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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우 Chociety Jul 26. 2024

경제적 자유의 달콤한 유혹: 개츠비들의 진실


“한국에는 개츠비가 너무 많아.”


영화 ‘버닝’의 대사 중 하나다. 이 대사에서 ‘개츠비’란 젊은 나이에 별다른 일도 하지 않는 것 같은데, 생계 걱정 없이 돈을 펑펑 쓰고 다니는 젊은이를 말한다. 이 영화에 나오는 ‘개츠비’는 부모의 재력을 물려받아 부자인 젊은이를 뜻했지만, 사실 개츠비는 그런 인물이 아니다. 실제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주인공 개츠비는 찢어지게 가난한 출신을 극복하고 사업을 통해 부자가 된, ‘아메리칸드림’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출처-<영화 '위대한 개츠비'>

소설 속, 잘생긴 데다 부자이기까지 한 개츠비는 커다란 저택을 짓고 매일 밤 화려한 파티를 열며 자신의 부를 과시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개츠비가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그렇게 큰돈을 벌 수 있었는지 잘 모른다. 그저 이런저런 소문만 난무할 뿐이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부자가 됐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잘생기고 부유한 그를 동경하고, 좋아한다.



자수성가했다고는 하나 부를 이룬 출처는 명확하지 않고, 자신의 부를 대놓고 과시하는 잘 가꾼 외모의 젊은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인스타그램 피드나 강의 판매 사이트의 상품 페이지 속에서 말이다.


SNS에는 젊은 나이에 ‘경제적 자유’를 이루었다는 화려한 부자들이 많다. 스스로 노력해서, 남들과는 다른 방법을 통해 부를 이루었다는 이들은 값비싼 외제차와 고급 아파트의 화려한 야경을 보여준다. 그리고 자신을 부자로 만들어주었다는 특별한 방법을 책으로 써서 비싼 값에 팔거나, 강의를 만들어 판매한다. 


어떻게 보면 ‘개츠비’는 ‘버닝’ 속 상속받은 젊은 부자들보다는 자수성가로 부자가 되었다는 이들 ‘성공팔이’ 인플루언서들과 더 비슷하다. 이들이야말로 진정 ‘한국의 개츠비’라 할 수 있다. 밀수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불법적인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개츠비처럼 이들 역시 부를 얻기 위해서라면 거짓말을 불사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적 자유를 설파하는 자칭 ‘젊은 부자’들 중에 사기꾼만 있다는 뜻은 아니다. 물론 전청조처럼 투자해 준다며 돈을 받은 뒤 잠적하는 진짜 사기꾼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나름대로는 자신의 지식이나 노하우를 콘텐츠로 만들어 판매하는 지식 산업을 한다. 이들이 ‘내가 이 방법으로 10억을 벌었다’라고 하든, 100억을 벌었다고 하든, 과장 광고로 플랫폼 차원의 제제는 할 수 있겠지만 그 이상 법적으로 처벌하기는 어렵다. 이들은 범죄와 도덕적 해이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소비자의 주머니를 털기 위해 그 어떤 과장과 뻥튀기도 서슴지 않는다.

이들의 레퍼토리는 거의 비슷해 보인다.

출처-Pixabay

평범한 대학생이던, 직장인이던 자신이 어느 날 경제적 자유를 이루어야겠다고 결심한 뒤 투자나 사업(혹은 장사)에 뛰어들어 약간의 시행착오를 겪는다. 그리고 부단한 노력 끝에 깨달음을 얻어 단 몇 개월 만에 월 천만 원에서 수억까지의 수익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돈은 아쉽지 않지만, 과거의 자신처럼 돈 버는 방법을 몰라 헤매는 사람들을 위해 부자가 되는 특별한 비법을 알려주려고 한다. 그 방법을 담은 전자책과 강의(혹은 다른 어떤 상품)도 팔고 유튜브도 하지만, 이것은 돈이 주목적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하는 거다. 


각자 다르긴 하지만, 위의 이야기에서 세부사항만 다를 뿐 찍어낸 것 마냥 비슷하다. 비슷하면 안 되냐고? 안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 이야기들이 진짜이기만 하다면 말이다.


