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는 때때로 실용성 면에서 형편없다. 완전한 시스템, 빈틈없는 절차를 만들고 그 안에서 무언가를 해내는 것만이 우월하다는 착각은 전형적인 헛똑똑이식 사고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새로 업무를 맡게 되었다고 치자. 그리고 견적과 관련한 첫 이메일을 보냈는데 상사로부터 "다음부터 견적 관련 이메일에는 A팀을 참조(CC)에 넣어달라"는 피드백을 받게 된다. 이때 시스템적 사고가 지나친 사람들은 아래 같은 생각을 한다.
"메일 종류에 따라 참조에 넣어야 할 사람이나 조직이 정해져 있겠구나. 절차서도 없고 사수도 없으니 나중에 시간을 내서 과거 이메일을 모조리 분석한 후, 참조 필요 목록을 완벽히 정리한 표를 만들어야겠다!"
그리고 오늘 받은 피드백에 대해서는 딱히 메모를 해두지 않는다. 어차피 기억이 날 거고, 나중에 정리할 '완벽한 표'에 포함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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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게 일을 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완벽히 정리할 언젠가'는 정말 쉽게 오지 않는다. 영원히 오지 않을 때가 많다. 그리고 망각의 힘은 생각보다 세다. 이때 할 수 있는 최선은 본인이 가장 신뢰하는 메모 시스템에 일단 아래처럼 간략히 적어두는 것이다.
[메일 보낼 때 참조]
- 견적 메일: A팀 <ateam@company.com>
그리고 나중에 새로운 종류의 메일을 보내기 전에, 과거 해당 종류의 이메일 몇 개를 확인해서 또 메모를 조금 추가하면 된다. 불완전한 메모가 서서히 누적되며 완전해지는 방식이다.
혹자는 당신 초등학생이냐고, 너무 당연한 방법이 아니냐고 하겠지만, (소수일지라도) 나처럼 헛똑똑이식 사고에 매몰된 사람들은 이런 불완전한 방식에 직관적인 거부감을 느낀다. 나는 사회초년생일 때 이 당연한 걸 못해서 많이 혼났다. 의식적인 훈련을 거친 후에야 나는 왜 이 방식이 유효한지 납득하게 되었다. 아래는 누적하기 전략이 의미가 있는 이유들이다.
1. 정보가 들어온 당시의 맥락을 기록할 수 있다
정보는 그게 들어오는 당시의 상황이 있다. 견적 메일에 A팀을 참조로 넣어야 하는 이유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런 정보는 그때그때 적어놓지 않으면 소실될 확률이 높다. 누적하기 전략은 이런 정보를 기록하기에 가장 좋다.
2. 파레토 법칙의 수혜를 본다.
우리가 일을 할 때, 항목 수 기준 20%의 정보만 있으면 전체 업무의 80%를 해치울 수 있다. 업무 중 우리가 접한 정보는 가치 있는 20%의 정보일 확률이 매우 높다. 따라서 메모 효율 자체가 압도적으로 좋고, 지식의 공백이 빠르게 메워지기 때문에 '폐급'이 될 확률을 기하급수적으로 낮춘다.
3. '완벽히 정리할 언젠가'의 가능성을 높인다.
메모가 어느 정도 누적이 된 상태에서 완전한 리스트로 만들기는 훨씬 쉽다. 물리적으로도 쉽고, 무엇보다 나머지 작은 구멍을 완전히 메우고 싶다는 동기가 자연스럽게 생긴다.
4. 쓸데없는 시스템을 만드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시스템을 만드는 것은 전부 비용이다. 요란하고 복잡한 ‘할 일 관리 시스템’ 없이 종이 노트에 할 일을 적어놓고 줄을 찍찍 긋는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훌륭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차고 넘친다. 누적하기 전략은 절차를 위한 절차가 아니라 필요에 의한 절차를 유도한다. 위 이메일 예시에서 요란한 엑셀 시트를 만들고 내가 퇴사할 때까지 보낼 일 없는 종류의 이메일까지 모조리 정리하느라 시간을 낭비했다고 생각해 보자.
5. 상사를 너그럽게 만든다
똑같은 종류의 실수를 반복하는 것은 치명적이다. 누적 전략은 적어도 같은 종류의 실수를 방지한다. 그리고 부하가 피드백을 기록해 둔다는 사실은 상사를 크게 안심시킨다.
나는 이 누적하기 전략으로 회사 서버 현황, 코드 편집기 단축키 목록, 협력 업체/담당자 목록 같은 것들을 정리한다. 일부 메모는 아예 회사 공식 문서가 되어 완전한 리스트로 관리되기도 한다. 실생활에서 이 전략을 적용할 수 있는 예시로 친척 계보도, 지인 생일 목록, 각종 주소 목록, 계좌/카드 목록, 여행체크리스트 같은 게 있다.
나는 완전한 메모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상태이지만, 이 메모 전략 한 조각을 브런치에 우선 올리는 이유도 일종의 누적 전략이다. 앞으로 기록에 관한 기록들을 이 매거진에 쌓아 둘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