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환자의 기묘한 모험 1]
평소처럼 일어났을 뿐인데 갑자기 허리에 전기충격을 가한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아악!"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넘어졌다. 순간적인 고통이라 생각하고 살짝 움직였다. 하지만 다시 한번 똑같은 고통이 찾아온다.
누워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조금만 잘못 움직였다가는 그 지독한 고통이 언제 어떻게 나를 덮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나는 그대로 누워있었다. 처음 든 생각은 'ㅈ 됐다' 였다. 두려웠고, 막막하고, 내 인생이 끝장난것 같았다. '장애인이 되는건가?' 라는 생각을 시작으로 온갖 망상에 사로잡혀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내는 옆에서 놀라서 어쩔 줄 몰르고 있다가 119를 불렀다. 조금만 움직여도 칼로 쑤시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응급구조원분들이 오셔서 간이침대에 옮겨서 들어올릴 때에도 몇번이나 비명을 질렀는지 모르겠다.
병원에 도착했다. ct를 찍고 mri를 찍기 위해서 날 들어 옮길 때 마다 정말 죽는 줄 알았다. 비명을 지르면서 고통속에서 몸부림 쳤다. 검사 결과를 본 의사는 단순 디스크가 터진거라며 신경주사 몇방이면 오늘 걸어서 나갈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나는 그 말을 믿고 신경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허리를 움직이면 여전히 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고, 담당의사는 영문을 모르겠다며 일단 입원을 시켰다.
입원을 하고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나는 점점 불안했다. 불치의 병인가? 평생 이렇게 누워지내야 하는건가? 아무 소득 없이 입원한지 일주일이 지나면서 나는 누워서 꼼짝못하는게 어떤 의미인지 조금이나마 깨닫게 된다.
나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음식을 먹을 때 고개만 겨우 옆으로 돌려서 아내가 떠 먹이는 음식을 받아먹었다. 누워있어서 소화도 되지 않았고, 많은 양을 먹을 수도 없었다. 죽지 않을 만큼만 먹었고 그것마저 힘들었다. 더 비참한건 생리현상이었다. 소변은 그나마 소변통에 받으면 되지만 대변은 기저귀를 차고 볼일을 봐야 했다. 옆에서 손과 발이 되어서 도와주는 아내는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고 오히려 나보다 나를 더 걱정했다. 아내는 그렇게 24시간 내 옆에서 나를 간병했다.
하지만 집에는 아직까지 엄마의 돌봄이 필요한 초등학교 4학년, 3학년, 1학년 아이들이 3명이나 있었다. 그래도 조금 컷다고 첫째 딸이 동생들을 챙기고 이것 저것 도와줬지만, 엄마가 필요한 순간들이 있었다. 그럴 때 마다 아내는 집에 가서 아이들을 챙기고 다시 병원으로 와야만 했다. 아내가 잠깐 자리를 비우는 순간에 나는 시체처럼 누워있어야 했다. 계속 같은 자세로 누워있으면서, 등에 땀이 차고, 간지러워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기저귀에는 대변과 소변이 이미 한 가득이다. 목이 마르지만 아내가 올 때까지 버텨야 한다. 간병인을 쓰면 좋겠지만 하루에 10-15만원을 지불해야 한다. 마이너스 통장 인생은 이런 혜택을 받을 수 없다.
이 시간 동안 나 혼자 눈감고 기도하면서 많이 울었다. 내 처지도 불쌍하고 아픈것도 억울하고 수 많은 감정이 있었지만, 그것 때문에 운게 아니라. 그동안 이렇게 평생을 살았을 장애인들, 치매 노인들, 이런 비슷한 아픔 속에서 지금도 버티는 수 많은 사람들이 생각나서 그렇게 눈물이 났다.
나는 고작 일주일도 안됐는데, 이렇게 이미 몇 십년을 살아온 사람들, 그리고 앞으로도 몇 십년을 살아야 할 사람들. 그리고 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버텨내는 사람들… 그들을 생각하며 그렇게 일주일동안 입원해있었다.