또한 이들이 자신의 사연을 이용해 콘텐츠를 파는 것도 안될 것은 없다. 이들이 블로그 하는 법이나 스마트 스토어 하는 법을 팔든, 시크릿을 팔든 그들의 강의를 돈 주고 들은 사람들이 만족한다면 말이다.


문제는 이런 개츠비들의 사연은 대부분 콘텐츠를 팔기 위해 조작되거나 과장된 가짜이며, 실질적으로 사람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내용이 아니라 자신의 콘텐츠가 잘 팔리게끔 하는데 최적화된 달콤하고 자극적인 내용이라는 점이다. 병을 낫게 하는 건강식품이라 광고하는 식품에 중요한 영양소는 넣지 않고 설탕과 향미증진제를 잔뜩 넣어 계속 먹을 수밖에 없는 중독성 강한 맛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 


더군다나 그 내용은 그것이 실무적인 부분을 알려주는 것이든, 동기부여 등의 마인드 코칭이든, 거의 종교에 가까울 정도로 한 가지를 세뇌시키고 있다. 



그것은 바로 ‘경제적 자유’라는 신조어다.


언제부터 ‘경제’라는 말과 ‘자유’라는 말이 붙어 다니기 시작한 걸까?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한국의 개츠비들은 경제적 자유라는 말이 유행하면서부터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들에게 ‘경제적 자유’란 일종의 종교와 같으며, 이들 모두는 그 종교의 사제이다. 그리고 그 종교는 죽어서 가는 천국 대신 아래와 같은 현세의 천국을 약속한다. 


출처-Pixabay

‘돈 걱정 없이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며, 내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삶’


매일 아침 발걸음이 무거운, 적성에 안 맞는 일터나 학교에 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이 ‘경제적 자유’라는 종교가 약속하는 현세의 천국은 그 무엇보다 달콤하게 느껴진다. 마치 시험을 앞둔 초등학생에게 매일 하루 종일 게임만 해도 엄마에게 잔소리 듣지 않는 삶을 약속하는 것과 같다.


학교에 가지 않고 공부도 하지 않으며 게임만 하는 삶이 초등학생에게 정말 이로운 것일까? 여기에 동의하는 부모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삶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전문 프로게이머로 훈련받는 초등학생들은 어릴 때부터 합숙하며 하루 종일 게임만 하기도 한다. 그러다 잘 되어서 억대 연봉의 프로게이머가 되어 부와 명예를 얻을 수도 있다. 그러니 실제로 그런 삶을 사는 초등학생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며, 게임을 정말 좋아하고 잘하는 초등학생이라면 그런 꿈을 꾼다고 해서 무조건 말릴 일만은 아니다. ‘돈 걱정 없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시간도 많은 삶’도 마찬가지다. 개미처럼 부지런히 일해서 돈을 벌어야만 먹고산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나태하고 대가 없이 누리려고만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삶은 분명히 존재하며, 직장을 벗어나 빠르게 돈을 벌 재능이나 능력이 있다면 그런 삶을 꿈꾸는 것도 말릴 일만은 아니다. 어쨌든 꿈을 꾸어야 이룰 수도 있으니 말이다. 딱히 재능이나 능력이 두드러지지 않더라도 사업 등으로 단기간에 이루는 경제적 자유를 꿈꿀 수 있다. 특히 그 사람이 안정된 기반을 확보하지 못한, ‘잃을 게 없는 사람’이라면,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꿈을 품어본다고 해서 손해 볼 게 뭐가 있겠는가?



문제는 ‘경제적 자유’라는 종교가 특별한 상황에 처한 소수만이 이룰 수 있는 것을 ‘누구나 이룰 수 있으며, 이뤄야만 하는 무언가’로 포장해 강요한다는 데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부자가 되는 것만이 행복이 아닐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아무리 부자가 되고 싶어도 일부 역량이 부족해 못될 수도 있다. 혹은 부자가 되기까지 희생해야 하는 것들이 부자가 되어 누리는 달콤함보다 더욱더 가혹하고 고통스러운 사람도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평범한 직장 생활을 하는 삶도 그 사람 나름대로는 한 평생 쟁취해서 겨우 얻은 것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에게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에 뛰어드는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는 위험한 도박이다. 실패하면 기껏 이뤄놓은 안정적인 삶의 기반마저 모조리 잃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경제적 자유’ 종교에서 이런 생각은 죄악이고 어리석음이며 나태이다. 이들은 유혹한다. 직장을 당장 그만두어서는 안되지만, 직장에서 버는 돈 일부를 자신들에게 꾸준히 투자해 경제적 자유를 얻으라고. 


