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읽은 19권의 책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 _이순자
늦은 나이에 글을 쓰게 된 작가의 유고집이다. 우리 모두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담한 문체로 적어 내려간 글들이 있다. 보편적이어서 아름답다. '윤미네 집'을 보고 눈물을 멈출 수 없었던 대낮의 도서관을 떠올리게 했다. 수녀가 된 딸에 대해 말하는 부분에서 특히 울지 않을 수 없다. 늙고 아프고 가난한 생활에 대해 살펴보게 된다. 누구나 늙고, 나도 그러할 것이다. 미뤄온 죽음에 대한 생각에 덧붙여 베푸는 마음을 배웠다.
여우와 나 _캐서린 레이븐
'나의 문어 선생님' 다큐멘터리처럼 여우와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다. 여우에는 인격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생물학자가 서술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야생공원 관리자이자 연구원으로 오두막에 머물며 일어나는 일들을 매우 상세히 담았다. 감상과 연구에 대한 비율이 있다면, 연구 쪽에 추를 좀 더 올려놓고 싶기에, 자연과 관계를 맺는 법에 대한 연구서로 봐도 좋겠다. (어린 왕자나 월든을 기대한다면, 다소 차갑다) 등장하는 동물이나 식물들이 생소한 것이 많아서 사진이나 그림이라도 함께 있었으면 싶었다. 외롭고 단단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늘! 좋아하고 곱씹고 기다린다.
걷기의 인문학 _리베카 솔닛
5년 전 가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었다. 이제는 조금만 예전 같으면 5년 전, 7년 전 이렇다. 걷는다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많은 사유와 철학을 담을 수 있다니. 리베카 솔닛의 책은 밑줄 치면서 공부하듯 읽게 된다. 내용이 방대하고 집중력이 필요한 부분이 많아, 좋아하는 부분만 골라 읽어도 좋겠다. 루소의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다.
생산 지향적 문화에서는 대개 생각하는 일을 아무것도 안 하는 것으로 간주하는데, 아무 일도 안 하기란 쉽지 않다. 아무 일도 안 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무슨 일을 하는 척하는 것이고,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에 가장 가까운 일은 걷는 것이다. (...) 보행은 일하는 것과 일하지 않는 것, 그저 존재하는 것과 뭔가를 해내는 것 사이의 미묘한 균형이다.
고맙습니다 _올리버 색스
친구네 집에서 보게 된 책으로 신경과 전문의가 죽음을 앞두고 쓴 글이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와 의식의 강을 통해 접한 작가와 아예 다른 사람 같다. 주기율표에 자신의 나이를 비교하다니! 좀 더 내밀하기에 솔직하고 끝에 가깝다. 날씨가 추워지니 여러 종류의 마무리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데, 최근에 가장 많이 떠오른 것은 르코르 뷔지에의 4평짜리 오두막. 철학과 자본을 담은 많은 건축물의 끝에, 마지막에 머문 곳은 바닷가의 한 칸의 방이었다. 언제든지 수영을 하러 떠날 수 있는. 전시회 장에서 모형으로 만든 오두막 안에 들어갔던 기분을 자꾸 되뇌게 된다. 거기에 어떤 삶의 방향이 있을까.
안일한 하루 _안예은
오랜 시간 좋아해 온 가수의 새로운 떡밥을 주울 수 있어 행복하다. 같은 오덕의 향기가 진하게 나서 웃겼다가, 가족의 편지와 심장 수술 부분에서는 울었다가... 아주 난리 난리! 그래서 좋다고요. 기차에서 읽다가 눈물이 나서 덮었다 꺼냈다를 반복했다. 그저 계속해 주세요!라는 한 떨기 콩나물의 마음이 전해졌으면 한다. 책을 읽고 얼마 후에 콘서트에 다녀왔는데 자학적 셋리가 만족스러웠다. 특히 좋아하는 노래들을 묶음으로 들을 수 있어 든든하게 배 뚜들긴 하루. 튼튼한 성대... 플랭크로 다져지는 중인 당신의 척추 응원해... 여러분 안예은은 은근히 웃기답니다.
매일을 헤엄치는 법 _이연
수영을 배우는 나에게 친구가 추천해준 책. 수영하는 할머니! 요가하는 할머니! 시를 읽는 할머니! 나의 꿈이잖아! 허리가 곧고 스스로 걸을 수 있고 시를 읽을 마음의 여유가 있고 싶어서, 지금 이런 모양의 하루를 보낸다. 새로운 수영장을 갈 용기가 난다. 읽고 나니 수영을 하고 싶어 진다. 또 그림을 그리고 싶다!
지킬의 정원 _거트루드 지킬
좋아하는 것을 탐구해왔으며 나누려고 하는 이의 아름다운 마음. 부드러운 촌철살인과 따뜻한 마음 사이를 걷다 보면 마음이 정화된다.
