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어느 시점부터 자유의지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 부모님과 싸운 어느 날 저녁 ‘한 동안, 부모님과 이야기하지 않아야지’라는 결심이 이상하게도 하루 지나면 사라졌고 미안함으로 대체됐다.
이런 일들은 부모사이 뿐만 아니라 친구사이에서도 일어났고 무엇이 진짜 나의 생각인지 의심하게 만들었다. 성인이 된 이후, 자유의지에 대한 의심이 좀 더 심화되었는데 어떤 선택을 할 때, 사람들 대부분 자신이 다양한 조건들을 고려했다고 의식하지만 사실은 사회적 시선이 가장 중요한 변수였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자유의지가 뭐길래 그렇게 느꼈나? 내가 생각하는 자유의지란 단순히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은 아니다. 자유란 원하는 것을 하는게 아닌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상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은 다양한 욕구로부터 속박되어있다. 일상의 배고픔부터 시작해서 흡연, 유투브, 인스타, 긍정적인 피드백 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뿐만 아니라 수험생활, 취업준비, 결혼, 육아 등 자신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처럼 보이는 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보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의 본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선택을 할때 생존을 고려한 개체가 더 잘 살아남을테니 우리는 이미 본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개체로 진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자유의지는 정말 없는 걸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우선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믿는 그 순간에 뇌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뇌과학적 관점에서 우리가 믿는 의사결정 과정은 대략 세 단계로 요약된다. 1단계에서는 외부 위협이나 사회적 시선을 감지하고, 배고픔·성욕 같은 기초 본능을 모니터링한다. 2단계에서는 여러 욕구가 충돌할 때 이를 의식적으로 비교하고 종합 판단을 내린다. 3단계에서는 그 판단에 따라 행동을 실행한다.
우리는 이 과정이 1→2→3 순서로 진행되며, 특히 2단계의 '의식적 판단'이 행동을 결정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에 반하는 충격적인 실험 결과가 있다. 1980년대 벤저민 리벳(Benjamin Libet)의 실험에서, 피험자가 "지금 손가락을 움직이겠다"고 의식적으로 결정하기 약 0.35초 전에 이미 뇌에서 준비전위라는 전기신호가 관찰되었다. 더 놀라운 것은, 실제 근육 운동이 시작되기는 그보다 약 0.2초 더 전이었다는 점이다.
즉, 행동을 준비하는 뇌 활동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야 "내가 선택했다"는 의식적 경험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무의식의 지배는 실험실을 넘어 일상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점심시간 직전 허기진 상태인지 아닌지에 따라 판사들이 가석방을 승인하는 비율이 눈에 띄게 달라지며, 따뜻한 커피를 쥐고 있는지 차가운 커피를 쥐고 있는지에 따라 상대에 대한 호감도 역시 유의미하게 변한다. 결국 우리가 '신중하게 고려했다'고 믿는 선택조차 온전한 이성이 아닌 신체의 물리적 상태에 크게 영향받는다.
결국, 우리가 믿었던 선택은 온전한 이성이 아닌 신체의 물리적 상태에 의해서도 크게 영향을 받는다. 물론 반론도 가능하다. '자유의지를 의심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자유의지의 증거'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의심할 수 있는 능력과 그 의심에 따라 실제로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담배가 해롭다는 것을 알면서도 끊지 못하고, 미루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룬다.
자유의지가 정확히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그것대로 살아왔는지에 대한 확신은 여전히 없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완벽한 자유의지'라는 환상 속에서 나 자신과 타인을 재단하기보다, 우리 모두가 보이지 않는 힘들에 영향받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편이 더 정직하다는 것이다. 부모님과 싸운 다음 날 미안함을 느낀 것은 의지의 나약함이 아니라 내 안의 복잡한 무의식적 과정들이 작동한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중요한 것은 '내가 온전히 자유로운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내 선택에 어떤 힘들이 작용했는가'를 묻는 것이다. 그리고 타인의 선택 역시 마찬가지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찾은, 자유의지 없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