하지만 이미 직장을 다니는 평범한 삶을 틀렸다고 정의한 상태에서, 그 사람이 직장 내에서 제대로 성과를 내며 행복한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을까? 혹시 경제적 자유라는 달콤한 꿈을 꾸게 해주는 대가로 월급에 빨대를 꽂힌 채, 직장을 그만두지도 못하고 돈과 시간만 버리는 것은 아닐까? 극단적인 말이지만, 한 번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경제적 자유’라는 종교를 설파하는 한국의 개츠비들은 말한다. 누구든 단기간에 부를 이룰 수 있다고. 


또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고 직장에 매여 있는 사람들을 바보 취급 하며,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런 삶을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며 달콤한 목소리로 유혹한다. 마치 전국의 모든 초등학생들은 프로 게이머 지망생이 되어 하루 종일 게임만 하는 삶을 살 수 있으며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유혹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이것이 초등학생들에게 유해한 유혹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어른들을 대상으로도 모든 이가 단기간에 사업이나 투자로 부자가 되어 은퇴할 수 있다 말하는 것 역시 유해한 유혹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인생을 역전시킬 수 있는 특급 비법이 누군가에게는 계속 그대로 살았다면 평균은 되었을 인생을 나락으로 가게 만드는 위험한 도박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개츠비들은 대체 왜 이런 유해한 유혹을 대중적으로 퍼뜨리며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데 여념이 없는 것일까?


그들의 세계에서는 ‘돈’이 모든 것을 정당화해주기 때문이다. 이들은 ‘부자가 되기 전에는 진짜 인생은 시작되지도 않은 것이다’라고까지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부자가 되고자 애쓰는 대신 자신의 삶을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은 인생이 아닌 축생을 살고 있다는 말인가? 아직 문명화되지 않은 사회에서 자연 속의 원시적 삶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인간도 아닌 것인가?


만약 이들에게 공적인 자리에서가 아닌, 진심을 터놓을 수 있는 사적인 자리에서 이렇게 묻는다면 과연 어떻게 대답할까? 약간 두려워지기까지 한다. 이들에게 돈을 많이 버는 일은 단순히 생활수준을 높이는 정도의 것이 아니라, 인생의 가장 큰 자부심이며 삶의 의미다. 지금 이들은 ‘성공팔이’로 비난받으며 초반 매출이나 경력을 뻥튀기한 과거에 대한 해명을 요구받고 있지만, 아마 대부분은 그것에 대한 문제의식조차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뻥튀기해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돈을 버는 능력 또한 그들에게는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 위해 꼭 필요한 능력이자 일종의 ‘마케팅’일 테니 말이다. 그들에게 과거 조작은 단순히 돈을 많이 벌기 위해 ‘똑똑하게’ 상식을 뒤집고 새로운 시도를 한 것일 뿐일 터다. 그렇게 생각하면, 문제는 자신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능력과 부를 질투해 깎아내리려 하는 대중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게 정말 가능한 사고 과정인지 일반적인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돈이 모든 가치를 앞서 있으면, 아슬아슬할지 언정 ‘대놓고 불법’만 아니면, 거짓말조차 능력으로 포장하는 일이 가능하다. 그렇게 스스로마저 속이는 것이다.

<자본주의 리얼리즘> 도서 표지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 (중략) 이 슬로건은 내가 '자본주의 리얼리즘(Capitalist realism)'이라는 표현으로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존립 가능한 정치 경제 체계일 뿐 아니라 이제는 그에 대한 일관된 대안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널리 퍼져있는 감각이 그것이다.”


