발견하는 것은 도시의 삶이 반복되고 있는 공간이고, 내가 실패했던 공간이다. 이처럼 김승옥의 소설에서 고향이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자신의 노력이 세계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참담한 진리를 마주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세 번째 모티프는 성(性)이다. 김승옥 소설의 인물들은 겪고 있는 외부, 내부의 갈등을 해결하거나 표현하는 것에서 언제나 성적인 방식을 동원한다. 그렇다면 왜 김승옥은 이러한 모티프들을 작품 속에서 계속 반복하는 것일까? 이것이 단순한 작가의 개인적 취향을 보여주는 것일까? 물론 일정 부분 그럴 것이다. 하지만 김승옥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최초의 근대인의 원형을 발견했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나는 이를 신화적인 무언가로 해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생명 연습>에서 느껴지는 어머니와 형의 근친상간적인 분위기, <무진기행>에서 느껴지는 여성을 통한 구원, <야행>에서 느껴지는 일탈적 성격의 성까지. 김승옥의 작품 속에서 '자기 세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성적인 어떠한 사건을 거치는 것이 필수적이 된다. 이는 원시적인 성인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에 대한 비판 역시 적을 예정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모티프들을 거치며 인물을 어떻게 '자기 세계'를 형성하는가? 우선, 김승옥의 소설에서 자기 세계란 타락한 현실로 진입하기 위해 개인이 사밀 하게 가지는 배반이다. 따라서 자기 세계는 타락한 세상을 타락한 방식으로 수용하는 것이고, 이러한 사회로의 진입, 혹은 자기 세계의 형성은 언제나 극단적인 사건인 '극기'를 경험하는 것에서 온다. <서울 1964 겨울>에서 나와 안 씨가 '꿈틀거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보자. 고졸인 나는 버스 좌석에 앉은 임산부의 배가 불러오고, 내려가는 것에서 꿈틀거림을 느끼지만, 부잣집 대학생인 안은 학생들의 데모에서 그것을 느낀다. 둘은 같은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서로 전혀 다른 감상을 내보이며, 심지어 이들 스스로도 서로의 주장에 공감하지 못한다. 하지만 둘은 소설 속의 대화처럼 '다른 곳을 흘러 같은 곳에 도착'한 것인데, 그들이 도착한 같은 곳은 타인으로부터 절대적으로 고독한 서울이라는 공간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서울이라는 공간에서 자신만이 아는 장소를 언급하며 즐거워한다. 누군가로부터 공감받을 수 없는 개인이 할 수 있는 최후의 발악은 자기 자신만이 알고 있는 무언가를 남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 연습>에서는 눈썹을 밀어버린 학생이 등장하며 시작된다. 교수와 나는 그 학생의 그러한 행위를 우스운 것으로 취급한다. 그리고 소설은 교수와 학생의 이야기를 교차로 언급한다. 교수의 경우, 자신이 사랑했던 여성과 영국 유학을 사이에 두고 고민하던 중 여성을 겁탈함으로써 죄책감을 씻어내고 유학을 떠났다는 이야기이다. 나의 경우, 아버지의 부재로 근근이 살아가던 나의 집에서 남자를 불러 부정한 일을 하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하는 형을 나와 누나가 죽여버리는 이야기이다. 즉, 지금 카페에서 눈썹을 밀어버린 학생을 비웃는 나와 교수는 각각의 사연을 거쳐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눈썹을 밀어버린 학생에게는 어떠한 이야기가 있는가. 이처럼 <서울 1964 겨울>과 <생명 연습>은 모두 서로가 공감할 수 없는 사밀한 부분을 여운처럼 남기며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그들이 서로에게 보이는 웃음은 은밀한 공감의 미소이다. 이렇게 타락한 세계로 살아가기 위해 너 또한 나와 비슷한 짓을 겪었을 것이라는 공조의 미소인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그러한 통과 의례는 성적이어야 하는가? 여성의 성, 특히 정조가 신성시되었던 가부장제 사회인 한국에서 정조를 희롱하거나 겁탈하는 행위로 독자에게 충격을 주려는 작법 기술인 것인가? 다르게 말하자면, 왜 김승옥의 소설에서 인물들이 자기 세계를 형성하기 위해 겪는 극기는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세계를 파괴하고 타락시키는 것인가? 물론 소설 속의 인물들은 그 행위를 통해 자신도 파괴당했다는 식으로 인식하지만 말이다. 이러한 인식에 대한 답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 <야행>이다. 야행은 '경단녀'가 되지 않기 위해 같은 은행에서 일하는 남편과의 결혼을 비밀에 부치고 있는 여자 은행 직원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녀는 어느 날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남자로부터 강간을 당하는데, 그녀는 이 사건에서 오히려 해방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녀는 서울이라는 공간을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밤늦은 거리에서 술에 취해 수작을 부리는 남자들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제안하는 도피 제안은 조건부 도피 제안이다. 그들은 밤을 보내고 나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다시 낮의 세계로 편입될 것이다. 그렇기에 주인공은 '얼굴도 이름도' 모르며, '감옥에 갈 것은 신경조차 안 쓰는' 남성으로부터 해방감을 느끼는 것이다. 


 즉, 김승옥의 소설에서 성적 일탈, 또는 성적 방종은 벗어날 수 없는 부조리한 세계의 질서에서 벗어나려는 인물들의 투쟁처럼 보인다. 인물들은 이러한 투쟁을 겪으며 본인의 추함을 느끼기도 하고, 세계의 강력한 압박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이를 성장이라고 볼 수 있는가? 나는 이 부분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비록 <야행>을 통해 '이곳'을 벗어나려고 하지만 언제나 조건부로서만 일탈을 원하는 기존의 남성 주인공들을 비판하는 것에 성공했다고 할지라도, 수동적으로 누군가를 통해 세계에서 도피하고 싶다는 열망을 진정으로 성장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정리하자면, '억압된 개인의 일탈'이라는 주제를 유지하면서 그 주체를 남성에서 여성으로 돌렸다는 점에서는 분명한 의의가 있으나, 여성의 '일탈'이 김승옥의 기존 작품에 등장하는 남성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꼴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든다. 현대 한국 문학상 수상작들을 잘 살펴보면, 대부분 주인공이 작가 지망생이거나, 출판사에서 일을 한다거나, 시간 강사로 일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러한 인물들이 지지리 궁상을 떨며 보내는 지리멸렬한 일상이 아직까지도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보면, 김승옥이 만들어낸 근대인의 형상이 한국 문학계에, 더 정확히 말하면 한국 지식인 사회에 던지는 영향력이 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한다면, 60년이라는 세월 동안 김승옥이 던진 화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물론 최근에는 그 반대급부의 현상이 나타나 대부분의 수상작들이 여성 작가들로 채워지고, 수상작들의 내용들도 기존과는 정반대의 것으로 선정이 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사족을 하나만 더 붙이자면, 나는 그것도 대안이 되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농담 삼아 말하면, "우리는 아직도 김승옥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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