여전히 원인이 밝혀지지는 않았다. 의사는 척추골절이 의심되긴 하지만 사진 상으로는 불분명하다며 혹시 모르니 골절된 환자들에게 사용하는 허리보조기를 착용해 보자고 했다. 그래서 주문 제작한 허리 보조기를 착용하게 되었고, 그 순간 놀랍게도 나는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골절이었나 보다. 너무 기뻣다. 의사도 사진상 골절은 아닌데 보조기를 착용한 후 움직일 수 있게 된 나를 보고 신기하다고 했다. 여전히 원인은 알 수 없다고 했지만, 계속 입원할 수 없어서 원인을 찾지 못한 채 나는 퇴원했다.
허리 보조기를 했지만, 잘못 움직이면 여전히 그 끔찍한 고통이 찾아왔다. 걷는것도 거의 불가능해서 집에서 거의 누워만 있었다. 다만 허리 보조기 덕분에 어느정도 움직임은 가능해 졌고, 그렇게 한 두달 버티면 골절된 허리가 다시 붙어서 괜찮아지지 않을까 라는 소망을 품고 버티기 시작했다. 그렇게 집에서 생활하면서 나아지길 기도했지만, 대부분의 아픈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 처럼 기도는 효과(?)가 없었고 상태만 점점 악화되었다. 아내는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나를 더 큰 병원으로 데려갔다. 걷기도 힘든 상태에서, 아내의 손에 이끌려 나는 척추전문 병원에 다시 입원하게 된다.
그곳에서 다시 mri를 찍었고, 척추가 골절이 의심만 될 정도였던 내 척추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5군대 골절이 확연하게 보일 정도의 상태로 변해 있었다. 나와 아내는 너무 놀랬다. 그런데 그 뒤의 의사 선생님의 말이 나를 더 두렵게 했다. "허리 골절이 문제가 아니라, 왜 40대의 젊은 나이(?)에 골절이 되었는지가 더 문제입니다. 노인 분들은 가끔 아무 충격없이 골절이 되는 경우가 있지만, 40대에는 그런 일이 생기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나는 가만히만 있어도 골절이 되는 내 몸을 더 이상 다룰 자신이 없어졌다. 이젠 더 이상 내 몸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은 5군대 골절이지만 나중에 다 부러져있을 것만 같았다. 정밀 검사를 받았다. 검사를 하기 위해서는 허리 보조기를 풀어야만 했고, 그 순간 다시 찾아오는 끔찍한 고통속에서 나는 비명을 지르며 여러 검사를 받아야만 했다. 병원에서 이미 나는 유명인사였다. 검사할 때 마다 나를 들어 옮기는 선생님들 팔을 잡고 살려달라고 빌면서 우는 사람으로…
그렇게 검사 끝에 의사 선생님의 결론은 혈액암(다발골수종)이 의심된다는 것이었고, 정확한 진단을 위해서 더 큰 병원에서 골수검사를 하라고 했다.
(다발골수종은 골수에서 면역체계를 담당하는 백혈구의 한 종류인 형질세포(Plasma Cell)가 비정상적으로 분화, 증식하여 발생하는 혈액암을 의미합니다. 다발골수종은 뼈를 침윤하여 녹임으로써 잘 부러지게 하며, 골수를 침범하여 이를 감소시키는 특징이 있습니다. - 서울아산병원)
아내는 암일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말에 내가 죽을 것만 같은 두려움을 느끼고 바로 그날 저녁에 사설 구급차를 불러서 아산병원 응급실로 향했다.무식하면 용감하고,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는 말을 증명하기 위해 그렇게 우리 부부는 저녁 12시에 서울 아산병원 응급실로 출발했다. 아내는 그때까지 응급실에 가면 모든 병원이 다 받아주는 줄 알았다고 지금에서야 나에게 고백했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 부부의 모험은 …. (2부에 계속)