문화로 이 시대의 정치와 자본주의를 진단했던 철학자 마크 피셔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필연적으로 불평등이 심해질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과거에는 ‘사회주의’라는 대안이라도 상상할 수 있었다면, 이제는 그 상상력조차도 발휘할 수 없는 시대라는 것이다. 누구나 이 말에는 공감할 것이다. ‘자본주의’라는 말조차 ‘자본주의 공략법’등의 이름으로 돈을 버는 마케팅 키워드가 된 세상에서 무슨 대안을 상상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한때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 제기의 최전선에 있던 환경운동도 이제는 ESG라는 미명 아래 ‘친환경 소재’ 운동화를 파는데 쓰이고 있다.


마크 피셔는 그의 또 다른 글에서 이런 말도 했다.

“오늘날 문화는 공적인 것이라는 개념과 지성인이라는 형상을 제거했다. 문화적 엘리트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공격은 경제적 엘리트의 권력 강화 및 확장과 함께 전개되어 왔다.”


과거에는 부자가 아니어도 지혜가 있거나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존경받았지만, 지금은 돈이 있는 사람들이 사회적 지위를 독차지한다. 단순히 반지성주의의 문제는 아니다. 자본을 가진 사람은 이제 지혜와 그에 따른 존경마저 자신이 돈을 벌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가지려고 한다. 무언가 대단한 것이 있는 양 부풀리고, 적당히 얼버무리고, 공고한 팬덤을 형성해 보호막을 치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돈 버는 법을 가르쳐 유명해진 이 시대의 개츠비는 이런저런 철학자를 인용하며 스스로를 사상가라 일컫기에 이르렀다. 꼭 특정 인플루언서 한 사람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이 방식으로 성공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비슷한 루트를 타기 때문이다.


수많은 개츠비들이 과거 규명의 요구를 받고, 높이 서 있던 자리에서 끌어 내려지는 지금, 우리는 단순히 그들을 벌하고 욕하며 분풀이를 하는 데만 에너지를 쏟아서는 안된다. 거기에서 멈춘다면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질투하는 대중’에 머물게 된다. 사실 그들을 욕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들에게 매력을 느끼고 무언가 배운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들의 가치관과 기망 행위는 잘못되었으나, 인간의 마음을 끄는 방법만큼은 분명 배울 점이 있고 생각해 볼 점이 있는 부분이다. 타인에 대한 부정적인 정보는 엄청난 자극을 선사하며, 잘나가던 사람이 과거의 잘못으로 끌어내려지는 광경 역시 쾌감을 선사한다. 하지만 거기서 멈춘다면 우리는 그들의 행동에서 그 무엇도 배울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을 바라보며 동시에 자신을 돌아보고 그들의 실패와 잘못된 행동이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가 이번 일로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또 인생에서 고통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한 것이다. 정말 돈을 벌고 빨리 직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훌륭한 인생이고 최고의 목표일까? 지금 다니는 직장이 자신의 가능성을 제한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평생 그 생각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수 있다. 처음부터 일관적으로 자신이 진정 하고 싶은 일만을 하면서 성공가도를 달리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널리 알려진 프란츠 카프카는 평생 직장인이었으며,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전업작가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가 직장을 그만둘 수 있었으면 더 훌륭한 작품들을 썼을 거라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의 삶을 내내 짓누르던 억압과 고통이 자양분이 되었기에 그의 작품이 우리가 사는 세계의 단면을 담아낼 수 있었다는 것을. 그는 오늘날  20세기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천재 작가로 칭송받는다. 그 외에 다양한 직업을 거쳤거나 겸업을 했던 위인들은 셀 수 없이 많다. 고통도 슬픔도 억압도, 우리가 삶을 통해 피워내고자 하는 중요한 가치의 거름이 된다. 그것 없이, 그것이 경제적인 문제가 되었든 어떤 고통이 되었건 일찌감치 과제를 끝내듯 해결해 버리고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겠다는 생각은 지나치게 순진하다. 마치 풋풋한 시절의 첫사랑을 이루기 위해 밀수로 돈을 벌고, 불륜까지 저지르는 개츠비가 지나치게 순진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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