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인생의 방향성을 물으신다면

오늘의 움직임이 내일의 방향을 만들어

by 궁금한 민지

코호북스에서 나온 실라 헤티의 <마더후드>를 읽는다. 몇 달 전 열광했던 <두루미 아내>가 남자를 만나는 일에 대한 자신의 내면과 현실의 사투를 그려냈다면, <마더후드>는 37살 작가가 자신이 처한 상황과 친구, 애인과의 교류를 오가며 아이를 갖는 일에 대한 자신의 진짜 욕망이 무엇인지 끝까지 추적하는 글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나마도 연애는 ‘해보는‘ 수가 있지만, 아이를 갖는 일은 일단 질러보기엔 무리가 있기에 내면의 드라마에 머무른다. 아주 치열한 방식으로.


인생의 방향성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인생의 방향성? 커리어 방향성에 대한 질문을 받은 적은 있지만… 어렵다. “인생의 방향성이라… 간단하게 말하기 쉽진 않은데 일단 아직까진 아이를 갖고 싶고, 아이를 키우면서 가정을 건사하는 그림을 그리는데 그게 내 뜻대로 되는 건 아니니까(중략)…“ ‘아이를 낳는 일‘을 인생 방향성에 고려하는 게 맞는지부터 의구심이 생긴다. 어차피 컨트롤 불가능한 영역이기에 끊임없이 생각하는 거겠지.


인생의 방향성이라는 건 뭘까. 시간이 흐를수록 무언가 생각하는 바를 ‘단어’로 짧게 내뱉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인생은 무슨 업적을 이루는 게 아니고, <어떠어떠하게 살다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슨 직업을 갖고 무슨 회사에 다니며’ 같은 말은 의미를 잃은 지 오래다. 좀 더 스스로 끄덕일 수 있는 하루를 보냈으면 하는 바람만이 있다. 지금 있는 곳에 충실하고, 지금 있는 곳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스스로 수긍할 수 있는 환경 - 내 기질과 적성과 욕구를 크게 거스르지 않는 곳, 나아가 최대한 발현되는 곳에 가도록 움직여야 한다는 자각만이 선명하다.




방향성은 기획의도라는 단어로도 읽힌다. 인생에서 생각해 보면, 깊은 뜻을 품고 작심하고 들어갔다가 망한 케이스가 있고, 작심해서 들어가서 잘된 케이스가 있다. 웃기게도 오랫동안 작심해 놓고 정작 기회가 왔을 때 고개를 돌린 경우도 있다. 경력으로 치면, 망한 케이스는 학동에 5개월간 다녔던 패션 트렌드 회사가 그랬고, 잘된 케이스는 인하우스 에디터로 다닌 두 번째 C회사가 그랬다. 정작 기회가 왔을 때 딴 데로 한눈을 판 경우는 대학 전공이 있다. 중학생 때부터 패션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른 나는, 정작 K대 패션 디자인과가 합격했을 때 가지 않았다. 이건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몇 년 전엔 이것을 회피 성향에서 이유를 찾았더랬다. 지금은 특정 카테고리에 자신을 한정하고 싶지 않았던 까닭일까, 짐작할 따름이다.


커리어가 당초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연애는 말할 것도 없다. 일단 등장인물이 두 명이다. 그럼 일종의 협업이고, 대부분은 시작도 하기 전에 빠그라진다. 최근 완독한 임지은과 니키 리의 대화책 <애정행각>는 연애가 얼마나 인공적 행위인지 말한다. 자신이 본성대로 움직이고 있다면, 상대가 인공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거라고 지적한 발언이 인상적이었다. 천연의 케미스트리를 기대하지 말고, 부딪치고 깨어져야 한다는 말은 위안이 되기도 했다. 역설적으로 이는 이 같은 인공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에 연애가 힘듦을 시사한다.


다시 <마더후드>로 돌아오기. 아이를 낳는 건 선택일까? 인생에서 선택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 아이를 ‘낳게 되었어’ 같은 문장은 한 세상에 생명을 내놓는다는 큰 사건에 꽤 부조리할지 모르지만, 많은 일들이 그렇지 않나. 누군가의 눈엔 나는 패션 디자인과를 ‘가지 않기로 선택’한 사람일 테지만, 실상은 내 안의 다양한 분야에 대한 관심과 좋아하는 일을 직면해야 한다는 두려움의 결합이 진실에 가깝겠다. 작심은 좋았는데 결과적으로 못된 일과 잘된 일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애초의 야심이 구부러진 경우는 얼마나 많았나. 몸 담았던 직장과 사귀었던 남자들을 떠올린다. 확실한 건 지금은 그 모두를 떠났다는 것뿐이다.




지난주 아침. 친구들과 카톡방에서 오전부터 수다를 떠는데, ‘수습’이라는 단어가 반복됐다. 오전부터 무거운 단어가 등장했는데, 그 쓰임은 다 달랐다. 각자 살아가는 방식이 다른 만큼 수습이 등장하는 타이밍도, 수습이 짊어진 역할도 다른 듯했다. 내 경우에는 수습을 떠올리지 않을 정도로 ‘좋아하는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 잘할 거라는 자신감이 더해지면 최고. 좋아하는 마음은 스스로 일을 벌이는 원인이자 꾸준히 움직일 동인이 되고, 그에 따라 발생하는 일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을 잊게 한다. 내게 애정은 수습해야 하는 부담 때문에 시작도 않는 안타까운 불상사를 막아주는, 귀한 힘이다.


자, 그래서 이 글을 어떻게 수습할까. 인생은 방향성이 중요할지 모른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고, 뜻에 배반당하는 경우도 많다. 그것은 이상적인 맘을 품고 들어간 회사일 수도, 새롭게 시작한 연인 관계일 수도, 혹은 나 자신과의 약속(예: 이번 달엔 도서구입을 2권만 할게요) 일 수도 있다. 심지어는 오늘 내가 어제 나를 배신한다. 어, 어제 산 책은 내 정신의 양식이고, 오늘 집은 이 책은 내 자기계발에 도움이 될 거야, 같은 식. 관계도 뜻대로 안 되기는 매한가지다.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도, 인생 반려자 감이라고 발탁해도 상대가 반려하면(!) 그 관계는 거기서 ‘마쳐진다’.


쓰다 보니 시각에 따라 패배의식처럼 읽힐 수도 있겠다. 요는 인생에 선택이 중요하고 주도적인 실행이 중요한 건 알겠는데, 사실상 선택이라 말하기 애매한 일도 많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오늘 내가 살면서 접한 것들이 내일의 내가 갈 방향성을 만들어 버리기도 하니까. 그렇게 내일이 오늘이 되면, 또 그때의 움직임이 다시 또 내일의 나를 만들어 버리는 걸. 게다가 인생에는 얼마나 많은 타인이 함께 하는지! 그래서 요즘엔 이런 생각을 한다. 하루하루 스스로 끄덕일 만한 일들을 하면서 벌어진 형국을 <수습하며 사는 일>이 살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그리고 알다시피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매일의 좌표에서 느끼곤 하는 껄끄러움과 불편함은 지금 나한테 요청하기 때문이다. ‘너 그 자리에 있어선 안 돼, 동남쪽으로 0.1cm만, 이동해 보라니까?’


이런 글들도 다 제 하루를 열심히 살다가 만난 질문에 의해 ‘태어나지는’ 거다. 오늘의 나는 몇 도나 어느 방향으로 이동했으려나?



사진: 직접 촬영. 프랑스 트루빌의 끝도 없는 모래 해변에서.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