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요, 저는 둘이 좋습니다

내겐 너무 어려운 집단 대화

by 궁금한 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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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친한 동생을 만났다. 정확히는 동생과 동생의 지인을 만났다. 동생이 북촌에 있는 바에서 일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마침 동생은 자신의 또 다른 친한 언니 A도 올 거라면서 방문을 반겼다. 겨울밤, 운치 있는 북촌의 바와 달콤하게 목을 적실 깔루아 밀크 생각에 괜스레 설렜다.

문제는 대화 주제였다. 동생과는 1년 만에 보는 상황이었고, A와는 초면이었다. 나는 동생과 미처 업데이트되지 못한 정보를 채우기 바빴지만, 동생과 A는 어제 본 듯한 친밀감을 자랑했다. 안타깝게도 예능과 드라마로 점철된 대화에는 내가 낄 틈이 없었다. 그러던 중 화제는 방탄소년단으로 튀었다. 방탄소년단 뮤비를 안 봤으면 어쨌을까.

불행 중 다행으로 바는 선곡이 좋았다. 나는 동생에게 곡명을 물었고, 칵테일을 만드는 손놀림에 시선을 뺏겼다. 자정을 넘기면서 하나둘 들어온 남자 손님은 우리의 메마른 대화에 장작이 되어 주었다. 새벽 1시, 나와 A는 바를 나서며 다음에 또 보자고 번호를 교환했다. 서너 시간의 대화로 친해진 걸까. 언제쯤 톡을 해야 할지 고민이다.




1. 핑퐁은 무거운 공으로 못해요

나는 집단 대화에 약한 편이다. 가령 지난해 연말 KBS 연기 대상을 둘러싼 대화를 상상해보자. "이번에 천호진 배우 수상소감 보셨어요? 아내한테 건네는 말이 인상적이더라고요. 하지만 난 그렇게 못할 것 같아. 지금도 너무 힘든걸요." 물 흐르듯 연애와 사랑에 대한 생각으로 옮겨간다. 어느덧 대화는 알랭 드 보통의 <낭만적 사랑과 그 후의 일상>에 대한 감상으로 번진다.

셋 이상일 경우는 다르다. 한 소재가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천호진 배우 수상소감 봤어요?" "그래요, 짠하더라." "어휴, 난 못 그럴 듯" 하며 대화가 핑퐁처럼 빠르게 오간다. 이야기는 급히 다음 주제를 찾아 나선다. 혹은 그와 비슷한 커플들을 나열하는 데 그친다. 집단 대화에 묵직한 주제는 어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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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의 공통된 관심사는 회사지, 암

세 명 이상의 공통 관심사를 찾는 일도 쉽지 않다. 사람 머릿수가 많아지면 그만큼 교집함이 적어진다. 대화 재료는 가장 대중적인 소재로 향하고, '나눌 수 있는' 말만 나누는 데 그친다. 상대방이 껄끄러워하지 않도록 말이다.

자연스레 직장에서의 대화는 일에 국한된다. 점심시간을 떠올려보자. "어제 회의 때 대표님 말씀 들었어요?" "으레 하는 말이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세요" "XX팀 PT 자료 준비하는 것 보고 깜짝 놀랐다니까요" "이번에 비품 신청했는데, 많다고 한 소리 듣는 건 아닐지 모르겠어요" 누구나 한 마디씩 보태도 어색하지 않은 내용. 안정감을 주지만 때때로 하품이 나온다.



3. 타이밍이 반이다, 공공칠빵 게임

대화에 끼어들려면 타이밍도 중요하다. 대화가 뚝 끊기면, 무슨 말로 포문을 열어야 할지 고심하게 된다. 마침 지하철에서 본 신박한 메이크업 영상을 떠올린다. "오늘 인스타그램에..." 입을 여는 순간 맞은 편에 앉은 후배 B가 말한다. "여기 음식 되게 깔끔하지 않아요?" 이야기는 오늘 메뉴 선택이 탁월하다는 쪽으로 튄다.

애써 침묵을 깼건만 '뭐라도 말을 꺼내야겠다'라고 결심한 사람이 나뿐이 아니었던 거다. 한 사람은 물러나야 한다. 또다시 찾아올 침묵의 순간을 노려야 한다. 공공칠빵 게임 같은 거다. 언제 빵이 날라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바통을 넘기면서 리액션도 준비해야 한다. 순발력이 필요한, 난이도 높은 미션이다.


유수풀에서 놀기 보단 우물을 긷고 싶어

타인의 의견을 집중해 듣는 것을 좋아한다. 생각의 깊이와 폭을 달리하려면 그만한 일이 없다. 일상적인 대화거리도 대개 각자 천착하는 분야와 맞닿아 있다. 그건 영화 <1987>에 대한 소회일 수도 있고, 우울증이 있는 지인을 대하는 방법일 수도 있으며, AI와 최저임금이 불러올 미래에 대한 걱정과 기대일 수도 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해도 둘이 모일 때와 셋이 모일 때의 합은 다르다. 두 사람은 속에 품은 고민을 조심스레 꺼내놓고, 굴려보고, 쓰다듬고, 때로는 함께 두드려 본다. 반면 집단은 유쾌하다. 셋 이상이 모이면 깔깔거리며 거리를 누빈다. 남녀불문하고 접시가 깨지도록 명랑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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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이 주는 열기가 필요할 때가 있다. 하지만 내 경우엔 7:3이다. 둘의 대화를 더 많이 갈구한다. 어떤 형태로든 타인과의 만남은 마음을 촉촉하게 채워주지만, 역시 넷보단 셋이, 셋보단 둘이 좋다. 여럿이서의 대화가 워터파크에서 유수풀에서 노는 즐거움이라면, 둘만의 대화는 내면의 우물을 긷고, 이를 공유하는 기쁨이다.

그러니까 우리, 내일 둘이 만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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