배우는 법을 배우기 _시어도어 다이먼
예전에 한참 유행하던 '스터디 코드'라는 책이 생각난다. 잘 되지 않는 수영에 지친 나는 비로소 이런 글자에 매달려보게 되는데…
읽으며 느낀 점: 이 사람이 요가를 배웠다면... 요가를 배우심이 좋겠습니다.
절판을 중고 구매했다. 근데 굳이 그럴 필요 없었을 듯.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 _오생근 조연정 엮음
문지 시인선 500호를 기념하여 나온 모음집이다. 2017년에 사서 읽은 후에 오랜만에 다시 꺼내 들었다. 시를 수능 공부로 시작한 터라 이렇게 묶어두니 고전시가 공부했던 문제집이 생각났다. 어떤 시집을 살지 고민되는 분들은 이 책을 통해 찍먹 후에 마음에 드는 작가의 책으로 넓혀나가도 좋겠다. 이성복, 황동규, 마종기, 최승자, 황지우의 시는 여전히 좋았고, 조은, 나희덕, 조용미, 김소연, 김행숙, 이성미를 응원한다.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_진은영
바스러진 생명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세월호를 생각나게 하는 시가 많았고, 뒤의 해설의 힘을 빌리니 그렇도록 쓴 듯하다. 꾹꾹 눌러 담은 마음의 틀이 무거워 슬프다. 평범한 사람들이 많이 죽어 슬픈 가을이다. 이런 기분을 시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프로젝트 헤일메리 _앤디 위어
지금은 세시고 나는 곧 새벽 수영을 가야 한다. 이렇게 오래 볼 생각은 아니었는데 끊을 수 없었다! 두 시간 반 동안 같은 자세로 읽게 하는 흡입력이 있다. 재밌고 뭉클. 이런 유머가 필요했다. 이거면 됐다. 서사가 있다면 인터스텔라의 타스를 보고도 오열할 수 있기에 록키는 애절까지 했다. 꽉 닫힌 해피이니 걱정 말고 달려가시길!
지구 끝의 온실 _김초엽
이제야 읽어본다. 새로운 표지로 재판되어 접할 수 있었다. 판타지 sf 계열로 정하고 싶고, 식물이 주인공이다. 세 가지 이야기가 액자식으로 덩굴처럼 엮인다. 짜인 구조나 이야기를 끌어오는 힘에 비해 결말과 숨겨진 메시지가 허무했지만... 어쨌든 형광색 안개 속에서 재미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고, 그래서 많은 사랑을 받았나 보다. 넷플릭스나 영화로 조만간 볼 수 있길 바라본다.
헝거게임 _헝거게임, 캣칭 파이어, 모킹 제이 _수잔 콜린스
책 읽는 일을 시동 걸게 하는 몇 가지 고정 레퍼토리 중 하나. 해리포터를 포함해 익숙한 책으로 달린 여름의 여운을 달래고자 시작했다. 여전히 짜릿하고 읽기에 즐겁다. 오십 살이 되어도 재밌을 듯. 캣칭 파이어에서 좋아하는 부분은 그림을 그리는 피타. 이것저것 합치면 한 열 번쯤 정주행 한 것 같은데, 이번에 느낀 점은 결말이 아쉽다. 급하게 끝낸 느낌. 그래도 완결된 시리즈라 깔끔하고,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고 있기에 이전 정주행과는 다른 태도로 볼 수 있었다.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 _수잔 콜린스
스노우 대통령의 과거. 악역의 과거가 밝혀지는 내용을 후속으로 선택한다는 것이 위험하기도 하고 기대되기도 한다. 구구절절이 되거나 혹은 거대한 받침이 되어 시리즈의 기초를 거꾸로 다져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헝거게임의 원형이 되는 사건들이 펼쳐진다. 루시 그레이와 캣니스의 비슷한 점을 짚으며 읽는다면 재미가 두 배. 역시나 흡입력이 최고다. 가끔은 이런 이야기들로 한번 글씨 속을 빠르게 훑어줘야한다. 거기서 오는 만족감도 크다.
벼랑 위의 집 _TJ 클룬
'페러 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 시리즈도 매우 좋아하는데, 그걸 떠올리며 시작한 판타지 소설이다. 한참 판타지 책을 뿌시던 초딩 시절의 옛 갬성으로 도전했다. 앞부분만 여러 번 읽다가 어쩐지 미적거리게 된다. 그리고 글씨가 너무 두껍다. 이상.
가장 나쁜 일 _김보현
사지 않을 법한 책을 선물로 받는 건 랜덤박스처럼 즐거운 일이다. 젊은 작가의 갓 나온 소설이 오랜만이라 색다른 기분으로 읽을 수 있었다.
스미레 할머니의 비밀 _우에가키 아유코
누가 엄마를 닮았다며! 선물 받았다. 러블리한 책! 이걸 보고 엄마가 그린 그림도 함께 귀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